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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낙비


BY 하윤 2008-11-14

소낙비

휑한 대합실에 우두커니 서 있던 숙희는 혜란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한달음에 달려가 혜란의 손을 덥석 잡았다. 숙희는 좀 흥분해서 물었다.

“아까 전화 받고 깜짝 놀랐어. 정말로 네 남편이 허락해 준 거야?”

순간, 혜란이 현관을 나서는 순간까지도 끝내 내다보지 않았던 남편 상수가 떠올랐지만 혜란은 선선히 대답했다.

“마침 그이가 하던 일이 끝났거든. 애들 봐줄 테니 갔다 오래.”

속초에 한번 갈까 하는데 같이 가 줄래? 숙희가 그 부탁을 한 건 지난주의 일이었다. 영화 ‘밀양’을 보고 나와 바로 찻집으로 들어갔고, 거기서 나온 냉커피를 단숨에 마신 다음 숙희는 담담하게 말을 꺼냈었다.

“속초는 왜?”

“민지가 거기 있어. 그 여자와 살림을 합친 것 같아.”

“뭐?”

혜란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숙희의 남편이 바람도 피웠다는 말은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껏 그 관계가 유지되고 있었고 이제는 살림까지 합쳤다니! 혜란은 괜히 분통이 터졌다. 그러잖아도 그날 영화를 보는 내내 눈물을 흘리던 숙희 땜에 마음이 안 좋던 참이었다.

혜란은 칸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는 전도연의 연기가 이미 뛰어났던 예전과 크게 다를 게 없는데다 줄거리까지 다 알고 갔기 때문에 조금 지루해져서 영화가 빨리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한데 숙희는 그렇지 않았다. 사람들이 다 빠져 나갔는데도 그대로 자리에 앉아 있을 정도로 영화에 몰입한 것이었다. 혜란은 숙희의 그 심정을 충분히 이해했다. 전도연이 아이를 유괴 당한 후 어찌할 바를 몰라 도로 한가운데에 쭈그리고 앉아 울음을 터뜨릴 때는 혜란 자신도 그만 울컥했는데, 비록 유괴는 아니지만 딸 민지와 생이별 상태인 숙희로선 더 가슴이 찢어졌을 터였다.

커피를 다 마신 숙희는 말없이 바닥에 남은 얼음만 깨먹고 있었다.

“근데 넌 왜 그렇게 심각해? 혹시 민지아빠한테 미련이 남아서 그러니?”

혜란의 물음에 숙희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첨엔 휴대폰에 여자이름이 뜨더라. 다음엔 수상한 문자가 오고. 주머니에서 모텔 영수증도 나오고. 그런데도 난 전혀 화가 안 났어. 마침내 그의 지갑에서 여자사진을 발견하던 날은 굳이 내가 애쓰지 않아도 이혼이 쉽게 될 것 같아서 기쁘기까지 했어. 그러니 한 달이고 두 달이고 집에 안 들어와도 전혀 아쉽지 않았어. 이참에 아예 사라져 버려라, 그럼 남편 죽은 셈 치고 민지는 내 힘으로 어떻게든 키운다, 그런 결심까지 했으니까.”

어차피 생활비 한 푼 벌어다 주지 않는 남편이었다. 하지만 숙희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사업도 여자도 뜻대로 되지 않았는지 언젠가부터 남편은 집안에 들어앉아 숙희만 감시하기 시작했다. 잘 견뎌 오던 숙희가 끝내 참을 수 없었던 것은 바로 그 부분이었다.

“그 여자가 민지한테는 잘해 줄까?”

혜란은 지금 숙희가 가장 염려하고 있을 문제를 제 쪽에서 먼저 말해 버렸다. 지금껏 놀고먹는 걸로 뼈가 굳은 숙희 남편이 새살림을 차렸다 해서 그 버릇을 고쳤을 성 싶지가 않았다. 그렇다면 뒤늦게야 속았다는 걸 깨닫고 땅을 치고 후회할 여자한테 전실 자식까지 챙겨 주길 바라는 건 무리였다. 하지만 숙희는 애써 좋은 쪽으로 생각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지난 2월에 민지 졸업할 때 가서 보니까 일곱 살쯤 먹은 사내애가 그 여자 손을 꼭 잡고 있더라. 그 여자도 애 엄만데 악하게야 하겠니? 인상은 그리 나빠 보이지 않았어.”

하나 남은 얼음까지 깨끗하게 먹어 치웠는데도 숙희는 유리컵을 손에서 놓지 않고 계속 만지작거렸다. 마음이 많이 불안하다는 뜻이었다.

집을 나온 후 처음 일 년 간 숙희는 민지를 보러 가지 않았다. 민지 얼굴을 보는 순간 모든 결심이 수포로 돌아갈까 봐 그것이 두렵기도 했지만, 만에 하나 남편한테 붙잡혔을 경우 두 번 다시 도망칠 기회는 없을 거라는 게 가장 큰 이유였다. 딱 한 번 친정오빠를 앞세워 집에 간 적은 있었다. 집 나온 지 한 달이 채 되지 않았을 때였다. 그때 민지는 학교에 가고 없었다. 숙희의 남편은 숙희 앞에 무릎을 꿇고 빌었다. 하지만 그건 이미 식상한 수법이었다. 숙희의 남편도 이번만큼은 번번이 속아 주었던 예전의 숙희가 아니라는 것을 곧 알아챘다. 그러자 태도를 싹 바꾸어 예의 그 익숙한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 그는 죽을 때까지 이혼도 안 해줄 것이며 민지도 보여주지 않을 거라고 협박했다. 애초에 대화가 될 거라고 기대도 안 했지만 숙희는 새삼 까마득한 벽에 부딪힌 듯 절망했다. 숙희의 오빠 역시 숙희처럼 모질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여서 두 사람은 별 소득 없이 그냥 집을 나와야 했다. 그때 화장대 위의 화장품이 숙희의 눈에 들어왔다. 숙희는 황급히 그것들을 가방 안에 쓸어 담았다. 10여 년의 결혼생활 끝에 숙희가 갖고 나온 건 입고 있던 옷과 신발 그리고 그 화장품이 다였다.

