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졸업 후 주영은 운이 좋게도 곧바로 취직했던 의류회사에서 6년 차로 접어들 무렵 동욱을 만났다.
회사에 취직한 처음 1,2년은 그 일에 적응하려 바빴고, 주영자신이 디스플레이 한 마네킹을 보는 작은 일에도 가슴이 뿌듯했다. 그러나 5년이 지나는 동안 같은 일을 반복하자 문득 문득 일에 지쳐 가는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일이 잦았다.
그 무렵 고 3때 같은 반 친구 윤수가 대학 선배라며 주영에게 소개한 사람이 동욱이었다. 주영이 동욱과 결혼하기까지 딱 1년이 걸렸고, 결혼식 한 달 전에 사표를 낼 때만 해도 친구 지현에게 자신이 쉬고 싶어 결혼한다고 자신 있게 말했다.
지현이 "사표를 꼭 내야겠니? 너 집, 동욱씨 집과 가까운 데 얻었다며? 신경 쓰일텐데." 걱정스럽게 물었을 때만해도 주영은 동욱의 가족에 대해 자신의 고민이 이렇게 까지 깊어 질 줄은 몰랐다.
결혼 전에 주영은 세상이 타인들과 섞이기 위해 돌아간다고 생각했다.
유치원, 초, 중, 대학교, 아르바이트, 직장생활 6년 동안 크고 작은 여러 사회에서의 생활은 그녀가 미술공부를 할 때 섞었던 빨간색과 파란색이 그랬던 것처럼 보라색이 되는 제 색깔을 잃어 가는 과정을 수 없이 경험한다고 생각했다.
결혼도 섞임의 연장선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다른 섞임과는 다르게 주영은 동욱의 가족들과 섞이기 힘들어 보라색이 되기 전의 빨간색 그대로였다. 주영은 자신이 동욱의 가족과 부적응 상태라고 지현에게 말했다.
지헌은 그 문제에서만 그녀가 주장해 오던 자신의 입장과 약간 상반된 의견을 제시했다. 평소 때의 지현이었다면 "주영아 좀 참으면 안 될까?" 라고 했어야 하는데 지현은 " 좀 멀어질 필요가 있겠다. 동욱씨한테 서울에서 아예 먼 곳으로 가자고 그래.현장 근무해야 된다며? 내가 자주 전화하고, 메시지도 보내고, 메일도 열심히 보낼게. 오래 있겠니? 다시 본사 근처로 올 수 있다며?" 그런 조언을 했다.
그렇지 않아도 근무할 몇 군데 토목공사 현장에 대해 상감 중이라고 동욱이 몇 달 전부터 말하고 있던 중이었다.
주영은 남쪽으로 가고 싶다고 은근히 비쳤다.
2월의 어느 날 퇴근 한 동욱이 식탁유리 아래의 지도 한 부분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주영아, 이 곳이 우리가 가야할 곳이야."
결혼하기 전부터 동욱은 자신의 일이 본사 근무가 다가 아니라고 했었다.
지금 주영에게는 그 고장이 아니라도, 서울만 아니면 어디든 달아나고 싶었다. 그렇게 달아 난 주영은 자신이 살던 곳으로 돌아오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주영은 그해 3월에 진해로 떠나는 그 일이 서울에서, 동욱의 집에서, 심지어 지현에게서 떠나는 일이 될 줄은 미쳐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서울에 돌아오기까지 그리고 지현의 얼굴을 다시 보게 되기까지 그토록 오랜 시간이 필요할 줄 모르고 주영은 철없는 아이모양 마음까지 설렜다.
주영과 동욱의 떠돌이 생활은 그 고장 진해에서 시작된 셈이다.
"정말이야? 결정됐어?"
철없는 주영이 물었다.
" 응, 회사에서 구성된 팀이 내려 간지 몇 개월이 지났다니까, 내가 속한 토목 쪽과 추가로 자재, 행정쪽만 몇 사람 더 내려 가면 돼. 본사의 행정적인 업무 때문에 그 동안 자꾸 연기돼서 그렇지 3월이면 늦은 거야. 내가 말했잖아. 지난번에."
동욱은 자신의 회사가 부산 진해 신 항만 공사에 다른 여러 회사들과 공동으로 입찰에 성공했다고 말했다. 아직 시작단계인 기초 부분이 동욱의 팀이 할 일이라고 말하면서 앞으로 이런 식으로 여러 고장을 다니게 될 것 같다는 말을 했다. 그래도 주영이 알아들을 것 같지 않았던지 그야말로 간단하게 설명 했다.
"진해로 내려가면 현장 근무야. 너랑 같이 아침마다 샌드위치 먹을 시간도 없고, 저녁에 집에서 밥 먹을 시간도 없을 거야."
샌드위치로 말하자면 지난 결혼생활 동안 주영과 동욱의 아침밥이었다. 단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식탁에 앉아 샌드위치를 먹는 주영을 보며
"야 너 대단하다. 출근도 안 하면서 나중에 먹지? 눈곱도 안 떼고 그렇게 잘 먹을 수 있냐? "라며 경이로운 시선을 보내던 동욱이었다.
