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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생의 뇌진탕 책임은 누구에게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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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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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해


BY 황영선 2007-03-09

 어느 정도 태풍피해에 대한 가닥이 잡힌 며칠 후 동욱이 술이 기분 좋게 취해서 밤 9시쯤 돌아와 지나가는 말처럼 주영을 보며 물었다.

 아픈지 얼마나 됐다고, 주영은 "이 일로 너랑 나랑 밥 먹고 사는거야."라는 동욱의 말을 듣기 싫었지만 잊을만하면 잔소리를 했다

 

 "세탁기는 괜찮아?"
 동욱이 뜬금없이 물었다.

 

 비가 세기 시작할 때쯤 제작해 준다는 나무판이 감감 무소식이었다.

 주영도 다른 일 때문에 잊고 있었다. 비가 셀때마다 물을 대야에 퍼 담기는 했는데 세탁기가 있는 쪽 베란다에는 배수구가 있어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내가 내일은 꼭 만들어 줄게. 그리고 앞 베란다 수리 하는 사람들 오잖아. 주영이 니가 마실 거라고 주라고. 실은 나도 실리콘 쏴 본 적 없어. 내벽에다 말고, 외벽에다 쏘아야 될걸. 저런 일 하는 사람들은 그일도 잘 할 거야. 안방 앞 유리창 끼운 후엔 어쨌던 실리콘 작업해야 할 거야. 조금만 신경 써 달라고 해. 그때 같이 쏴 달라고 부탁하면 되겠다. 돈 달라면 주고, 잊지 말고 꼭 부탁해. 너 그런 부탁 잘 하잖아. 참 그리고 오늘 아침  머리 감을 때  온수가 나왔다  안 나왔다 하던데 서비스 불렀니?"

 "벌써 보일러 기사 두 번이나 불렀어. 그 기사분 말이 아무래도 보일러 교체해야 할 것 같다던데 어떡하지?"

 

 주영은 막막한 심정이 된다.

 잊고 있었는데 동욱이 그 일까지 상기시켰던 것이다.

 

 "아직 견딜 만하니까 차차 생각해 보자. 나도 이제 내 몸 돌봐가며 살아야지. 내년엔 점심시간에 골프라도  배워야 할까봐. 잘 될지 모르겠지만. 참! 주영아. 기다려봐. 우리 오랜만에 회포나 나누자. 이리와봐."

 동욱이 능글거리며 다가왔다.

 약간 난폭하게 주영을 끌어 안았다.

 동욱의 몸에서   나는 쉰내가  주영의   코를 찔렀다. 선선해졌는데도 여전히 동욱의 작업복과 몸에서는 우리에 갇혀 구경거리가 된지 오래인 놀이 공원의 동물에게 날 법한 냄새가 난다. 도무지 도무지 맡기 싫은 냄새다.

 

 "기다려."

 

 동욱이 실실 웃으며 욕실로 들어간다. 저런 동욱은 주영이  항상 봐 오던 그의 모습니다.

 욕실  문 밖까지 물소리와  노래 소리가 들려왔다.

  주영은 단산한 동욱의 그 점이 언제나 부럽다. 도데체 고민이 있기는 하는지 그 깊은 속을 주영은 알 수가 없다.

 

 주영은 민철이 죽기 얼마 전 그녀에게 주었던 손때가  묻은 아주 오래되고 낡은 책을 읽고 있었다.

 

 피에르가 떠났다. 예르행 기차가 서 있는 역의 플랬폼에서 그는 나를 끌어 안았다. 나는 눈물에 잠긴 채 그의  생명이 되었다.

 <엄지 공주, 나의 꽃 나의 아가씨, 울지마, 나는 다시 돌아올 거야.>

                                                 이네스 캬냐티"널 섬으로 데려갈 거야." 중에서

 

 그 책을 보고 있던 주영의 머리 속에 동욱을 처음 만난 날이 떠오른다.

 동욱의 바짝 자른 머리카락과 눈 때문에 주영은 멀리서 걸어오는 그들이 고 3ㄸ대 어깨동무까지 하고 다니던 윤수와 민철인 줄 알았다.

 심장이 멎는 줄 알았던 몇 분이 지나가자 주영은 하얗고 고른 치열의 동욱이 민철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윤수는 민철을 너무나 잘 알고 있던 그의 친구였다. 내성적이고 자기 주장 한 번 내 세우지 않던 그저 순하기만 하던 민철은 주영이 바라는 일이라면 무슨 일이든 들어 주던 착한 남자였다.

 주영은 한 번도 민철이 그의 형이나 여동생에게 화를 내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웃으면 양 볼 깊숙이 파이는 보조개가 생기고, 수줍음이 많아 가끔씩 얼굴이 살짝 붉어지던 민철이었다.

 

 <내 엄지 공주, 나의 아가씨, 울지마. 난 곧 돌아올거야. 난 널 필라오의 노랫소리가 들리는 저 멀리 푸른 섬의 푸른 모래 위로 데리고 갈거야.>

 <나의 아가씨 내 외로운 작은 새, 울지마.   난 다시 돌아올 거야.>
 <나는 두렵지 않아 내 사랑 우리는 아이를 가질 거야. 아이는 삶의 추억이야.>

 그렇지만 아이는 업을 것이다.    이네스 캬냐티"널 섬으로 데려 갈거야" 중에서

<22편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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