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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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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어느 날, 피리부는 사나이에게 전화가 왔다


BY soulmate 앨리스 2006-09-07

 

요란한 전화벨 소리가 메마른 방벽에 부딪쳐 메아리가 되어 희성의 귓 속을 파고든다.

아침 8시 20분. 희성에겐 혼자만의 자유시간을 가질 마지막 날 아침이 그렇게 금이 가고 있었다. 오늘 저녁에는 5일간의 출장을 마치고 남편이 돌아오는 날이다. 이제 다시 조신한 아내역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신경질적인 태도로 전화기를 집어들고 나만의 휴가를 망쳐버린 눈치없는 사람이 누구인지 묻는다.

"여보세요?!"

수화기 너머에선 모든 일상적인 흐름이 멈추어 버린 듯 고요와 정적의 묵음이 흐른다. 세세한 먼지의 부딪히는 소리마저 얼어버린 것 같은 수화기 너머의 침묵은 알 수 없는 두려움마저 불러온다.

희성은 이상한 기운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아직 잠에 취해 반쯤 감겨있던 눈을 번쩍 뜨고 다시 한 번 수화기 너머 상대방에게 말을 걸어본다.

"여보...세..요..?!"

 

"당신은 행복하십니까?"

 

                   *          *            * 

희성에게 불가사의한, 현실에서는 납득할 수 없는 기이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은 그 때부터 였을 것이다. 어느 나른한 봄날의 아침, 피리부는 사나이에게 그 전화가 오고부터.

 

                   *          *            *

 늘 판에 박힌 듯 매일이 똑같이 흘러가는 하루 하루. 아침에 눈을  뜨면 간단히 세안을 하고 회사에 출근하는 남편을 위해 아침식사를 준비한다. 남편이 씻고 옷을 갈아 입는 동안 넥타이와 양복을 준비하고 구두를 꺼내어 놓는다. 식사가 끝나면 회사에 출근하는 남편을 배웅하고 집안일이 시작된다.

 

가장 먼저 세탁기에 빨래를 돌리고 세탁기가 돌아가는 동안 집안 청소를 한다. 정원의 작은 화단에 물도 주어야 하고, 하루 먹을 찬거리를 장만하러 장을 보러 가야 한다. 점심은 장을 보러 간 시장에서 간단히 분식으로 떼운다. 집으로 돌아와 저녁식사 준비를 하고  잡다한 소일거리를 정리하고 나면 어느새 하루가 저물어 있다.

가끔 tv 연속극에서 부부싸움을 할때면 늘 이런 말이 오고간다.

남편은 말하길, 당신이 집에서 도대체 하는 일이 뭐야?! 내가 밖에서 돈 벌어오는 장난처럼 보여! 나도 무지 힘들다고. 또는 여자가 집에서 살림만 하면 됐지, 라고.

희성은 물론 대한민국 남자들의 고충을 십분 이해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직장상사 비위 맞추고, 밑에서 치고 올라오는 새파란 신입에게 밀리지 않으려 바둥바둥 거리고, 너무 힘들어 하루쯤은 아무 생각 않고 한가로이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고 싶을 일요일조차 가족을 위해 희생하고 만다.

하지만, 여자라고 집에서 편안히 쉬고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해도 해도 끝이 없고, 실컷 해보았자 티도 안나는 것이 집안일이다. 그러나 하루라도 거르면 금새 표가 나서 하루쯤 마음 편히 쉬고 싶어도 쉴 수가 없다.

남편은 힘든 노동의 댓가로 그간의 급여를 받지만, 아내는 하루종일 가사일에 매달려 보았자 그에 대한 정당한 댓가가 없다.

얼마전까지만 하여도 아내들의 이런 가사노동도 돈으로 환산하여 급여를 주어야 한다는 말이 나왔지만, 희성에겐 그건 받으나 마나 한 돈이였다. 돈으로 환산하면 어마 어마한 액수의 금액이지만, 그 금액은 누가 지불할 것인가. 정부에서 가사일에 종일 매달리는 가엾은 대한민국 아내들을 위해 보조금 명목으로 줄 것이라는 생각은 물론 터무니 없는 실현 불가능한 가설이다.  

