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고 싶은 날들
Are you ready to go Christmas shopping?(크리스마스 쇼핑할 준비가 됐습니까?)”
오븐에 한 나절을 구운 터키를 먹는 추수감사절이 지나고 학교에 갔을 때 영작 교수
미스 마이어는 강의를 이렇게 시작했다. 추수 감사절 다음 날부터 본격적인 크리스마스 쇼핑 시즌에 들어가는 이곳의 문화를 잘 반영한 말이리라. 이제 조금 지나면 이 사람들은 “Have you done your Christmas shopping?(크리스마스 쇼핑은 다 끝내셨나요?)” 로 인사가 바뀌겠지.
그 간 혜리의 작은 음악회는 일 월 둘째 주 금요일로 잡혔고 장소는 샌프란시스코의 한 호텔로 결정 되었다. 은하의 차례는 마지막에서 두 번째라고 들었고. 추수감사절을 지낸 거리는 곧 다가오는 크리스마스 분위기로 들떠 있는지 어딜 가나 캐럴이 울려 나와 한층 연말연시의 부산함을 말해 주고 있었다. 미국 사람들은 이 때 가족 친지에게 줄 선물 목록을 만들어 놓고 세일을 쫓아 다니느라 바쁘다고 했다.
“겨울이란게 어쩐지 실감이 안나요. 춥지도 않고 눈도 안오고.”
은하가 버클리대 하스 스쿨 앞을 걸어 지나가며 조금 전에 길에서 마주친 조 교수와 태식에게 말했다.
“그죠? 역시 크리스마스는 눈이 있고 추워야 제맛인 것 같네요. 중부 쪽에서 공부할땐 눈도 많이 왔었는데. 어휴, 그 눈 치우느라고 얼마나 한 운동 했게.”
조 교수는 비가 올 듯 잔뜩 찌푸린 하늘을 올려다 보며 걷더니 갑자기 타령조로 말을 이었다.
“벌써 갈 때는 다 되었는데 논문도 끝내야 하고 골프도 접수해야 하고… 이거 바쁘구만.”
“일년이 어떻게 지났는지 모르겠어요. 윤 교수.”
조 교수는 “정말 그래요.” 하는 태식을 보다 셋이 걸어 가기에는 길이 좁아 약간 뒤에 따라 오는 은하를 돌아다 보며 물었다.
“은하씨는 언제 귀국해요? 정훈이가 온다고 했다면서요?”
“아마요. 저희는 일월 중순에요. 조 교수님은요?”
“우린 이월 초입니다. 윤 교수도 일월 말이라고 했죠?”
조 교수가 태식을 보았다.
“네.”
“아— 이거 시간 밖에 가진 게 없던 좋은 시절 다 가고 큰 일 났구만.”
그는 계속해서 타령조가 되더니 “요즘 축축해서 필드도 못나가고 골프 레슨도 시즌이 끝났는데 눈 구경이나 하러 레잌 타호에나 갔다 옵시다.” 라고 했다.
“제수씨도 구경 좋아하잖아요. 이번에 따라 붙어요. 내가 마지막으로 확실하게 책임질 테니까.”
“그럼 저도 붙여 주시는 거예요? 정아가 스키 타러 가자고 했거든요. 둘이서 얌전히 따라 다닐께요, 조 교수님.”
은하의 애교있는 말에 조 교수는 “내가 이렇다니까. 따라 다니겠다는 여자들이 너무 많아.” 하며 뿔테 안경을 한 번 올렸다.
“조 교수님, 강의실에서도 여학생들한테 인기 좋으신거죠?”
“그야 Of가 course지.”
조 교수의 재치에 하하하 셋이서 함께 웃었다.
앞에 가고 있는, 가지색 스웨터를 입은 태식의 팔장을 살짝 껴 보고 싶어질 때 태식이 조 교수에게 “점심이나 들고 가시죠.” 하자 조 교수는 “아, 그게 집에 동생 친구인 손님이 와 계서서 안되겠네.” 했다. 샌프란시스코 의대에 포스트 닥 온, 친구의 동생인데 학교 근처에 아파트를 얻어 주고 자동차도 보러 가기로 했다며.
“둘이서 들어요. 갈께요.”
그는 은하와 태식을 번갈아 보다 바트역으로 지금 가 봐야 한다며 걸음을 옮겼다.
“그럼, 연습장에서 뵙죠.”
