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장이 감돌고 있었다. 출발선에 나란히 정렬해 선 경주마들은 아직 뛰지도 않았건만 벌써부터 가쁜 숨을 내쉬고 있었다. 모두 흥분한 게 틀림 없었다. 기수들은 자세를 한껏 낮춘 모습으로 가만히 경주마들의 목을 쓸며 고삐를 짧게 움겨쥐었다.
이윽고 출발신호와 함께 경주마들은 앞을 향해 내닫기 시작했다. 좋은 라인을 먼저 차지하기 위해 안쪽으로 파고들며 그들은 치열하게 몸싸움을 벌였다.
우두두두두. 지축을 흔드는 말발굽 소리도 관중들이 내지르는 함성으로 이내 지워져버렸다. 객석의 관중들은 저마다 한 웅큼씩의 마권을 손에 쥐고서, 자기가 선택한 우승 예상마들을 응원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박진감이 있었다. 땅을 박차고 내닫는 경주마들의 근육질 움직임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시원한 기분마저도 느끼게 해주었다. 경주마들의 힘찬 발굽에 땅이 패여 허공에 모래흙이 튀었다. 기수들은 가차없이 채찍을 휘둘렀고 경주마들은 서로 앞서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코너를 한 번 돌고 이어 두번 째 코너도 순식간에 돌았다. 그때부터 세 마리의 말들이 선두진영을 형성하여 계속 앞서 나갔다. 그 뒤를 새카만 다크 호스 한 마리가 부지런히 쫓았고 나머지 경주마들은 서서히 뒤로 처졌다.
세번 째 코너를 돌 때였다. 갑자기 선두진영을 멀리 우회하며 다크 호스가 추월을 감행했다. 선두에 섰던 말들은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들은 뒤로 처지지 않기 위해 전력을 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다크 호스는 여유있게 선두를 제치고 마지막 코너를 가볍게 돌았다. 관중들은 아우성이었다. 그들은 목이 터져라 자기들이 돈을 건 경주마들을 응원했다.
채찍이 난무했다. 허공으로 모래흙도 한 웅큼씩 튀었다. 결승지점까지 이제는 직선주로 뿐이었다. 때문에 서로 몸싸움 할 것도 없이 사력을 다해 앞을 향해 뛰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세 마리의 경주마들은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내달았으나 처음 출발할 때보다는 많이 둔해진 모습이었다. 다크 호스는 그들을 힘차게 제치고 결승점을 향해 치달아 들어갔다.
마권들이 휴지조각처럼 허공에 뿌려졌다. 야유와 환호가 관중석에 교차되고 있었다. 몇몇 사람들은 기쁜 표정으로 어디론가 헐레벌떡 뛰어갔지만, 대부분 많은 관중들은 흡사 모래라도 씹은 듯 허탈한 표정이 되어 있었다.
[제기럴. 공연히 들러리만 선 꼴이 되었군.]
승민 또한 손에 쥐고 있던 마권을 관객석 바닥에 버렸다. 벌써 두번 째였다. 수희가 알기로 두 번 모두 상당한 돈을 걸었던 것 같은데 정작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이었다. 곁에 있던 대준이 물었다.
[형님, 더 하시겠습니까?]
그러자 승민은 수희를 한 번 돌아보더니 싱긋 웃으며 말했다.
[아니, 그만 하기로 하지.]
승민이 자리를 털고 일어서자 대준을 비롯해 네 명의 보디가드들도 일제히 몸을 일으켰다. 승민은 수희의 허리에 부드럽게 한 팔을 휘감으며 말했다.
[오늘 김사장님과 함께 어딜 좀 갈 데가 있거든.]
실내엔 아무도 없었다. 손님들은 물론이고, 종업원들의 모습도 눈에 띄지 않았다. 승민이 수희를 동반한 채 식당 문을 열고 들어서자 검정 턱시도를 단정하게 입은 나이 지긋한 웨이터가 두 사람을 안내했다.
레스토랑 한쪽 창가의 커다란 테이블에는 촛불이 환하게 밝혀져 있었고, 반짝반짝 윤이 나는 식기가 이미 세팅돼 있었다. 의자가 두 개 놓여져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 누군가 미리 식당 전체를 예약해놓은 것 같았다.