마침내 숙희가 민지를 보러 갈 용기를 낸 것은 일 년을 훌쩍 넘긴 어느 가을날이었다. 그러나 숙희가 찾아갔을 때는 이미 숙희의 남편이 전세금을 빼서 이사를 가버린 뒤였다. 이사 가기 전 몇 개월 동안 민지 꼴이 말이 아니었다며 숙희네 연립 위층에 살던 여자는 안타까워했다. 숙희는 흩날리는 낙엽을 밟으며 그냥 돌아와야 했다. 그렇게 또 어영부영 시간이 흘러갔다. 숙희의 마음이 다시 급해진 것은 민지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가 다 되어서였다. 숙희는 허겁지겁 민지가 전학 간 학교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찻집 벽시계가 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혜란은 아이들이 돌아오는 3시 전까지는 집으로 들어가야 했다. 그들은 찻집을 나와 육교를 건너 재래시장으로 갔다. 헤어지기 직전에 시장을 한 바퀴 둘러보는 것도 두 사람이 만나면 꼭 하는 일 중의 하나였다. 혜란은 저녁 찬거리를 몇 가지 샀다. 끼니를 밖에서 거의 해결하는 숙희는 늘 혜란이 장 보는 걸 구경만 했다. 그런데 그날은 유난히 여기저길 두리번거렸다. 그러더니 속옷가게 앞에서 발길을 딱 멈췄다. 뭐 살 거 있냐고 혜란이 묻자 숙희는 한번 들어가 보자고 했다. 숙희의 눈길은 곧장 주니어용 속옷 코너로 향했다.

“중학생 됐으니까 브래지어도 필요하겠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 하는 혜란을 돌아보며 숙희가 말했다. 그제야 혜란은 아, 민지 거? 했다.

“근데 사이즈는? 이런 건 직접 데려와서 골라야 하는데......”

무심코 말해 놓고 혜란은 아차 했다. 민지는 벌써 초경도 치렀을지 모른다. 엄마도 없이 민지 혼자 그 모든 변화를 감당할 걸 생각하니 혜란은 마음이 짠했다. 그러니 숙희는 오죽할까. 한데 그런 숙희 앞에서 사이즈 따위나 걱정하고 있다니, 참 자신이 생각해도 한심했다.

“웬만하면 맞겠지 뭐.”

숙희는 크게 신경 쓸 것 없다는 듯이 말하고는 물방울무늬와 꽃무늬로 된 브라와 팬티 세트 두 벌을 골라 계산대로 갔다. 선물하실 거죠? 주인은 예쁜 쇼핑백에 포장한 물건을 넣어 주었다. 둘은 시장을 나와 버스정류장까지 묵묵히 걸었다. 혜란은 거기서 버스를 타야 했고 숙희는 조금만 걸어가면 되었다.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둘은 할 일이 그것뿐인 듯 행인들만 뚫어지게 구경했다. 드디어 혜란이 탈 버스가 왔다. 갈게. 혜란은 버스를 향해 뛰었다. 그때 숙희가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다음 주에 같이 가 줄래?”그제야 혜란은 자신이 아직 숙희한테 아무런 답변도 해주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버스의 문은 이미 닫히는 중이었다. 혜란은 사람들 틈을 비집고 들어가 창밖을 내다보았다. 하지만 숙희는 어느새 등을 돌려 부지런히 걷고 있었다. 숙희를 향해 크게 고개를 끄덕여줄 생각이었던 혜란은 못 볼 걸 봤다는 듯이 얼른 고개를 돌려 버렸다.

언젠가 숙희의 생일파티를 한 적이 있었다. 숙희의 직장동료, 동생 등이 모인 자리에 혜란도 친구 자격으로 끼었다. 구성원은 다양했지만 혼자 된 숙희를 진심으로 아낀다는 점에서 모두들 쉽게 의기투합이 되었다. 케이크를 자를 때 숙희는 환하게 웃었고 노래를 부를 때는 춤까지 추었다. 혜란은 모처럼 표정이 밝아진 숙희를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넌 이제 행복해질 일만 남았어. 헤어지기 전에 혜란은 숙희를 꼭 끌어안으며 말했다. 그럼 당연하지. 숙희는 씩씩하게 손을 흔들었다.

택시에 타고 나서야 혜란은 숙희한테 줄 생일선물이 아직 자기 가방 안에 곱게 들어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래서 급하게 다시 내렸다. 막차를 기다리는 사람들 사이로 걸어가는 숙희의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혜란은 숙희를 부르지 못했다. 그 뒷모습이 너무나 쓸쓸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좀 전까지의 즐거운 모습은 모두 연극이었단 말인가. 누구나 축제 뒤의 허탈감에 빠지기는 한다. 하지만 그날 혜란이 본 것은 그런 종류의 가벼운 감상이 아니었다. 그건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절대적인 고독이었다. 잘 견디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은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저걸 어쩌나.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고, 어쩜 평생 짊어지고 가야 될 지도 모르는데. 혜란은 서늘해진 가슴을 쓸어내리며 오래오래 숙희의 뒷모습만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 일 이후 혜란은 숙희와 헤어질 때면 절대 뒤돌아보지 않는 습관이 생겼다. 그런데 속초 얘기가 나온 그날 또 다시 숙희의 슬픈 뒷모습을 보고 만 것이었다.

숙희는 그런 부탁을 쉽게 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런 숙희가 얘기를 꺼냈다는 것은 그만큼 절박하다는 뜻이었다. 혜란은 남편 상수에게 허락을 받아내기 위해 눈을 질끈 감아야 했다. 혼자 사는 여자랑 자꾸 어울려서 뭐 할 건데? 상수는 대놓고 빈정거렸다. 상수의 직장 따라 서울로 옮겨온 후 늘 친구 하나 없는 타지에 자신을 데려다 놨다고 징징대던 혜란이 우연히 마트에 갔다가 거기서 일하는 고교동창인 숙희를 만났다고 했을 때 제일 반가워한 사람이 상수였다. 숙희의 조신하고 참한 인상을 침 튀겨가며 칭찬한 것도 상수였다. 그랬던 상수가 안면을 싹 바꾼 이유는 딱 한 가지뿐이었다. 숙희가 자식을 버리고 집을 나왔다는 사실, 그 하나만으로 숙희는 천하에 몹쓸 여자가 돼버린 것이었다. 상수한테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혜란은 어떤 벽을 느꼈다. 숙희의 됨됨이나 사정을 잘 알던 상수조차 그러한데 생판 모르는 사람들이 이혼녀를 바라보는 시선이야 오죽하랴 싶었던 것이다.

