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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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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중의 비보


BY 한상군 2006-03-09

 

 

 

 

 

   음악회가 끝나 공연장 밖으로 나오자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봄비였다.
   두 사람이 음악당 현관에 모습을 보이자 보디가드 세 명이 뛰어와 우산을 받쳐주었다. 승민과 수희는 그들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검정색 BMW에 올랐다.
   승민은 음악회 내내 잠만 잤다. 시향과의 협연자가 바이얼리니스트였기 때문인지 그는 감미로운 선율을 자장가 삼아 처음부터 거의 끝까지 취침으로 일관했다. 얼마나 피곤했던 지 그는 의자 등받이에 머리를 기대고 아예 천정을 올려다보는 자세로 입까지 헤 벌리고 잠을 잤다.
   수희는 그 모습이 우습기도 하고 주변 사람들 보기에 민망하기도 해서 제대로 음악을 감상할 수조차 없었다. 그 와중에 그래도 코를 골지 않은 게 얼마나 다행스러웠던지.  
   차가 공연장을 빠져나오자 승민은 목을 좌우로 꺽으며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 마른 세수를 했다. 그는 손가락으로 눈꼽 떼는 시늉을 하다가 수희를 돌아보았다.
  
   [그래, 음악회는 즐거웠소?]
   [네. 즐거웠어요. 나 혼자 즐겨서 좀 아쉽긴 했지만.]

   승민은 흰 이를 드러내고 씩 웃었다. 차가 대로변으로 나오자 그는 운전자에게 행선지를 일러주었다. 무슨 복싱 체육관으로 가자고 하는 것 같았다.  

   [즐거웠다니 다행이로군.]

   담배를 한 개피 꺼내 입에 물려다가 승민은 수희를 의식하고는 그것을 뚝 분질렀다. 그는 웃으며 말했다.

   [도대체 나란 놈은 어째 음악만 들으면 그렇게 잠이 쏟아지는 지 모르겠단 말야.]
   [취미를 좀 붙이면 클래식도 그렇게 어려운 것만은 아니에요.]
   [글쎄. 강승민이가 클래식을 즐긴다? 브람스가 어떻고 차이코프스키가 어떻고 주절거리면서,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클래식을 즐기신다? 하하하하.]

   승민이 웃자 수희는 정색을 하고 반문했다.

   [뭐가 어때서 그래요? 승민씨가 클래식을 즐기면 누가 뭐라고 하나요?]
   [그게 아니라, 난 말이요, 어려운 음악이 시작되면 도대체 몇 악장 몇 소절에서 박수를 쳐야 하는 지 그걸 통 모르겠단 말이야. 그런 주제에 마치 클래식에 조예가 깊은 것처럼 천연덕스런 얼굴로 객석에 앉아 있다가 남들이 박수를 치면 그때 덩달아 손뼉을 치는, 그런 짓만큼은 낯 간지러워서 도저히 못하겠단 말이요. 요컨대 난 베토벤이나 모짜르트의 이름을 빌어서까지 지성인 행세를 하고 싶지는 않단 말이요.]
 
   신랄한 표현이었다. 수희 역시 평소 클래식 음악회에 모여드는 사람들이 모두 다 베토벤이나 모짜르트를 이해한다고는 생각지 않고 있었다.

   [그래요. 특정 음악을 좀 안다고 그것을 악세서리처럼 자기를 치장하는 데 써서는 안되겠죠. 클래식이건 팝이건, 또는 국내 가요건, 누구나 자기가 좋아하는 걸 듣고 즐긴다는 게 중요한 일이에요. 자기가 어려운 음악을 선호한다고 해서 함부로 남의 취미를 격하시키고 매도한다는 것은 위험한 독선이에요.]
   [그래. 좋은 얘기를 했소. 난 말이지, 국산 노래가 좋아. 내 수준은 그 정도요. 하지만 얼마나 좋아. 듣기 좋고 따라 부르기 쉬우면 그거야 말로 좋은 음악 아니요?]
   [맞아요.]
 
   두 사람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웃었다. 차는 서초동에서 방배동 쪽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비는 여전히 세차게 차창을 두드리고 있었다.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거죠?]
   [복싱 체육관. 다음 달에 내가 키우는 선수 하나가 세계 타이틀매치를 벌이게 됐거든. 가서, 이 놈이 운동을 잘 하고 있는 지 잠깐 들여다보자구.]
   [그쪽도 한때 권투를 했다면서요?]

   수희가 묻자 승민은 씩 웃으며 물었다.