뒤 돌아 걸어 가는 조 교수의 등에 대고 은하와 태식이 동시에 ‘그럼’ 이라고 하다 은하가 킥 하고 웃으며 말을 멈추었다. 붓컷 진에 곤색 니트와 스웨터를 매치해서 입은 그녀에게 태식은 학교 파킹랏에 세워둔 차를 타고 나갈까 아니면 학교 안의 카페테리아로 갈까 물었을 때 은하는 비가올 것 같다며 가까운 카페테리아로 가자고 했다.
“조 교수님 언제 뵈도 좋은 분 이세요.”
“네, 같은 남자가 봐도 소탈하고 멋진 분이시죠. 형한테 놀러 오던 학생 때부터 화통했어요. 한때는 가수들 뒤를 따라 다닌적도 있었고. ”
“호호, 그래요? 너무 재미있으신 분이네요.”
“어머니가 저 형을 좋아하셨어요. 딸 있으면 주고 싶다고. 지금은 안 계시지만…”
“네에.”
언젠가 잠깐 들은 적이 있는, 태식이 고등학교 3학년 때 병으로 돌아가신 어머니 얘기를 하고 있는 그를 보다 은하는 태식에 대해 물었다.
“그럼 그 쪽은 어떤 남자예요? 같은 남자가 볼 때.”
“알고 싶어요?”
“네. 궁금해요.”
“조 교수님께 물어 보시죠.”
태식이 은하에게 싱긋 웃어 보였다. 그는 이게 매력이었다. 중요한 장면에서 별로 긴 말이 없을 때. 햇볕에 탔던 얼굴이 조금은 제 안색으로 돌아온듯 피부색이 밝아 보이고 있었다.
“음-- 그 쪽은 내가 잘 알아요. 어떤 남자인지.”
“…?”
“말해 줄까요?”
“어-- 떨리는데요.”
“그래요? 일단… 주접은 아니라서 봐줄만 하구요.”
“주접이요?”
“네, 주접.”
태식이 그 나이에 주접 소리를 듣는 것이 우스운지 ‘주접이요?’ 하며 허허 했다.
“그렇다고 조잡도 아닌 것 같구요.”
“휴-- 다행이네요.”
태식은 가슴을 쓸어내리는 시늉을 했다.
“음— 그런데 조금 재미는 없는데 그건 봐줄만 하구요.”
“어쩌죠? 점점 더 불안해 지는데요?”
“후후 사실은 무척 괜찮은 남자예요. 날 내려 놓고 싶은. 무조건 기대 보고 싶은.”
“…난 그 쪽에게 날 내려 놓았다고 생각했는데요.”
은하의 말을 듣고 있던 태식이 자기가 은하에게 그렇다는 뜻을 비쳤다.
“나한테요?”
“네.”
“…?”
“옆에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져서요.”
태식의 말은 진심으로 들렸다.
“…그럼 우리 서로 공평한 거군요?… 나 내려 놓을 거 있을 때 전화해도 돼요? 서울가서… ”
“네.”
태식이 앞만 보며 걷다 은하를 보았다.
“나 생각해 보았어요. 그 쪽이랑 헤어졌다 우연히 길에서 마주치면 어떻게 해야 하는건가 그런거요. 우연히 만났는데 그 쪽은 와이프와 아이들이 옆에 있고 나도 그렇다면…”
“…전화해요. 나갈 수 있어요.”
그의 음성은 은하의 귀에 분명하고 단호하게 들려왔다.
“아까 조 교수님이 귀국하는 얘기를 하니까 기분이 이상했어요. 그래야 할 줄 알고 있었지만 막상 가야한다는 말을 들으니까. 뭐랄까… 긴 줄만 알았던 방학이 끝나가고 있는 위기감이랄까, 아쉬움 같은것이랄까 뭐 그런 기분이요.”
은하가 하던 말을 채 맺기도 전에 후두둑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자 둘은 카페테리아가 있는 건물로 빠르게 들어섰다. 마침 건물 앞으로 거의 다 걸어 와 놓은 상태라 비를 피할 수 있었다.
“그 쪽이 괜찮다면 이 길로 도망갈까요, 우리?”
건물로 뛰어 들어서며 태식이 상당히 원색적인 용어를 사용하자 은하가 “그럼 망친 김에 무섭게 망가질래요? 우리?” 하며 따라 웃었다.
후두둑거리며 시작한 싸늘한 겨울비는 어느새 을씨년스러운 거리를 적셔 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