시간이 되어 두 사람은 개찰구로 나가 버스에 올랐다. 심야버스라 손님보다 빈 좌석이 더 많았다. 혜란은 통로 쪽에 앉고 숙희는 창 쪽에 앉았다. 터미널을 빠져나가 조금 달리기 시작하자 화려하던 야경은 모두 사라지고 창밖은 마냥 깜깜하기만 했다. 실내등을 모두 꺼 버린 버스 안도 어두침침했다. 한두 사람이 켜 놓은 보조 등만 희미한 빛을 내뿜을 뿐이었다. 볼 것도 없는데 숙희는 계속 어두운 창밖만 보고 있었다. 혜란은 매점에서 사 온 봉지를 뒤적거려 캔 맥주를 두 개 꺼냈다. 그걸 받아든 숙희는 기다렸다는 듯이 벌컥벌컥 마셨다.

“뭐야, 안 줬으면 섭섭할 뻔했네?”“이게 없었으면 어땠을까 싶어.”

숙희는 다 마신 캔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래도 요즘은 많이 줄어서 다행이야. 난 네가 알코올중독이라도 되는 줄 알았다.”

혜란이 오징어포를 숙희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숙희는 쑥스럽다는 듯 씩 웃었다.

본래 술을 잘 마시지 못했던 숙희가 술 없이는 하루도 견딜 수 없는 지경이 되어 가도 혜란으로선 달리 방법이 없었다. 한순간에 자신의 반평생에 종지부를 찍게 된 숙희가 미치지 않으려면 그렇게라도 해야 할 것 같아 그냥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일 년을 헤매던 숙희가 어느 날부터 변하기 시작했다. 퇴근 후 쓸데없이 휩쓸려 다니던 술자리를 가능하면 피했고 혹시 마시게 되더라도 자제할 줄 알았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마음의 안정을 되찾았다는 것이었다. 혜란은 제 일처럼 기뻤다. 그러나 그 이유를 알고 나선 무작정 기뻐할 수만도 없게 되었다.

바로 숙희에게 남자가 생긴 것이었다. 두 살 연하의 그 남자는 여러 모로 민지아빠와는 달랐다. 능력과 패기가 있었고 무엇보다도 숙희를 구속하지 않았다. 사사건건 남편의 통제를 받는 데 익숙해 있던 숙희에게 아무런 제약 없이 자유롭기만 한 그와의 관계는 꿈같은 것이었다. 거기까지는 다 좋았다. 그 남자 덕분에 숙희가 빨리 상처를 치유할 수 있다면 그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문제는 그 남자가 유부남인데다 혜란의 바람대로 잠시 불타오르다 끝나버리기는커녕 그 사이가 갈수록 더 견고해진다는 사실이었다.

숙희의 나이 이제 서른아홉이었다. 혜란은 숙희가 늙어 죽을 때까지 홀로 살기를 바라지 않았다. 나이 육십이 돼서도 스스로 현관문을 따고 들어가야 한다면 그건 너무 가혹한 일이었다. 그 불행을 피하려면 홀아비든 노총각이든 결혼 가능한 남자를 물색해야지 지금 유부남 따위와 시간낭비를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하지만 조급해 하는 혜란과 달리 숙희는 느긋했다. 어떤 남자와도 다시 한 지붕 아래서 살 생각은 없으며 그 유부남과도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끝낼 수 있으니 걱정 말라고 큰소리까지 쳤다. 하지만 혜란이 보기엔 그리 간단해 보이지가 않았다.

숙희가 혜란의 팔을 가볍게 흔들었다. 혜란은 번쩍 눈을 떴다. 잠이 든 것도 몰랐는데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해 있었다. 어둠뿐인 터미널은 괴괴했다. 버스에서 내린 사람들은 유령처럼 조용히 터미널을 빠져 나갔다. 두 사람은 그 광경을 보면서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숙희가 곧 혜란의 손을 잡아끌었다. 가까운 곳에 찜질방 간판이 불을 밝히고 있었다. 민지 졸업식 때 와 봤던 곳이라면서 숙희는 익숙한 몸짓으로 출입문을 밀었다.

요즘은 경쟁이 치열해져서 갈수록 호화로운 찜질방이 많이 생기는데, 그들이 간 곳은 아담하고 소박한 분위기여서 오히려 더 좋았다. 일요일 밤이라 그런지 한산했다. 간단하게 샤워만 한 뒤 둘은 곧장 휴게실로 가서 드러누웠다.

“참 세상 좋아졌어!”

혜란의 입에서 저절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집 아닌 데서 반바지 차림으로 늘어지게 쉴 수 있다는 사실이 혜란은 새삼 고맙고 신기했다.

“옛날엔 한밤중에 갈 데라곤 여관밖에 더 있었어? 여자 몸으로 그런 데 출입하기가 쉬운 것도 아니고. 지금은 찜질방이 사방에 널려 있으니 뭐가 걱정이야? 그래서 요즘 여자들은 집을 쉽게 나오는지도 몰라. 당장 잠잘 데가 있으니까.”

“맞아. 그 장본인 여기 있잖아.”

숙희가 웃으면서 대꾸했다. 숙희는 어떤 민감한 얘기도 별 일 아닌 것처럼 받아들이는 재주가 있었다. 직설적인 화법을 즐겨 쓰는 혜란으로선 그 덕을 많이 보는 편이었다. 찜질방의 가장 큰 장점은 익명성이었다. 돈만 내면 언제든지 누구나 들어갈 수 있고 그 안에서도 전혀 남의 눈을 의식할 필요가 없었다. 찜질방 주인과 낯을 익힐 정도가 되면 다른 찜질방으로 옮기면 그만이었다. 그것도 성가시다 싶으면 고시원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혜란은 자신의 엄마를 동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혜란의 엄마 역시 숱하게 보따리를 쌌으며 큰맘 먹고 집을 나간 것도 여러 번이었다. 하지만 며칠 후면 어김없이 아버지 손에 붙들려 왔다. 당시의 엄마로선 집을 나가 봤자 갈 데도 숨을 데도 없었고, 그렇다고 객지로 훌쩍 떠날 만큼의 배짱도 용기도 없었던 것이었다. 만약 지금처럼 손쉽게 몸을 의탁할 수 있는 찜질방이 있었다면 혜란의 엄마도 남은 인생을 달리 보낼 수 있었을지 모른다.