그렇다고 어느 돈 많은 재벌이 나서서 가사일 하느라 힘들었을 것이라며 돈 한뭉치 씩을 쥐어 줄 일은 더 더욱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해답은 한가지. 결국 그 돈은 남편의 주머니 속에서 나와야만 한다는 것이다. 아내들에게 급여를 주어야만 하는 것은 불쌍한 가장역을 맡고 있는 남편들이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것은 결국 내돈을 나에게 주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주머니 돈이 쌈지돈이란 말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남편이 한달간 일해서 번 돈으로 아내에게 급여를 주자면 그나마 겨우 겨우 돌아가던 한 가정의 가계생활이 엉망이 되어 버린다.

남편이 아닌 누군가에서 공돈이 주어진다면 기분좋게 쓰겠지만, 남편에게 받은 돈이 결국 우리 가정을 한달 동안 꾸려나갈 돈인데 그것을 모두 흥청망청 기분좋게 써댈 아내들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결국 가사일에 하루종일 시달려온 아내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희성이 내린 결론이다.

그렇다면 이런 비생산적인 이익이 남지 않는 일을 왜 계속 해야만 하는가, 그에 대한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그 이유는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이다.

가정이란 빈공터에 지어지는 집과 같다. 집을 짓기 위해서 누군가는 숲속에 들어가 열심히 나무를 베어와야만 하고, 누군가는 그 나무로 튼튼하게 기반을 잡고 기둥을 세우고 비를 피할 지붕을 덮게 된다.

그리고 그 곳에 조금씩 조금씩 살을 붙쳐나가고 먼지가 앉지 않도록 잘 관리하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요즘은 시대가 변해서 남편이 관리자의 역할을 맡아 하는 경우가 있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아내가 관리자의 역할을 맡게 된다.

둘 중 하나라도 집을 지을 목재를 가져오는 역할에 소홀하거나 집안 관리에 소홀하게 되면 멋진 집이 만들어질 수 없다.

희성에게 화목한 가정을 이루는 일이 인생의 목표는 아니였지만, 적어도 그 하나로 현재의 삶에 위안을 삶고 있는 것 같은 아이러니한 기분이다.

' 난 관리자의 역할로써 충실하게 살아왔어. 그래서 우리 가정은 이렇게 안정될 수 있었던 거야. '

하지만 그 행복한 가정을 지키기 위해 내가 지금 불행을 느낀다면...

 

                   *          *            *

 

 희성은 단 한번 걸려왔던 피리부는 사나이의 전화를 받은 직 후부터 지금 살고 있는 삶 자체가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자신이 살아왔던 인생길을 다시 되짚어 보게 되었다.

그 날, 희성에게 피리부는 사나이는 이렇게 물었었다.

"당신은 행복하십니까?" , 라고.

희성은 그 말에 선뜻 대답을 할 수 없었다.

"나,,,. 나,,는,,,."

대답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동화속에나 나오는 피리부는 사나이의 피리소리에 홀려 어딘가려 끌려가는 일은 없다. 그냥 이상한 사람에게서 온 장난 전화라고 생각하고 끊어버려도 전혀 무례한 일이 아니였다. 하지만 그에 대해 대답을 하지 않는 것이 어쩐지 자신의 삶 자체를 불행했었다고 단정지어버리는 것만 같아 끊어버릴  수가 없었다.

희성은 무거운 한숨을 내뱉으며 애써 입가에 웃음을 띄었다.

",,,네. 나는 행복해요. 지금 너무나도 행복해요."

자신의 살아온 삶을 불행했노라 부정하고 싶지 않았다. 이것은 희성 자신을 향한 메아리같은 대답이였다. 자기 자신을 위로하기 위한 대답이였다.

