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기골이 장대하고 힘이 장사였다 .
가마니에 들어있는 80kg짜리 쌀가마니를 누구의 도움도 없이 번쩍 들어서
머리에 이고오는 여장수 인지라 웬만한 청년들도 힘으로는 밀렸다 .
광산에서 갱도안을 받쳐주는 나무를 교체하고 나오는 폐목을 몰래 가져다가
사택 울타리를 고치기 위해 야밤에 미경이네집 하숙생 둘과 엄마와 내가 사람들의
눈을 피해 올라 갔었는데 낮에 이미 나무에다 철사로 단을 만들어 두었던 터라
지게에 올려서 지고 내려 오기만 하면 되었다 .
엄마가 최씨라는 아저씨 더러 " 야 한사람이 두단씩만 지고가 " 하자 이 아저씨들
엄마를 쳐다보며 " 두단이면 저게 얼만데 백킬로도 넘겠는데요 " 하더니 지게를 작대기로
받쳐 세워 놓곤 나뭇단을 잡고 들어 올리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
엄마가 그걸 쳐다 보다가 " 비켜라 " 하시더니 청년들도 못들고 헤메던 나뭇단을 혼자
번쩍 들어서 한사람에 두단씩을 올려주곤 " 내려가 " 하자 따라갔던 청년들이 놀란 얼굴로
마주 보더니 힘이 "장산줄은 알았지만 그정돈줄 몰랐니더 아이구야 장수 났니더 " 하며
놀라워 했고 나도 너무 놀라 입이 벌어졌다 .
분명히 장정이 들어도 꿈쩍 않던 나뭇단이 었는데 ,,,,,,,,,,야밤에 나무를 뒤곁에 갖다놓곤
남동 호랭이 아줌마가 이틑날 부턴 천하장사 아줌마로 소문이 났다 .
작고 허약했던 나정도야 한손에 잡혀도 질질 끌려 다녔지만 청년들도 까딱 잘못해서 잡혔다
하면 빠져나오질 못했다 . 미경이네집은 하숙을 하는지라 늘 많은 하숙생들이 드나들고 있었다 .
그들은 거의가 총각들 이었고 나는 처녀였다 . 7-8명에서 많게는 10여 명이 될때도 있었는데
그들중 짖궂은 이들은 내게 뭔가 말을 붙이기도 하고 더러는 엄마가 병반을 간 틈을타서 창문을
두드리며 짖궂은 장난을 걸기도 했었는데 어느 겨울날 11시가 다된 시각에 두어명이 술이 취한듯
골목 어귀에서 떠들더니 " 3호방 아가씨 쫌나와봐요 " 하며 우리집 창을 두들기고 있었다 .
들은척도 안했더니 연탄재를 들어서 담에대고 던져대더니 오줌을 깔겨대며 키득 거리고 있었다 .
화가나서 아침에 퇴근해온 엄마에게 일러 바쳤고 밥숟갈을 동댕이 치고 나가 벽을 검사하고
냄새를 맡던 엄마가 미경이네 집에 쳐들어가 양손으로 두남자들의 멱살을 질질끌고 오더니
사택 담벼락에 쳐박곤 애들만 셋이 있는데 누가와서 그러랬냐며 어디어디에 오줌을 쌌는지
대라며 따귀를 후려 치더니 확 짤라버릴테다고 으르렁 대자 팬티 바람에 끌려나온 이들이
무릎까지 꿇고 빌고 있었다 . 미경이 엄마가 뛰어 나오고 " 이사람들이 온지 얼마 안돼서
몰르고 그랬제 날봐서 한번만 봐 줘래이 " 하며 사정을 했다 .
그후론 내게 치근대는 사람이 싹 없어졌다 .
뒷집 옥이는 나와 동갑 이었는데 철도에 다니는 사람들이나 광산에 근무하는 청년들과 끊임없이
문제를 일으켰고 유산을 두번 했노라고 자기 입으로 얘기 하기도 했었다 .
딸이 입맞이 없어서 밥을 안먹으면 그아이 엄마가 " 저년이 또 아를 뱃나 밥을 왜 안쳐먹어 "하고
야단을 하곤했었다 . 그아이와 앞뒷집 인지라 어쩌다 어울리면 엄마는 질색을 하고 같이 놀지
말라고 난리를 치면 " 아이고 나는 엄마한테 걸리면 맞아 죽을까봐 어떤 놈이 말도 안붙여요
저 위로 한참 올라가서 몰르는 동네로 가믄 몰를까 " 하면 엄마는 어께를 쓰윽 치켜 올리며 웃었다 .
광업소 에선 한달에 백장씩 연탄표를 발행해 주었고 연탄을 실은 차가 오면 그표로 연탄을 배급
받았는데 골목입구에다 연탄을 내려 주면 집에까지 나르는건 개인의 몫이었다 .
한달에 한번 쌀도 배급을 받았는데 줄을서서 배급표를 끊고나면 자루를 들고 서서 배급표에
써진 만큼 담아서 집으로 가져 와야 했는데 엄마가 없이 혼자서는 도저히 못갖고 왔다 .
배달료로 오백원을 주던가 쌀로 퍼 주던가 했었는데 쌀표나 연탄표도 돈을 주고 사고 팔기도 했었다 .
철뚝너머에 사는 사람들중엔 밤에 몰래 탄광에 숨어 들어가 개탄을 훔쳐다가 부수어서 물과함께
반죽해 연탄틀에 퍼넣고 함마로 내리쳐서 연탄을 찍어서 팔아 생계를 유지하며 광산에 취업을
안하고 그때그때 조금씩 벌어서 쓰며 계획성없이 사는 사람들도 더러있었다 .
광산에 근무하는 사람들에게 발행해 주는 인감이란것이 있었는데 사진이 붙어있고 직번이라해서
사원번호와 주민등록번호 같은것이 적혀있었고 도장이 달려 있었다 . 식육점이든 신발가게든
옷가게든 어딜가도 인감만 내밀면 외상을 다 주었고 회사와 거래하는 상회에선 월급에서
아예 공제하는 곳도 많았다 . 현금이 없어도 얼마든지 외상이 통했고 외상이라면 소도 잡아먹는
다는 말도 있듯이 언제라도 소비의 길이 열려 있었으니 광산에선 항상 흥청 망청한 호경기 였다 .
인감만 들고 가면 시골에선 선도 골라서 본다는 얘기가 돌 정도였다 .
돈이 귀하던 시절 시골오지에 살면서 일년내내 돈구경 한번 못해보던 시골 처녀들이 시집와서
돈구경을 하고 아이가 어느정도 커서 학교에 들어가고 나면 더러는 춤바람이 나기도 하고
더러는 계획성없는 소비로 인해 빛잔치를 합네 하고 문제를 일으키 기도 했지만 그것은 몇 % 의
부정적인 단면일 뿐이었는데 일부를 거의 전부로 착각들을 해서 내가 태백이라고 얘길 하면 아 !
그 탄광촌 ,,,,하며 전국 팔도에서 모여든 인생 막장들의 종착역 이라던가 또는 무질서와 무법이
판을치는 곳이라는 막연한 선입견으로 묘한 비웃음을 흘릴때면 정말이지 싫었다 .
굴뚝산업의 연료로서 서민들의 에너지원 으로서 막중한 한축을 담당 했었고 나라의 경제 발전에
기여 했었고 전국팔도 사천만 국민들 모두가 석탄의 도움으로 생존을 했다해도 과언은 아닐것인데
모두들 하나같이 고향이 태백아라고 하면 아~`예 하며 대놓고 무시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