“우리도 수면실로 들어갈까?”

“난 거기 답답해서 싫더라.”

혜란의 제안을 숙희가 조용히 거절했다. 고시원에서 지낸 영향이 큰 거 같아. 숙희가 가볍게 덧붙였다. 장시간 차를 타고 온데다 개운하게 씻고 쾌적한 실내에 누워 있으니 다시 잠이 솔솔 왔다. 숙희의 말소리조차 자장가로 들렸다. 그렇게 깜빡 잠이 든 혜란이 깨어났을 때는 벌써 아침이었다. 숙희는 부옇게 밝아오는 창을 향해 꼿꼿이 앉아 있었다.

“언제 일어났어?”

혜란이 뻐근한 몸을 있는 대로 뒤틀며 물었다.

“좀 전에.”

숙희가 돌아보며 말했다.

“한숨도 안 잔 것 같은데?”

숙희는 긍정도 부정도 않은 채 딴 말을 꺼냈다.

“내가 집 나와서 제일 힘들었던 게 뭔지 아니?”

“민지 보고 싶은 거?”

혜란이 냉큼 대답했다. 숙희는 쿡 웃었다.

“그럴 것 같지? 근데 아니야. 잠 한번 푹 자 보는 게 제일 소원이었어.”

그런 고백은 처음인지라 혜란은 귀를 쫑긋 세웠다.

“아무리 술에 떡이 돼서 들어와도, 고시원 침대에 딱 눕는 순간 정신이 말똥말똥해지는 거야. 머리는 빙글빙글 돌고 눈은 따갑고 몸은 젖은 솜처럼 축축 처지는데 정신은 얼음처럼 차가워지는 거야. 미칠 노릇이지. 옆방에 들릴까봐 소리 내서 울 수도 없어. 그렇게 눈뜬 송장처럼 밤을 보내고 손바닥만한 창으로 아침 햇살을 맞이할 때면 그대로 숨이 콱 끊어졌으면 싶더라고. 죽으면 어쨌든 잠은 실컷 잘 수 있을 테니까. 그래도 이를 악물고 출근했어. 지쳐 쓰러지는 게 더 빠르겠다 싶어 일도 더 악착같이 했어. 하지만 단 하루도 잠을 제대로 잔 적이 없었어. 그게 아마 몇 달은 갔던 것 같아.”

숙희는 마치 책을 읽듯이 담담하게 말했다. 혜란은 가슴이 먹먹해져 말없이 숙희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근데 그건 아무 것도 아니었던 것 같아, 지금에 비하면. 혜란아, 나 너무 겁이 나. 민지가 날 어떻게 대할지......”

결국 그거였다. 숙희가 내내 창백한 낯빛이었던 것도, 혜란에게 함께 가자고 한 것도 다 그 두려움 때문이었다. 혜란은 울먹이는 숙희의 어깨를 더 꼭 안아 주었다.

두 사람은 10시쯤 찜질방을 나와 해장국집에서 아침을 먹은 다음 택시를 탔다. 민지가 다니는 학교 앞에 도착했을 때는 점심시간까지 한 시간 정도 여유가 있었다. 둘은 느릿느릿 교정을 거닐었다. 아담한 학교 건물에 비해 운동장이 꽤 넓었다.

4교시 마치는 종이 울리기가 무섭게 숙희는 1학년 교실 쪽으로 뛰어 갔다. 혜란은 담장을 따라 띄엄띄엄 놓여 있는 벤치들 중 하나에 앉았다. 벤치마다 울창한 나무가 한두 그루씩 버티고 서 있어 그늘이 풍부했다. 화단에는 붉은 장미가 한창이었다. 고개를 들어 햇살 사이로 반짝이는 나뭇잎들을 보고 있으려니 저절로 눈이 감겼다. 세상 어느 곳도 이보다 더 평화로울 순 없을 것 같았다. 혜란은 눈은 감은 채 한참을 그러고 있었다. 혜란이 눈을 뜬 건 숙희의 인기척을 느꼈을 때였다.

“어, 왔어? 민지는?”

“밖에 나가서 기다리래.”

혜란과 숙희는 묵묵히 교문 밖으로 나갔다. 교문을 나가자마자 바로 첫 번째로 보이는 분식집이 있었다. 민지가 거길 정해 주었는지 숙희는 망설임 없이 그 분식집으로 들어갔다. 종업원도 없이 주인여자 혼자 김밥을 말고 있었다. 숙희가 한 사람 더 오면 음식을 시키겠다고 하자 주인여자는 그러라고 했다. 혜란이 정수기에서 물 두 잔을 따라 왔다. 숙희는 그 물을 단숨에 다 마셨다.

“술 아니야, 천천히 마셔.”

혜란이 농을 걸어 보아도 숙희의 긴장된 표정은 좀체 펴지지 않았다.

“민지는 어때 보였어?”“보고 말고 할 틈도 없었어. 내 얼굴 보자마자 여기 가 있으라 하곤 휙 들어가 버렸으니까.”

숙희는 약간 마음이 상한 듯했다.

“갑자기 찾아와서 민지도 당황했나 보지? 네가 이해해.”

그때 대발을 들추며 한 여학생이 가게 안으로 쑥 들어왔다. 큰 키에 한눈에 보아도 청순하고 예쁜 얼굴이었다. 혜란은 그 여학생이 민지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혜란이 기억하는 민지는 3년 전의 민지뿐이었던 것이다. 당시 초등학교 4학년이었던 민지는 키도 작았고 무엇보다 살집이 통통했다. 그런데 이렇게 변하다니! 그나마 조금 남아 있는 볼 살이 예전의 민지를 말해주고 있었다.