그리고 그 전화를 받고 난 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깬 희성은 꿈을 꾸었던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평소와 다름없이 아침식사를 준비하고 남편의 출근준비를 돕고 남편을 배웅했다.

세탁기에서 빨래가 돌아가고 있을 때, 정원의 작은 화단에 물을 주러 나갔다. 아니, 나가려고 했다. 막 현관문을 열려던 그 순간에 울드의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울드는 희성이 결혼하고 얼마안되었을 무렵, 길을 잃고 헤매던 것을 데려와서 기르고 있는 러시안블루 종의 고양이이다. 울드의 울음소리는 서재 쪽에서 들려왔다.

갸르르르 갸르르르 무언가를 경계하는 듯한 두려움에 떠는 듯한 울드의 울음소리를 듣고 희성은 급히 서재 쪽으로 달려갔다.

남편이 사무용으로 사용하는 노트북 컴퓨터가 놓여있는 책상과 희성이 가져온 책으로 사면이 가득찬 벽면의 책장, 평소와 다름없는 풍경이다.

울드는 책장의 구석진 곳을 노려보며 잔뜩 몸을 웅크리고 앞발을 내민채, 갸르르르 경계를 하고 있었다. 희성은 울드가 노려보던 곳을 바라보았지만, 특별한 것은 없었다. 요즘 자주 히스테리를 부리는 울드이기에 희성은 이번에도 그런 일이거니 생각했다. 울드를 안고 정원으로 나왔다.

 

그리고.

평소처럼 화단에 물을 주려던 희성은 깜짝 놀라 잠시 말을 잃었다. 희성이 보는 눈 앞에서 흙 속에 작은 씨앗이 하나 떨어지더니 화단에 피어있던 작은 꽃만큼이나 작은 나무 한그루가 씨앗으로부터 자라났다. 크기는 작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실제 나무와 별반 다를 것이 없고, 생김새를 비교하자면 버드나무 쪽에 가까운 그 나무의 성장은 놀라울 정도로 빨랐고, 희성이 정신을 차리고 보니 크기는 매우 작지만 이미 다 자란 나무 한 그루가 눈 앞에 보여지고 있었다.

나무의 가지에서 달걀만한 보라색 열매가 하나 떨어졌는데, 그 안을 열어보니 삐뚤 삐뚤 장난삼아 막대기로 그어놓은 듯한 글씨체로 짧은 글이 쓰여진 종이 쪽지가 나왔다.

"미미에게, 미미야, 난 꼭 이다음에 커서 훌륭한 의사가 될 거야. 그래서 너처럼 아픈 친구를 꼭 낫게 해줄 거야."

희성은 어리둥절 했지만 대체 이런 일이 현실에서 일어날 수 있는 것인지 의아하긴 했지만 아마 이것은 피리부는 사나이에게 전화가 온 일 때문에 벌어진 해프닝이라고 생각했다.

그로부터 간간히 몇일 건너 몇일의 시간을 두고, 이 기이한 상황이 반복 되었다. 하지만 매번 열매에서 나오는 종이 쪽지의 내용은 달랐으며 글씨체도 점점 변화해서 제법 알아볼 수 있을 정도 였다.  

 

"미미에게, 미미야, 나 드디어 결정했어. 난 꼭 우리 선생님처럼 자상하고 상냥한 멋진 영어 선생님이 될 거야. 모든 학생들이 나를 존경하고 우러러 볼테지. ^^ "

 

"미미에게, 미미야, 큰일났어. 나 요즘 커서 되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아졌어. 고고학자도 되고 싶고, 세계사 선생님도 되고 싶고, 관광가이드도 되고 싶어. 어떤 걸 해야할지,,,. 내가 하고 싶은 걸 모두 하고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미미에게, 미미야, 오늘 세쌍둥이가 나오는 프랑스 만화를 봤는데 말이야. 그걸 보고 나서 나도 결심했어. 난 멋진 세쌍둥이의 엄마가 될 거야 !"

