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병원 영안실 안팍에 커다란 조화들이 가득 세워져 있었다. 조문객을 태운 세단들도 계속 밀어닥쳤다. 병원은 허름하고 초라했지만, 그러나 조문객 규모만 놓고볼 때 흡사 어느 세도가에 초상이 난 것처럼 보였다.
원무과 직원의 말에 따르면, 병원 개원 이래 이렇게 많은 조문객이 영안실을 찾은 것은 처음이라는 것이었다. 대충 둘러보니 모두 로즈가든에서 꽃을 받는 거래처 사람들 같았다.
재도가 동생 몇 명을 데리고 병원을 찾았을 때 로즈가든의 김사장은 흰 치마저고리 상복을 입고 영안실에 앉아 있다가 그를 맞았다. 돌아가신 분의 영정과 상주에게 예를 갖춘 후 재도가 자리에서 바로 일어서자 김사장이 쫓아나왔다.
[그냥 가시려구요? 먼 길 오셨는데 잠깐 요기라도 하고 가시죠.]
재도가 흑인 혼혈이라 그런지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두 남녀를 눈여겨보고 있었다. 상주도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이쪽을 바라보았다. 재도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정중하게 말했다.
[아닙니다. 바쁜 일이 있어서 빨리 가봐야 합니다.]
여자는 영안실 밖까지 따라나왔다. 뭔가 궁금한 게 있는 듯 보였다. 이윽고 그녀는 물었다.
[이분들이 여길 어떻게 알고 오신 거죠? 그리고 이 많은 조화는 다 누가 보낸 건가요?]
김사장의 얼굴에는 망자를 잃은 슬픔이 역력했다. 재도는 난처한 표정으로 잠시 묵묵히 있다가 그녀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짧게 대답했다.
[사실은, 형님 지시가 있었습니다.]
[형님? 승민씨 말인가요?]
재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는 자기 짐작이 맞았다는 듯 약간 허탈한 모습으로 입가에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렇군요. 그랬었군요.]
승민은 김사장이 모친상을 당하자 가장 먼저 문상을 다녀갔을 뿐만 아니라 큰 돈을 조의금으로 내놓아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뿐만 아니라 재도로 하여금 자기네 관할구역 안에서 로즈가든의 꽃을 받는 식당이나 유흥업소 업주들에게도 한 사람 빠짐없이 연락을 취하도록 했다.
김수희를 각별하게 생각하는 승민의 마음은 그것 뿐만이 아니었다. 이미 재도를 통해 병원 원무과에서 장례비 계산을 끝내도록 했고, 운구차량으로 쓸 캐딜락과 리무진 버스까지 최고급으로 예약해놓기까지 했다. 아마 삼일장이 모두 끝나게 되면 김사장과 그 유족들은 승민의 자상한 배려를 피부로 생생하게 느낄 수 있을 것이었다.
김사장이 복도에 있던 자판기에서 캔음료를 하나 꺼내주자 재도는 마지못해 그것을 받아들었다. 잠시 어색한 태도로 음료를 마시던 재도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어...우리 형님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무슨...뜻이죠?]
[형님은 김사장님을 굉장히 좋아하시는 것 같던데, 김사장님께선 우리 형님을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냐구요.]
그녀는 아무 말도 못한 채 얼굴을 붉혔다. 비록 상복을 입고 있었지만, 여자의 모습은 무척 아름답고 기품이 있어 보였다. 재도는 말했다.
[우리 형님 좋은 분입니다. 비록 뒷골목에서 주먹을 휘두르며 살아가고는 있지만, 형님은 흔해빠진 건달이 아닙니다. 건달들이 잔머리 굴려 정치하는 썩어빠진 놈들의 똘만이로 전락하면서 협객이란 말이 사라진 지 오래 되었지만, 우리 형님은 일테면 진정한 사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땅에서 손가락질 받고 차별 당하는 놈을 자기 밑에 두고 사람으로 대접해주고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이야기가 나온 김에 재도는 승민과 처음 만나게 된 일화를 김사장에게 소상하게 들려주었다.
십여년 전 재도는 홀어머니와 함께 용산 해방촌에서 살았었는데, 당시 그는 중학교를 그만두고 남대문시장 근처에서 구두를 닦으며 살아가고 있었다. 어느날이었다. 밤 늦게 피곤한 몸을 이끌고 귀가하는데 동네 불량배들이 그를 불러세워선 불문곡직 몰매를 안기곤 그날 수입을 강탈해갔다. 그들은 평소에도 재도를 보기만 하면 못살게 굴던 질 나쁜 동네 양아치들이었다. 재도는 그날 이후에도 가끔씩 그들에게 걸려 돈을 뜯기곤 했다.