“아, 정말 몰라보게 자랐구나!”

혜란이 아는 척을 하자 민지는 인상을 찌푸리며 그대로 나가 버렸다. 숙희가 벌떡 일어나 뒤쫓아 나갔다. 혜란은 잠시 어리둥절했다. 민지가 숙희도 아닌 자기한테 화를 낸 건 너무 뜻밖이었다. 숙희 손에 잡혀 다시 들어온 민지는 아까보다 더 일그러진 얼굴로 앞자리에 털썩 앉았다. 혜란은 당황했고 숙희 역시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그런 두 사람을 민지는 팔짱을 낀 채 태연히 쳐다보고 있었다.

예전에 민지는 혜란을 잘 따랐다. 가끔 집에 놀러 가면 반갑게 맞아주었을 뿐만 아니라 숙희가 커피를 끓이거나 밥상을 차리는 동안 혜란 옆에 착 달라붙어 말동무도 돼 주었다. 나이답지 않게 생각이 깊고 차분한 민지를 혜란도 참 좋아했다. 그랬던 민지가 지금은 몸도 마음도 딴 사람이 된 것 같았다. 혜란은 숙희가 두려워했던 게 뭐였는지 이제야 실감이 났다.

주인여자가 일행이 다 왔느냐고 묻자 숙희는 구세주라도 만난 듯 메뉴판을 보며 이것저것 주문을 했다. 차례차례 음식이 나왔다. 숙희가 얼른 민지의 젓가락을 챙겨 주었으나 민지는 못 본 척 수저통에서 새 젓가락을 꺼냈다. 머쓱해진 숙희는 그걸 다시 혜란에게 건넸다. 그렇게 다들 젓가락을 손에 쥐었으나 누구도 음식에 손을 대는 사람은 없었다. 벽에 붙은 선풍기만 덜덜덜 소리를 내며 돌아갈 뿐 세 사람 사이는 계속 굳어 있었다.

그때 숙희의 핸드폰이 울렸다. 숙희는 두 번째 구세주라도 만난 듯 핸드폰을 손에 쥐고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숙희가 자리를 비우자 혜란은 더욱 거북해졌다. 민지도 자기처럼 불편해 할 것 같아 혜란은 슬쩍 민지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민지의 태도는 아까와 똑같았다. 숙희가 없으니 지금은 혜란 혼자 그 따가운 시선을 고스란히 받고 있다는 점만 달랐다. 섬뜩해진 혜란은 얼른 고개를 돌려 버렸다. 이윽고 민지가 입을 열었다.

“뭘 더 구경하려고 여기까지 따라온 거예요?”

비꼬는 말투였다.

“난 그저......, 네 엄마가 같이 가 달라고 해서......”

혜란은 말까지 더듬었다.

“그래요? 울고불고 할 줄 알았는데 안 그래서 실망했겠네요?”

“민지야, 너 무슨 말을 그렇게 하니?”

혜란이 나무라자 민지의 눈빛은 더욱 살기를 띠었다.

“그거 알아요? 아줌마가 바람 넣지 않았으면 우리 엄만 집 나가지 않았을 거예요.”

“뭐?”

상상도 못한 얘기였다. 혜란은 입만 반쯤 벌린 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날 아줌마 때문에 엄마가 곧장 집에 못 왔다는 거, 다 알아요.”

“그건 사실이지만 네 엄마가 그럴 수밖에 없었던 건......”

혜란은 오해를 풀어보려 하다가 그만 두었다. 지금은 그 어떤 말도 민지의 귀에 들어갈 것 같지 않았다. 답답한 마음에 혜란은 출입문만 멍하니 바라보았다. 숙희는 얼른 들어오지 않았다. 민지는 떡볶이를 먹기 시작했다. 혜란의 머릿속에는 민지를 만나면 하고 싶었던 말들이 어지럽게 맴돌았다. 지내는 건 어떤지, 아빠가 취직은 했는지, 학교생활이 힘들지는 않은지. 하지만 그저 민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민지는 떡볶이를 몇 개 집어먹은 다음 물을 마셨다. 그리고 냅킨으로 입을 훔치며 말했다.

“우리 엄마, 남자 있죠?”

혜란은 이번에는 입도 벙긋하지 못했다. 정작 민지는 태연했다. 혜란은 이것만은 분명하게 해명을 해줘야 할 것 같았다.

“네가 아빠한테 어떤 얘기를 들었는지 몰라도 엄마가 남자 때문에 집을 나간 건 절대 아니야. 그건 그 뒤의 일이야.”

혜란은 쩔쩔맸다.

“상관없어요.”

민지는 픽 웃었다.

“우리 아빠는 엄마랑 살 때부터 여자가 있었는데요, 뭘. 여기 이사 와서 그 아줌마 랑 그 아줌마 아이랑 같이 살기도 했어요. 몇 달 못 갔지만.”

모녀 아니랄까봐 아무 일 아닌 척 담담하게 말하는 것은 숙희랑 민지가 꼭 닮았다. 혜란은 그런 민지가 짠하고 안타까웠다.

“민지야, 네가 엄마를 좀 이해해 주면 안 되겠니? 너도 알잖아? 엄마가 그동안 얼마나 고생했고 또 네 아빠한테 시달려 왔는지를.”

“당연히 알죠. 엄마가 얼마나 고생하며 날 키웠는지 다 알아요.”

혜란은 뜻밖에도 순순히 인정하는 민지가 고마웠다. 그러나 민지의 말은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하지만 엄마가 날 버린 순간 모든 건 끝났어요.”

“그럴 수밖에 없었던 엄마의 입장을 좀 이해해 주면 안 될까?”

“이해한다고 뭐가 달라져요? 난 엄마든 아빠든 어느 한쪽에 붙어야 하잖아요. 그럼 결론은 당연히 아빠 아니에요? 아무리 무능력해도 아무리 빵점짜리 아빠였어도 적어도 아빤 날 버리지는 않았거든요.”

