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병때문에 돌아 가셨다고 했었니? 요즘 현대의학이 못 고칠 병이었어?"
괜한 질문을 하는 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주영이 물었다.
"그래. 지병 때문이었고, 조금씩 병이 아버질 죽였을 테니까. 놀랄 일은 아니었어. 마음에 준비는 하고 있었지. 그래서 더 담담해. 죽음이란 게 그런 건가봐 늘 준비하고 있으면 산 사람의 마음이 가벼워 지는 것, 또 니가 듣기에는 어떨지 모르지만 주여아! 나 아버지에 대한 애정이 별로 깊지 않았어. 딴 친구들에 비해 아버지와 나이 차가 너무 많았었지."
말을 많이 한 지현이 입이 타는지 조금씩 자주 물 컵의 물을 비웠다. 나중에는 아예 주영의 물컵을 자기 쪽으로 가져가 죽 들이켰다.
"왜 이러니? 지현아. 너 답지 않게. 침착해. 말하고 싶은 일이 있는거니?"
주영은 불안해 보이는 지현이 걱정스러웠다.
"지금 내가 그래 보이니? 주여아. 실은 내가 말 안 한 게 있어 너한테."
미안한 것처럼도 보였고, 말 할 수 없었다는 것처럼도 보였고, 지금은 말하고 싶다는 지현의 심정을 말 할 것처럼도 보였다.
주영은 기다렸다.
동욱과의 저녁 약속을 취소한 금요일이었다.
보나마나 저녁을 먹은 후 동욱은 주영에게 모텔로 가자고 했을 것이다. 동욱은 입맛 다시는 소리를 내며 뭔가 아쉬운지 지현을 다른 날 만나라고 말했다.
그런 말들이 동욱의 욕망인 줄 알기 때문에 그날 꼭 지현을 만나고 싶은 주영이었다.
결혼 전 몸을 섞은 후의 동욱은 주영에게 한 마리 맹수 같아 싫을 때가 많았다. 그 대문에 동욱과의 약속을 아예 취소해 버리고 지현을 만나러 나왔던 것이다.
그날 오전 11시쯤에 사무실에서 주영은 업무 인계 중이었다.
그 일은 싫은 한편 지겨웠다.
어찌 보면 모든 것에 익숙해 있는 회사에서 떠나는 것이 싫었고, 반복적이던 그 일을 동료인 김신재씨에게 다시 말하는 것도 지겨웠다.
그런 기분으로 일을 하고 있을 때 지현이 "바쁘니?"라는 문자 메시지를 보내왔다.
핑계거리가 생긴 것이다.
주영은 잠깐 쉬는 시간에 휴게실로 나와 지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현은 오랫동안 같이 한 쌍둥이 자매 같은 친구였다. 주영은 적어도 그렇게 믿고 있었다.
"말하기 싫음 안 해도 상관없어 지현아, 너 그런 얼굴 보기 힘들어."
주영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지현을 건너다 보았다.
주문한 음식이 나오려면 기다려야 했다. 이 한정식 집은 조용한 대힌 20분쯤 뒤에나 음식이 나왔다.
뭔가 말을 하고 싶은 지현의 목소리가 전화 저 쪽에서 전달되어 주영에게로 왔던 약속이었다. 이 곳에서 지현의 요구에 의해 몇 번 밥을 먹었기 때문에 주영은 뭔가 중요한 말을 할 것 같아 혼자 상상을 했었다.
상사와의 불륜? 외국 연수? 동료의 뺨을 때릴 정도로 또 싸웠나? 그것도 아니면 아픈 건가? 아니면 뭐지?
주영의 상상력이란 게 고작 그 정도였다.
동욱이나 지현은 전화 목소리만으로도 주영에게 그들의 마음을 알아차릴 수 있게 하는 사람에 속했다.
그러나 그날은 그 모든 주영의 상상이 여지없이 빗나갔다.
너 답지 않다는 주영의 그 말에 지현은 고개를 들어 주영의 얼굴을 보았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안색을 살피고, 들어 줄 준비가 되어 보이면 언제나 자신의 비밀 한가지쯤은 쉽게 말한다. 그리고 이전보다 휠씬 가벼워진 삶의 무게를 같이 나누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누면 반이 된다는 사회적으로 유명한 CF가 나왔을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 봐도 주영은 저현이 그날 이전에는 자신에게 그녀의 짐을 나누어 주었던 기억이 한 번도 없었다. 그 반대의 경우는 딱 한 번 있었지만.
그런데 그날의 지현은 달랐다. 얼굴표정도 달랐고, 마음을 전해 오는 방식도 달랐다.
말 한 사람은 가벼워지지만 그 짐을 나눠 가진 사람의 가슴, 주영의 가슴이 조금쯤 무거워 지는 그런 말을 지현이 하기 시작했다.