하루는 그들을 피해 먼 길을 우회해 집에 돌아오다가 그만 불량배들에게 딱 걸리고 말았다. 그들은 피도 눈물도 없는 아귀같은 놈들이었다. 이젠 아주 돈 뺐어 쓰는 데 재미가 붙어서 재도가 귀가할 무렵이면 늘 그의 집 근처에서 얼쩡거리곤 했던 것이다. 그날따라 심기가 좋지 않았던 재도는 악이 받쳐올랐다. 그는 처음으로 양아치들에 맞서서 싸웠다. 길가의 돌을 집어들고 마구 휘두르며 대항했다. 울며불며 주먹을 휘둘렀다.
하지만 혼자서 여러 명을, 그것도 자기보다 큰 덩치의 불량배들을 상대한다는 것은 결과가 뻔한 일이었다. 재도는 곧 무자비하게 구타당하기 시작했다. 그는 비좁은 골목에 쓰러져 새우처럼 잔뜩 몸을 구부린 채 무수히 걷어채이고 짓밟혔다.
바로 그 순간 기적같은 일이 벌어졌다. 누군가 홀연히 나타나 불량배들을 물리쳤던 것이다. 얼핏 고개를 들어 확인해보니 낯선 청년 하나가 뛰어들어 종횡무진 활약을 하고 있었다. 그가 휘두른 주먹과 발길질에 예닐곱 명의 불량배들은 흡사 낫에 베인 잡초처럼 모조리 길바닥에 나뒹굴었다. 몇 명은 어디가 부러졌는 지 아예 일어나지도 못하고 기어서 도망갔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상황이 종료되자 정체불명의 그 청년은 피투성이가 된 재도에게 손을 내밀어 일으켜주었다. 그리고 친절하게도 집까지 바래다주었다. 너무 분하고 억울해 시종 눈물을 흘리던 재도의 어깨를 두드리며 그 청년은 이런 말을 남기고 돌아갔다.
[누가 또 너를 괴롭히면 내 이름을 팔아. 그리고 누구든 다시 한 번 널 건드리면 내가 용서하지 않겠다고 똑똑히 일러둬. 알겠어? 내 이름을 똑똑히 기억해두라구.]
그 청년이 일러준 이름이 강승민이었다. 지금은 크레이지 호스의 사장이 된, 바로 그였던 것이다. 수희는 재도의 얘기를 다 들은 후 뭔가 짚히는 게 있어 그에게 물었다.
[혹시 재도씨가 그 분께 서둘러 결혼하라고 권유하셨나요?]
[네. 제가 그런 말씀을 드렸었죠.]
[그런데...왜 하필 저죠? 전 나이도 그 분보다 몇 살 위이고, 이미 한 차례 결혼했다가 실패했어요. 물론 다 알고 계시겠죠?]
[아마, 형님도 알고 계실 겁니다.]
재도는 씩 웃었다. 그는 음료를 기울여 한 차례 입을 적시더니 말했다.
[언젠가 형님이 그러더군요. 처음에 크레이지 호스에서 마주쳤을 때 자기는 김사장님이 누군지도 몰랐다고 말이죠. 그런데 나중에 형님이 손가락을 잘라 배회장에게 바쳤을 때 김사장님께서 병원 치료비에 쓰라면서 돈봉투를 하나 내놓으신 일이 있었죠?]
[네. 그런 일이 있었죠.]
[아마 그때 형님은 처음으로 김사장님을 가까이서 보게 되었고, 그리고 바로 그날 첫눈에 반했던 모양입니다.]
그랬었다. 여자는 자기 때문에 승민이 큰 수모를 당하게 된 것 같아 치료비라도 전해주려고 크레이지 호스를 다시 찾았었다. 하지만 그날 음습한 골방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었던가. 그녀는 불현듯 사내의 첫키스를 받었던 기억이 나자 다시 한 번 얼굴을 발그레 붉히고 말았다.
(* 작품을 쓰다보니 처음 구상했던 것보다 편수가 좀 더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현대 중산층 여성의 성적 수난에 대한 보고서>는 후편으로 계속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