민지의 논리는 정확했다. 어디 하나 반박할 여지가 없었다. 혜란은 그런 민지를 보고 있기가 점점 괴로워졌다. 혜란은 숙희가 불행하게 사는 모습을 안 보여주는 것이 민지한테도 이로울 거라고 지금껏 믿어왔다. 그랬기에 숙희의 홀로서기를 적극 지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엄마가 퇴근해 오기만을 기다리던 민지가 아무런 예고 없이 감당해야 했을 상처와 분노까지는 충분히 계산하지 못했음을 인정해야 했다.

그때 숙희가 허둥지둥 들어왔다.

“미안해. 백화점에 급한 일이 생겨서 이것저것 좀 알려 주느라고.”

“이만 일어날게요. 점심시간 끝날 때가 다 돼서요.”

숙희가 자리에 앉는 것과 동시에 민지가 발딱 일어났다.

“조금만 더 있으면 안 되겠니? 5분만이라도......”

“앞으로는 오지 마세요. 엄마가 아빠 몰래 찾아 와도 만나지 말라고 했거든요. 아빠가 싫어하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아요.”

5분만 더 있자고 사정하는 숙희에게 민지는 찬물을 한 바가지 더 끼얹고는 휭 하니 나가 버렸다. 잠시 망연히 앉아 있던 숙희는 문득 생각난 듯 민지의 속옷이 들어있는 쇼핑백을 들고 후다닥 뛰어 나갔다. 다시 혜란 혼자 남았다. 주인여자가 흥미로운 눈초리로 지켜보고 있었다. 혜란은 음식 값을 치르고 밖으로 나왔다. 좀 전의 맑은 날씨는 간데없고 하늘에는 먹구름이 잔뜩 몰려와 있었다. 소나기라도 한바탕 퍼부을 기세였다. 혜란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3년 전 그날도 소나기 생각이 간절할 만큼 무더운 날씨였다. 혜란은 하루 종일 그 뙤약볕 아래를 헤매고 있었다. 그 전날 밤 상수와 크게 싸운 혜란은 날이 밝자마자 무작정 집을 나와 버린 것이었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밥을 사 먹고 나니 더는 할 일이 없었다. 거리를 어슬렁거리던 혜란은 숙희가 일하고 있는 마트로 갔다. 숙희가 퇴근하려면 몇 시간이나 더 남아 있었지만 혜란은 기다리기로 했다. 술이라도 마시지 않고선 집에 못 들어갈 것 같아서였다. 숙희는 일이 끝나도 시간은 낼 수 없다며 곤란해 했다. 하지만 혜란은 끈질기게 졸랐다. 이대로 화를 풀지 않고 그냥 들어가면 남편과 더 크게 싸워 무슨 일이 날지도 모른다는 협박까지 했다. 결국 숙희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마트 뒷골목에 있는 작은 호프집으로 찾아들었다. 이름 하나 촌스럽네. 둘은 킥킥대며 ‘소낙비’라고 적힌 출입문을 밀었다. 딱 한 잔씩만 마시기다. 숙희의 야무진 다짐에 혜란도 기꺼이 동의했다. 하지만 무더운 여름밤에 마시는 시원한 생맥주 한 잔의 위력을 그들은 모르고 있었다. 오백 한 잔씩을 가뿐하게 비운 두 사람은 입맛을 다셨다. 그럼 딱 한 잔만 더 할까? 둘은 눈빛으로 의견일치를 보았다. 두 번째 잔까지 비우고 나자 혜란은 본격적으로 남편 상수의 흉을 보기 시작했다. 혜란의 불만은, 연년생 두 아이 키우느라 하루 24시간이 모자란 것도, 쥐꼬리만 한 월급 갖고 빠듯한 살림 꾸려나가는 것도, 집에만 틀어박혀 있다가 끝내 바보가 되는 건 아닐까 하는 막연한 불안감도 아니었다. 혜란은 전업주부도 자부심을 갖고 당당하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쪽이었다. 문제는 가끔씩 상수가 툭툭 내뱉는 말들이었다. 하루 종일 뭐했어? 라든가 애가 왜 저 모양이야? 같은 말은 혜란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전날 싸움의 발단이 된 것도 결국 그 문제였다. 직장 다니는 숙희가 보기엔 혜란의 하소연이 배부른 투정쯤으로나 보였을 텐데도 숙희는 진지하게 얘기를 다 들어 주었다. 그러나 처음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시간이 지체되자 숙희는 슬슬 벽시계를 보기 시작했다.

“야, 더는 안 되겠다. 나머지 얘기는 다음에 듣자.”

“너도 제발 기 좀 펴고 살아. 만날 남편 눈치만 보지 말고.”

한참 얘기에 물이 오른 혜란이 실망하며 톡 쏘았다.

“우리 남편이 네 남편 같은 줄 아니?”

“그래, 오늘 네 남편 얘기나 좀 속 시원히 들어보자. 도대체 언제까지 그렇게 쥐여 살 거야? 돈도 제대로 안 벌어다 준다면서?”

혜란은 계속 물고 늘어졌다. 막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숙희는 멈칫했다.

“당당하게 전화해. 오늘 친구 만나서 좀 늦을 거라고.”

숙희의 심경에 미세한 변화가 생겼음을 포착한 혜란은 얼른 자신의 휴대폰을 내밀었다. 하지만 휴대폰을 받아들고도 숙희의 갈등은 계속되었다. 두 번이나 혜란의 독촉을 받고서야 숙희는 마지못해 전화를 걸었다. 민지아빠, 나예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사정하는 숙희의 태도는 비굴해 보일 지경이었다. 잠시 후 숙희의 얼굴이 돌처럼 굳어졌다. 왜, 안 된대? 혜란이 물었다. 안 된대. 휴대폰을 탁 덮으며 숙희가 말했다.

“이 쌍년, 당장 안 들어오면 죽여 버린다, 그러는데?”

숙희는 담담하게 남편이 한 말을 전했다. 혜란은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너무 자기 기분에만 취해서 숙희한테 무리한 요구를 했다는 걸 깨달은 것이었다.

“그럼 얼른 가자.”

혜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런데 이제는 숙희가 달라졌다.

“앉아. 나 안 들어갈 거야.”