 

"미미에게, 미미야, 인도여행기를 보고 있으면 정말 그 곳으로 당장이라도 떠나고 싶다니까. 가을 바람이 좀 쌀쌀하긴 하지만. 나도 세계를 여행하는 배낭여행가가 되어볼까?"

 

희성은 쪽지의 내용을 읽고 있는 동안 깨달았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 쪽지 하나만이 남았다는 것도 알았다. 읽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 쪽지는 학교 운동장에 파묻어두었던 희성의 어린시절 타임캡슐 내용이였다. 미미는 유치원 무렵부터 미미가 제일 좋아하던 바비인형의 이름이였고, 늘 미미에게 편지형식으로 타임캡슐의 내용을 채워놓곤 했다.

 

                   *          *            *

저녁무렵,  울드를 안고 거실에서 뉴스를 보고 있는 남편에게 다가갔다.

"여보, 나 할 말이 있어."

남편은 힐끗 곁눈질로 보더니 "무슨 일 있어?" 하고 물었다.

희성은 울드를 거실 바닥에 풀어주고 남편을 향해 앉았다.

그리고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태연한 말투로 이렇게 말했다.

"나, 꿈이 하나 생겼어.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잊고 있던 꿈을 찾았어."

남편은 무심히 앉아 tv만 보던 눈을 거두고 희성을 바라보았다.

"이번엔 뭘 배울건데?"

"퀼트나 십자수 같은 취미생활을 말하는 것이 아니야. 이번에는 정말 내가 하고 싶었던 걸 해보고 싶다는 말이야."

"도대체 뭘 하려고 하는 건데?"

남편의 인상이 조금 굳어졌다.

"나, 고등학교 졸업 무렵부터 쭉 꿈 꿔 왔던 것이 있어. 남들처럼 공부에 별로 흥미도 없었고 뭘  해야 할지 하고 싶은 것은 많고 막막하기만 했던 때, 유일하게 즐거운 마음으로 흥미를 가지고 할 수 있었던 것이 있었어."

"나, 작가가 되고 싶어. 물론, 힘든 것은 얼마든지 있겠지. 하지만 그만큼 노력하고 열심히 해볼거야. 주부라고 꼭 집안일만 하고 있으란 법은 없잖아. 나를 위한 인생을 살고 싶어."

남편은 왠일인지 지그시 눈을 감고 생각하더니 혼쾌히 승낙했다.

"네가 하고 싶다면 그렇게 해도 좋아. 단, 가정 생활에도 충실해준다면 말이야. "

희성은 대단한 소동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이상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          *            *

2년이 흘렀다. 피리부는 사나이로부터 한통의 전화가 왔다.

"당신은 행복하십니까?"

희성은 대답했다.

"글쎄요,아마도. "

 

 서재로 쓰이던 작은 방이 희성의 작업실로 바뀌어 있었다. 희성은 아직 정식으로 등단을 하진 못했지만, 작가의 꿈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습작소설을 쓰고 있다. 집안일은 여전히 희성의 몫이지만, 휴일이나 일찍 퇴근할 때에는 남편이 도와주기도 한다.

자신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고, 늦었다고 생각했을 때 잊었던 꿈을 발견하고 자신의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에 기뻤다.

그것은 지금도 변함없는 감정이다.

독일의 작가 장 파울은 이렇게 말했었다.

『 인생은 한권의 책과 비슷하다.

    바보들은 그것을 척척 넘겨가지만, 영리한 사람은 정성스럽게 그

    것을 읽는다. 왜냐하면 그는 오직 한번 밖에 그것을 읽지 못한다

    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

희성은 이제껏 자신을 위해 무엇을 해본 적이 잘 없었기 때문에 지금 이 시간들이 너무 소중하고 행복하게 느껴졌다.

한 번 밖에 없는 인생이라면 좀 더 소중하게 자신을 위한 삶도 살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이미 끊어져버린 수화기의 건너편에 말했다..

"네. 행복합니다. 그 어느때보다도."

 

어느 나른한 봄날의 아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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