   [누가 그럽디까? 그 얘긴 어디서 들었소?]

   크레이지 호스의 관리부장인 재도가 그를 가리켜 한때 잘 나가던 복싱 유망주였었다고 그랬었다. 하지만 수희는 그 얘기의 출처를 얼버무렸다. 승민은 한숨을 한 차례 길게 내쉬더니 말했다.

   [했었지. 나도 한때는 복싱으로 입신하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어. 그러나 이젠 다 지나간 옛 이야기일 뿐이야.]

   승민의 얼굴에 말 못할 회한이 스치고 지나갔다. 들리는 얘기에 따르면 그는 과거에 연전연승하던 가공할 주먹의 소유자였었다고 했다. 프로 데뷔 이래 십여 전을 치르는 동안 단 한 번도 진 적 없이, 상대를 모두 넉다운시킨 강타자였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불운한 복서였다. 한국 타이틀매치를 앞둔 중요한 랭킹전에서 상대 선수를 때려뉜 것까지는 좋았었는데, 시합이 끝난 뒤 그 선수가 돌연 뇌출혈로 사망하면서 모든 게 물거품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물론 그 사건으로 인해 승민이 법적으로 책임 질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유가족이 울부짖으며 원망하는 상황 속에서 점점 가중되는 양심의 가책만큼은 쉽게 떨쳐버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결국 그 일로 인해 권투를 그만두게 된 승민은 여러 해 동안 건축공사장들을 떠돌아다니며 육체노동자로 살았다고 했다.

   [아직 복싱에 미련이 남아 있군요.]
   [미련? 글쎄, 이게 미련인 지 뭔 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유망주 하나를 키우고 있는 중이요. 재미 삼아 키우고 있는데, 어떻게 될지는 나도 잘 모르겠어.]

   빙그레 웃던 승민은 문득 수희를 돌아보았다.

   [참, 듣자니 요즘 취미생활을 하나 시작했다고 그러던데, 사실이요?]

   아마 그림을 말하는 것 같았다. 수희는 부끄러운 듯 미소를 지었다.

   [학창시절에 그림을 좀 그렸었는데, 다시 한 번 시작해보려구요.]
   [그림, 좋지. 기왕에 그릴 거면 어려운 추상화 같은 거 말고, 나 같이 무식한 놈들도 이해할 수 있는 그림을 좀 그려봐요.]

   사업이 어느 정도 안정궤도에 접어들자 수희는 얼마 전부터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어린 아들을 멀리 떠나보낸 뒤 그 생이별의 아픔을 잊게 해줄 구체적인 수단이 그녀에겐 필요했는데, 대학시절 잠깐 전공했었던 순수회화야말로 그녀에겐 더 할 나위 없이 좋은 위안이요 소일거리가 되었던 것이다. 새로 이젤이며 여러 가지 화구들을 준비해놓고, 그녀는 시간이 날 때마다 집안에 틀어박혀 자기가 좋아하는 인물이나 정물 따위를 한 점씩 꾸준히 그려내고 있었다.

   [부지런히 그려봐요. 작품이 많이 쌓이면, 내가 화랑을 하나 잡아 전시회를 크게 열어주겠소.]
   [전시회를요?]

   수희가 웃자 승민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 그린 그림이라면 내가 한 점도 남김없이 다 팔아주겠어. 아주 비싼 값으로 말이요.]
   [전 아마츄어일 뿐이에요. 누가 제 그림 따위를 비싸게 사겠어요?]
   [그렇지 않아요. 로즈가든 사무실 벽에 걸려 있는 그림이 바로 당신 솜씨라면서? 내가 보기엔 프로던데, 뭘.]
  
   그의 표현이 우스워서 수희는 잠자코 미소만 지었다. 왜냐면 그것은 수희의 붓 터치가 빚어낸 그림이긴 해도, 엄밀히 말해 그녀의 작품이 아닌 클로드 모네의 명화를 그대로 모사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훌륭해. 내가 잠깐 봤지만, 그 정도라면 어디에 내놔도 통용될 수 있을 거요.]

   대체 그림에 대해 뭘 안다고 이런 장담을 하는 것일까. 수희가 자조적인 느낌이 들어 한 손으로 입을 가린 채 배시시 웃을 때였다. 갑자기 핸드백 속에서 휴대폰이 부르르 떨었다. 꺼내보니 춘천에 살고 있는 남동생의 목소리가 다급하게 들려왔다.

   [누나. 엄마가, 엄마가 쓰러지셨어. 지금 병원인데, 의사 말이...오늘을 넘기기 힘들겠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