수희가 웨이터의 에스코트를 받아 중세 유럽풍의 화려한 의자에 살며시 앉는 순간 어디선가 은은한 바이얼린 선율이 들려왔다. 촛불만이 실내를 밝히는 가운데 그 불빛을 받으며 한 늙은 악사가 두 사람 곁으로 다가와 바이얼린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수희는 너무도 뜻밖의 일이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영화에서나 보던 장면 속에 자신이 등장해 있다고 생각되자 그녀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맞은편의 사내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어떻게 된 일이죠?]
웨이터는 두 남녀 사이를 오가며 혼자 시중을 들기 시작했다. 그는 먼저 얼음통에서 프랑스산 포도주를 한 병 꺼내들고는 두 개의 와인 잔에 찰랑찰랑 채워주었다. 승민이 와인 잔을 들며 말했다.
[자, 생일을 축하해요.]
수희는 아직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누구? 승민씨? 아니면.....]
[아직 모르고 있었군 그래. 맞아. 오늘이 바로 당신 생일이야.]
그렇군. 그랬었군. 수희는 자신도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던 생일을 승민의 입을 통해 확인하게 되자 갑자기 목이 꽉 메어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자, 어서 잔을 들어요. 어서!]
찰캉, 가볍게 잔을 부딪고 두 사람은 와인을 들이켰다. 노인은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듯한, 짚시 풍의 애절한 곡을 연주하고 있었다. 수희는 그 선율이 너무도 아름답고 감미로워 불현듯 가슴이 미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수희가 단숨에 술잔을 비우자 멀찌기 떨어져 있던 웨이터가 다시 다가와 그녀의 잔에 포도주를 채워주었다.
[무슨 술을 그렇게 마시는 겁니까? 그러다간 술꾼이 되겠어.]
[와인 맛이 좋은데요. 이 포도주, 아주 오래된 것 같아요.]
수희는 승민의 말에는 대꾸도 않고 딴청을 피웠다. 그때 주방으로 통하는 문이 열리며 젊은 웨이트레스 두 명이 음식을 가져오기 시작했다. 음식은 갓 요리한 듯 신선했고 또 뜨끈뜨끈 했다. 수프를 마시며 승민이 말했다.
[내가 프랑스 요리를 미리 주문했는데, 괜찮겠어요?]
[네. 아주 좋아요.]
[다행이군. 그럼 식기 전에 어서 듭시다.]
수프 접시를 비우자 프랑스 요리는 끊이지 않고 계속 테이블 위에 놓여졌다. 수희는 포도주를 곁들여 굴을 삼키고 달팽이를 씹었다. 그리고 이름 모를 여러가지 음식들을 조금씩 입으로 가져가 씹고 또 삼켰다. 식도를 통해 고급 요리가 넘어가면 갈수록 하지만 그녀는 왠지 서럽고 쓸쓸해서 자꾸만 체한 것처럼 목이 메어왔다.
창밖으로 주변의 야경이 아름답게 비쳐졌다. 그리고 바이얼린으로 잔잔하게 연주되는 러시아 민속음악은 너무나 그녀의 마음을 감상적으로 만들어놓았다. 수희는 이윽고 들고 있던 포크를 놓았다. 한 손으로 이마를 괸 채, 그녀는 시선을 내리깔았다. 미처 삼키지 못한 음식물이 입안에서 뱅글뱅글 맴돌았다. 그녀는 음식물을 씹다가 한 데 모아 일순 꿀꺽 삼켰다. 그때 눈물이, 참고 억제했던 눈물이 방울방울 두 빰을 타고 흘러내렸다.
생일. 생일이라니. 이혼한 여자에게도 생일이 있단 말인가. 이제 생일 따위는 잊어버린 지 오래이건만 갑자기 이 무슨 분에 넘치는 호사란 말인가.
[왜 그러는 거요? 어디 불편한 데라도...]
승민이 염려스런 얼굴로 물었다.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흐느끼던 수희는 냅킨으로 눈물을 찍어냈다.
[아, 아녜요. 너무 뜻밖이라서 그래요.]
[이런 대접으로 감격할 정도라면 앞으론 종종 울어야 할 거요.]
[여자란 대부분 무드에 약해요. 그리고 나는 특히 눈물이 많은 여자에요. 모르셨죠?]
[그렇군. 여자란 정말 눈물이 많은 동물이로군.]
말을 맺은 뒤 승민은 제 양복 상의 안주머니 속에서 보석상자 하나를 꺼내 수희 앞에 밀어놓았다.
[이게 뭐죠?]