그러더니 아줌마, 여기 하나 더요 하며 맥주잔을 높이 치켜드는 것이었다. 참을 만큼 참았어. 더는 안 돼. 숙희는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중얼거리더니 주인여자가 갖다 준 맥주를 단숨에 들이켰다. 그토록 결연한 표정의 숙희는 처음이었다. 혜란은 그런 숙희의 변화가 당황스러우면서도 내심 반가웠다.

그날 숙희는 그동안 숨겨왔던 많은 얘기들을 털어놓았다. 결혼하자마자 남편이 덜컥 직장을 그만둘 때까지만 해도 숙희는 남편을 믿었다. 하지만 그는 어떤 직장에서도 3개월을 버티지 못했다. 자존심이 세고 불같은 성격이라 어디에서도 적응을 못하는 거였다. 속았구나! 민지를 낳아놓고 퇴원은 해야겠는데 그 병원비조차 못 만들어오는 남편을 보며 숙희는 자신의 선택을 뼈저리게 후회했다.

그러나 비탄에 젖어있을 틈이 없었다. 당장 먹고 살아야 했다. 아이의 젖을 물리며 부업을 시작했다. 민지가 놀이방에 갈 때쯤에는 아예 취직을 해서 직장과 살림을 병행해야 하는 고달픈 나날이 이어졌다. 그렇게 생활을 온전히 숙희가 책임지는 동안 남편은 사업을 한답시고 본가나 처가에서 돈을 끌어다 번번이 말아먹는 일만 되풀이했다. 숙희는 민지를 낳은 후 남편 몰래 계속 피임을 했다. 언제고 끝낼 기회만 노리고 있는 숙희에게 새로운 임신은 또 다른 족쇄가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거짓말처럼 1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만년 백수라는 것 말고도 숙희의 남편에게는 치명적인 결함이 있었다. 그의 집요한 구애를 견디다 못해 결혼을 허락할 때 이미 의심해 봤어야 할 일이었지만, 그때는 그저 자신을 끔찍이 사랑해주는 남편이 고맙기만 했다. 하지만 그의 구속이 달콤했던 것은 신혼의 몇 달 뿐이었다. 점점 남편이 노골적으로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하면서 숙희는 숨이 막히기 시작했다. 우선 그는 숙희의 24시간을 모두 통제했다. 한 예로 마트에서 집까지는 10분 거리였는데, 숙희가 거기서 단 몇 분만 늦어져도 난리가 났다. 퇴근 후 장을 봤다고 하면 봉지를 뒤져 하나하나 시간계산을 할 정도였다. 그러니 그날처럼 무단으로 2시간이나 늦는다는 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왜 참고만 살았니? 진작 사생결단을 냈어야지.”

혜란은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씩씩거렸다.

“그러게 말이야, 나도 너 같은 성격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흥분하면 당장 주방에 있는 식칼부터 들고 와 설치는 인간인데, 그 상황에서 내가 뭘 할 수 있겠어?”

숙희는 힘없이 반문했다. 혜란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자정을 훌쩍 넘기고서야 두 사람은 호프집을 나왔다. 숙희는 혜란에게 하룻밤 재워 달라고 청했다. 숙희가 얘기하는 도중에 몇 번이고 이번에는 정말로 끝장낼 거라고 할 때마다 그래 까짓 거 끝내버려라 하고 맞장구를 치면서도 속으로는 설마 했던 혜란으로선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일단은 집에 들어가라고 권했다.

“이대로 집에 들어가라고? 차라리 지금 여기서 죽으라고 해.”

숙희는 가방을 품에 안고 털썩 쪼그려 앉았다. 가로등 불빛이 숙희를 가만히 감싸주었다. 혜란도 슬며시 숙희 옆에 앉았다. 혜란은 문득 이 장면이 한 편의 희극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춘기의 십대도 아닌 멀쩡한 두 여자가 밤거리에서 방황하고 있다니! 이윽고 숙희가 마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가 퇴근해 들어가면 그 인간은 늘 똑같은 자세로 텔레비전 앞에 널브러져 있어. 그 꼴을 볼 때마다 벗던 신발을 도로 신고 그대로 뛰쳐나가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야. 민지 봐서 내가 참아야지, 사람 취급 하지 말아야지, 집에 있는 가구쯤으로나 여겨야지 하고 나 스스로 최면을 걸지 않았으면 정말 단 한 순간도 견딜 수 없었을 거야. 손도 까딱하기 싫을 정도로 피곤하지만 그렇다고 그냥 쉴 수도 없어. 저녁을 지어 먹고 민지 숙제 봐 주고 밀린 집안일 하고 그러다 보면 밤 12시 넘기는 건 예사야. 하지만 내가 정말 참을 수 없는 건 그때부터야. 그때껏 죽은 듯이 텔레비전만 보던 인간이 내가 자리에 눕는다 싶으면 그제야 슬금슬금 다가오는 거야. 싫다고 했다가는 어디 남자 만들어 놓았느냐 이제 자기한테 정이 식었느냐 꼬치꼬치 따지며 밤새 사람 피를 말리니까 거절도 못해. 그 인간이야 세 끼 밥 먹고 힘쓰는 거라곤 그거 하나뿐이니 펄펄 날겠지만 젖은 솜 같은 내 몸이 배겨 내겠니? 전쟁 치르듯이 잠자리를 끝내고 그 인간 코 고는 소리를 들으며 멍하니 천장을 바라볼 때의 내 기분이 얼마나 비참한지 아니? 그냥 딱 죽어 버리고 싶은 심정이야. 그때마다 이를 악물었지. 내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감정을 절제하며 담담하게 얘기를 해 나가는 숙희는 마치 무대에 올라 독백하는 배우 같았다. 관객은 가로등과 혜란 뿐이었다. 숙희가 가장 심하게 마음의 갈등을 겪은 것은 바로 그때가 아니었을까. 인적이 끊긴 가로등 아래서 몇 시간 동안 집에 들어갈 것인가 말 것인가를 고민하던 바로 그때. 비록 혜란이 옆에 있었지만 냉엄한 현실 앞에서 숙희는 참으로 외로웠을 것이다. 결국 그날 밤 숙희는 혜란의 집에서 하룻밤을 잤다. 그리고 다음날 상수가 깨기 전에 혜란의 양말을 하나 얻어 신고 조용히 떠났다. 친정으로 내려갈 거라고 했지만 숙희는 친정에 가지 않았다. 그 길로 곧장 아는 언니를 찾아가 취직을 부탁했던 것이다.