" 아니 그냥 말할게. 주영아. 지금 우리 집 시끄러워. 아버지 재산이 있었나봐. 큰 오빠가 장례 마치고와서 그러대. 사실은 딸이 있다는 건 알았지. 아버지는 오랫동안 부동산 일을 하셨어. 재산이 얼만지는 관심이 없었으니까. 큰 오빠가 별 분쟁을 일으키고 싶지 않다며 공평하게 나누라는 아버지의 유언장에 따르겠다고 했어. 법에 근거해 결혼 한 딸과 오빠 자신들과 나와 여동생, 어머니 몫, 이렇게 곷령하게. 그런데 언니가 나서기 시작했어. 갑자기, 왜 내 몫은 이거뿐이냐고 그랬지. 큰 오빠는 공평한 거니까 누님이 불만가질 거 있냐고, 언니가 막 화를 냈어. 니네 모두 한 통속이라며, 나야말로 이 집의 피해자라고 그랬어. 실은 우리 언니 우리 엄마가 시집 오기 전에 아버지가 언니의 엄마한테 낳았던 자식이었어. 아버지가 야망을 품고 언니 어머닐 버렸었나봐. 그 언니는 말이야 주영아. 우리 엄마가 아무리 정성을 다한다고 해도 모자랐던지, 엄마가 낳은 우리들과 겉돌았자. 자신은 비극의 주인공이라고 생각하며 자랐었나봐. 실은 언니처럼 엄마나 나 역시 언니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런 언니를 보는 게 기분 좋지는않았는데 말이야. 엄마는 한 번도 당신 자식이 아니라고 생각하지 않고 언니 대학 보낼 때 우리 집 형편이 별로였지만 대학까지 보내 주셨다고 했어. 또 결혼시킬 때 언니 몫으로 충분히 지참금을 챙겨 주셨다고 했고, 그런데 그렇게 말을 했어 언니가. 왜 내 몫이 이렇게 작은 거냐고......"
지현은 10분 쯤 더 말을 이었다.
반찬과 된장찌개가 상위에 오를 때까지 지현의 말은 계속 되었고, 된장찌개가 먹기 좋게 식을 때쯤 속이 후련하다는 듯 밥과 반찬을 골고루 집어 가며 먹기 시작했다.
지현이 주영을 믿고 자신의 심정을 솔직하게 고백해 준 일은 고마웠으나 그런 지현의 말은 이제까지 봐 오던 지현과는 너무나 달라서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갑자기 지현의 무거원 마음이 고스란히 주영에게 옮겨 온 것 같아 바위가 한 덩이 주영의 가슴을 누르는 기분이었다.
그때부터라고 생각했다.
주영은 지현에게서 조금씩 멀어지는 자신을 느꼈다.
주영은 몇 명의 친구와 그렇게 멀어졌으며, 친구들과 멀어지기 시작할 때는 그런 일들이 일어났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그날은 지현과의 사이에 10원 동전 하나 거래가 없었는데 마치 그 일이 다른 친구들과 돈거래 직후의 기분이 된 건지 주영은 납득이 가지 않았다.
친구가 돈을 빌려 달라고 했는데, 돈이 없어서든 돈 거래를 하기 싫어서든 빌려 주지 않고 난 후의 느낌 말이다.
지현과의 그 날 일이 주영에게는 왜 그런 느낌이었는지 몇 년이 지난 후까지 계속 의문으로 남았다.
주영은 한 마디로 착잡했다.
주영은 그날 지현의 그 말에 고개를 흔들었다.
진해를 떠올리면 지현이 생각났고, 지현을 떠 올리면 진해 생각이 나게 될 일들이 주영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다 해도 그런 지현이 주영에게 전부가 아니었듯 진해 또한 고개만 흔들게 하지는 않았다.
도혜옥이 그랬고, 이사 한 그 다음해 제황산 공원에서 내려다 본 벚꽃이 핀 시내의 눈부신 정경이 그랬고, 발목 통증 때문에 주영이 만났던 맹인 침술사의 부드러운 손길이 그랬고, 수영장에서 만났던 해진이 그랬고, 수영용품을 팔던 샵의 재경언니까지.
그 도시는 주영이 신혼여행지인 하와이에서 맡았던 달콤한 과일 향기 같은 그런 냄새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차츰차츰 알려 왔던 것이다.
그해 3월 셋째 주 금요일에 주영과 동욱은 포장이사 직원들의 도움으로 얼마 되지 않은 짐을 꾸려, 4월 초가 되어 맑은 날이 계속되면 해마다 벚꽃이 눈처럼 피고 지는 그 도시 진해로 이사했다. <5편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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