[내 성의요. 받아주었으면 좋겠어.]
수희는 승민의 얼굴과 보석 상자를 번갈아보았다. 승민이 어서 펴보라는 듯 표정을 짓자 수희는 마침내 와인 잔을 놓고 선물 포장을 풀어보았다.
[어머, 이게 다 왠 거죠?]
그것은 한 세트로 된 귀금속이었다. 목걸이와 팔찌와 귀걸이, 그리고 반지까지 있었다. 그 중에서 수희는 가장 눈길을 끄는 목걸이를 집어들었다. 제법 알이 굵은 에머랄드가 수없이 박힌 금목걸이였다. 수희는 영롱하게 빛나는 에메랄드에 자못 넋이 나갈 지경이었다.
[정말 이게 다 왠 거죠?]
[어때? 선물이 마음에 들어요?]
[내게 주시는 건가요?]
[그렇고 말고. 당신에게 주는 생일선물이요.]
[너무나 훌륭해요. 하지만 내겐 과분한 것 같아서 부담스러워요.]
승민은 음식을 먹다 말고 술잔을 들었다. 그가 포도주를 단숨에 들이켜자 웨이터가 다가와 잔을 다시 채워주었다. 승민은 그 중년의 웨이터에게 뭐라 지시했다. 그러자 웨이터는 수희에게 다가오더니 에메랄드 목걸이를 그녀의 목에 조심스럽게 걸어주었다.
[멋지군. 반지도 껴봐요. 팔찌도 차고 귀걸이도 해보라구. 어서.]
반지에는 제법 알이 굵은 다이아몬드가 한 개 박혀 있었다. 크기로 볼 때 최소한 3캐럿은 될 듯 보였다. 그리고 팔찌나 귀걸이도 일반 사람들로선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값비싼 것들 뿐이었다. 수희는 승민의 주문대로 반지를 손가락에 끼고 팔찌를 손목에 찼으며, 귀걸이 두 개 또한 자신의 귓밥에 매달았다.
[근사해. 정말 잘 어울려. 보석이란 과연 당신 같은 여자를 위해 있는 것 같아.]
술잔을 놓으며 승민은 담배를 하나 꺼내 입에 물었다. 그러자 웨이터가 조용히 다가와 불을 붙여주었다. 그는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며칠 전에 내 아우들 중에 한 놈이 내게 이런 말을 했어요. 무릇 보스가 된 사람은 부하들로부터 신망을 잃어선 안된다고 말이요. 요컨대 날더러 처신하는 데에 신경을 좀 쓰라는 것이었지. 서른 중반인 나이에 매일 이 여자 저 여자 끼고 다닌다는 게 자칫 아우들 눈에는 문란하게 보일 수도 있다는 거였어. 그 놈은 날더러 빠른 시일 내에 독신생활을 청산하라고 말했소. 그것이 나를 위해서도 좋고, 또 조직을 위해서도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이었지.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지 알아 듣겠소?]
수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난 지금 당신에게 프로포즈를 하고 있는 거야.]
신경이 쓰였는지 승민은 갑자기 바이얼린 연주를 중단시켰다. 그리고 턱짓을 해 웨이터와 악사를 밖으로 내보냈다. 이제 레스토랑의 넓은 홀 안에는 두 사람 뿐이었다. 승민이 강렬한 눈빛으로 지그시 쏘아보자 수희는 자기도 모르게 숨을 훅 들이마셨다. 그녀는 짐짓 담담한 표정을 연출하며 물었다.
[왜 나죠? 젊은 여자들도 얼마든지 있을텐데. 승민씨가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젊고 예쁜 여자들을 고를 수도 있잖아요.]
[예쁘다고 해서 다 매력이 있는 것은 아니지.]
승민은 무표정한 얼굴로 여자를 바라보았다. 수희는 그에 질 새라 사내의 두 눈을 조용히 마주보았다. 이내 여자는 시선을 내리깔았다.
[지금 이대로가 좋지 않을까요? 서로 간섭하거나 구속하지 않는 지금이...]
[내가 싫은 거요?]
[그건 아니에요. 하지만...]
수희가 말을 잘 잇지 못하자 승민은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껐다. 그의 얼굴은 약간 상기돼 있었다. 승민은 한 팔을 뻗어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움켜잡으며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물론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대답을 해달라는 건 아니야. 충분한 시일을 두고 천천히 생각해봐요. 뭐, 급할 건 전혀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