백화점 여성의류 매장에서 일하고 있던 그 아는 언니 덕분에 숙희는 손쉽게 일자리를 구했다. 거처 문제도 착착 해결되었다. 처음 며칠은 찜질방을 전전했고 그 다음은 백화점 근처 고시원에서 지내다가 두세 달 월급을 모으자마자 월세 방을 얻었고 그 후 일 년 정도 숙희가 모은 돈에 친정의 도움을 합쳐 반 지하나마 전셋집으로 옮겼다. 그 방에 비로소 옷장과 침대를 들이던 날 숙희는 나직이 말했다. 아마 그날 아침 친정으로 그냥 내려갔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거야. 집 나온 이후 숙희가 보여 줬던 결단력과 추진력은, 지난 10년간 숨죽이고 망설이며 살아온 그 숙희가 맞나 싶을 만큼 놀랍고 치밀한 것이었다.

교문을 빠져나오는 숙희의 몸이 휘청거리고 있었다. 빈손인걸 보니 어쨌든 물건은 전한 모양이었다. 숙희는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는 듯 창백한 얼굴에 억지로 웃음을 지었다.

“비가 올 것 같아.”

혜란이 고갯짓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말했다. 숙희는 묵묵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툭 건드리면 금방이라도 눈물이 뚝뚝 떨어질 듯 속눈썹이 사르르 떨리고 있었다. 민지가 얼마나 더 독한 말을 했는지 궁금했지만 혜란은 그냥 큰길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학교를 한 번 돌아본 다음 숙희도 천천히 혜란을 따라 걸었다. 둘은 큰길에 나와 택시를 잡았다. 그들이 터미널에 막 닿았을 때 드디어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이거 참 갑자기 웬 소나기야?”

택시기사가 거스름돈을 내밀며 한 마디 했다. 툭툭 떨어지는 빗방울은 굵고도 셌다. 택시를 내린 곳에서 터미널 대합실까지는 짧은 거리였으나 혜란과 숙희의 얇은 여름옷은 순식간에 젖어 버렸다. 둘은 입구에 서서 손수건으로 대충 빗물을 훔쳐냈다. 갑작스레 내리는 소나기에 사람들은 당혹감과 짜증을 한껏 드러내며 허둥지둥 뛰고 있었다. 그들 중 우산을 미리 챙긴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일기예보를 매일 습관처럼 들어도 갑자기 내리는 소나기를 피하기는 쉽지 않은 것이다.

숙희를 자리에 앉혀 놓고 혜란은 창구로 가 표를 끊었다. 20분 정도 기다려야 되겠네. 시간을 확인하며 혜란은 숙희 옆에 앉았다. 숙희는 멍하니 바깥만 내다볼 뿐이었다. 학교에서부터 지금까지 숙희는 줄곧 침묵이었다. 혜란도 숙희를 따라 내리는 비만 망연히 바라보았다. 잠시 후 혜란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만약 말이지, 그날 내가 술 먹자고 조르지 않았으면 어떻게 돼 있을까? 네가 평소처럼 곧장 퇴근했다면?”

지금껏 아무런 반응도 없던 숙희가 그제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뜬금없이 무슨 소리냐는 얼굴이었다. 혜란은 하던 말을 계속했다.

“그랬다면 지난 10년도 살았으니까 새로운 10년도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지 않았을까? 민지 돌때까지만, 민지가 유치원에 갈 때까지만, 민지 입학할 때까지만 하면서 한 해 두 해 버텨 왔듯이 민지 스무 살 될 때까지만, 민지 시집갈 때까지만, 하면서. 더 못할 것도 없잖아? 그러다 보면 민지아빠도 변할지 모르고......”

“너 지금 영화 찍니? 사람이 그렇게 쉽게 바뀐다던? 10년 더 채우기도 전에 내 숨이 먼저 끊어질 거야.”

숙희는 더 듣지 못하고 말을 잘랐다. 그리곤 뭔가 이상하다는 듯 혜란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근데 너, 왜 새삼 그런 얘길 하는 거야? 내가 말했지? 네 탓이란 생각 하지 말라고. 난 민지를 낳던 순간부터 도망칠 결심을 했던 사람이야. 초기에 몇 번 실패한 후론 오랫동안 자포자기 상태로 살긴 했지만 그래도 마음 깊은 곳에선 늘 탈출을 꿈꾸고 있었어.”

거기까지 말하고 숙희는 혜란의 양손을 잡았다.

“난 오히려 너한테 감사해. 무기력한 내게 그런 계기를 주었으니까. 그러니 절대 그런 가책 갖지 마.”

숙희의 눈빛은 진심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혜란이 민지의 원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어쨌든 그건 혜란이 감수해야 할 몫이었다. 혜란은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

“아까는 웬 통화가 그렇게 길었어?”

그러자 숙희의 얼굴이 다시 어두워졌다.

“실은 전화는 금방 끊었는데 다시 들어갈 용기가 안 나더라. 교실 문 앞에서 민지를 처음 봤을 때 걔 눈빛이 어찌나 낯설고 싸늘하던지, 거기다 애들 보기 창피하니까 빨리 가라며 홱 등을 돌리는데, 나는 또 그게 왜 그렇게 서운한지.......”

“그랬구나.”

“다음에 또 내려올 자신이 생길지 모르겠어.”

“당연히 또 와야지 무슨 소리야? 민지는 네 딸이야. 포기하면 안 돼.”

말은 그렇게 했지만 혜란 역시 막막했다. 마치 큰 돌덩이를 삼킨 것 같은 기분이었다. 더구나 숙희 앞에 놓인 과제가 어디 민지뿐이던가. 혜란은 숙희의 손을 더 꼭 잡았다. 빗발은 조금씩 약해지고 있었다. 혜란은 문득 비 갠 후의 말간 하늘이 보고 싶어 조바심이 났다. (200자, 100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