주영의 어머니와 지현이라면 아침을 꼬박꼬박 챙겨 먹는 주영을 이상한 눈초리로 쳐다보지 않았을 것이다.
아침밥을 챙겨 먹고 집 밖으로 나갈 때 얼굴에 눈으로 구분하기 힘든 뽀루지가 난 주영이 화장을 하는 일은 주영의 습관이었다.
대학 4년과 직장을 다닌 6년 동안 주영의 어머니는 귀찮을 만도 했는데 새벽같이 일어나 주영에게 아침밥을 먹게 했다. 대학에 들어가면서 생전처음으로 한 시간씩 버스와 전철을 이용해 통학하게 된 주영은 입안이 깔깔해 아침에 눈을 뜨면 밥이 잘 넘어가지 않았다. 그런 주영에게 어머니는 "한숟가락만, 한숟가락만." 그런 말로 말내딸을 배 속을 채웠다.
그 세월이 10년이었다.
그 이야기를 동욱한테 해 주면 동욱은
"정말 어머님 대단하신데?" 하고 말했다.
그럴 때의 동욱은 그녀의 어머니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주영은 느꼈다. 주영과 동욱이 다르듯 두 사람의 어머니 역시 하늘과 땅만큼 다른 분이었으니.
"왜? 몇 시에 출근인데?"
주영이 물었다.
"내려가야 알겠지만, 선배들이 그러는데 작업인부들이랑 비슷하게 출근해야 된대. 아마 7시 전까지는 출근해야 될 걸. 아침은 대부분 밖에서 먹을 것 같아. 퇴근시간도 일정치 않고."
주영은 그 고장으로 이사 한 다음에야 거친 남자들의 세계는 책으로만 읽혀지는 낯선 일이란 걸 동욱을 보며 알게 되었다.
때론 신랑이지만 의류일과 토목일은 너무 달랐고, 주영은 여자였고, 동욱은 남자여서 동욱의 직업적 특성을 주영으로서는 잘 이해하지 못했다.
특히 이해가 가지 않던 일은 술자리였다.
현장근무를 시작한 그날부터 본사에서 못 보던 동욱의 술자리였다. 잦은 술자리의 횟수만큼 동욱이 변해갔다. 동욱의 욕설로 변해가는 말투를, 때론 도심의 지하철 역 같은 곳에서 보던 노숙자 같은 동욱을, 주영이 참는 법을 터득하는데 1년 이상 걸렸다. 술이 취해 욕을 해대는 동욱을 어린애 다르듯이 매번 사탕을 주어 달랠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그런 그를 잠들게 하기까지 주영은 번번이 애를 먹었다.
기분 나쁠 정도로 만취해 돌아온 날이면 동욱은 노래를 불렀고, 벽을 발길질 해댔고, 고요한 새벽에 소리를 질러댔기에 그 세가지를 동시에 해 대는 그를 주영으로서는 도저히 감당하기가 벅찼다.
주영은 동욱이 밉고 옆 집 사람 보기 부끄러워 화장실 문을 잠그고 엉엉 울어 버린 날이 많았다.
술만 아니라면, 동욱 자신이 말하는 동욱은 이성적인 면이 강해서 어떤 말이든 잘 받아들이는 사람이었다. 누구든 남자면 동욱 정도의 술 버릇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주영에게 그 일은 겪은 적이 없는 낯선 일이었다.
주영은 그녀의 아버지가 흐트러지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큰 소리치는 일은 주영의 아버지에게는 다른 사람 몫이었다.
30년의 공직생활에서 정년을 채우고 주영의 아버지는 퇴직했다. 연금생활자인 주영의 아버지는 풍족하지는 않았지만, 가계부를 항상 옆에 두고 그녀의 어머니와 함께 꼼꼼하게 생활했기 때문에 주영은 남자라면 모두 아버지 같은 줄 알았다.
이미 결혼 하여 연년생으로 중학생 남자 애 둘을 키우고 있는 큰 언니나, 형부 일로 미국에 가 있는 작은 언니와 어머니 틈에서, 가족 중 유일하게 남자인 아버지에게조차 주영은 남자의 생리를 배울 기회가 전혀 없었다.
그러니 주영은 동욱의 그런 모습에 깜짝깜짝 놀랐고, 그런 성격을 맞추기 위해 자신도 사나워 가고 있는 것 같아 놀랄 때가 많았다. 어쩌면 그 때 주영은 동욱의 거친 세계를 따라 조금씩 변해 갔을 것이다.
동욱의 욕설 한 두가지는 주영도 배웠다.
섹스를 요구해 오지 않는 동욱이 이상하듯 나중에는 욕을 입에 담지 않고 말하는 동욱이 이상하게 여겨질 정도가 되었다.
말 버릇 때문에 잦은 다툼이 있었으나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 다툼이었다.
동욱은 " 그 일로 너랑 나랑 먹고 사는거야."라며 주영의 입막음을 했다. 동욱은 너도 하루에 한 백번쯤 현장의 작업 인부들과 싸워 보면 욕이 저절로 나온다고 말했다.
동욱의 그런 변화된 행동들은 그 도시 진해로 이사 한 후에 나타났다.<2편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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