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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 위의 만남


BY 애니 2006-02-11

언덕 위의 만남

 

 

 

 

, 이 곡은 6/8 박자 왈츠야.  그러니까 쿵작작 쿵작작 리듬을 타고 경쾌하게 불러.

 

 

혜리가 피아노 반주를 다시 시작하며 쿵작작 쿵작작 을 강조했다.  삼각형 모양을

손으로 그려 가며.   피아노 반주만으로도 유럽 귀족들의 화려한 무도회를 상상할 수 있는 요한 슈트라우스봄의 소리 왈츠.  은하는 전주만으로도 벌써 웅장하고 벅찬 감동이 밀려 오는 곡을 맞을 준비를 하느라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노래했다.  이런 대작을 과연 잘 소화해 낼 수 있을까 염려하던 은하에게 노래 중간 중간에 훈수를 불어 넣어주는 혜리 덕에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고나 할까.

 

 

바운스를 해야지.  따란 따란 하는 작은 장식이 많은 곡이잖아.

이 노랜 곡 전체를 큰 원으로 생각하며 불러야해.

그렇지.

거기서 늘구고---

        .

        .

        .

 

혜리가 구해온 가사를 입에 익숙하게 붙이는데 만도 한참이 걸렸던 이 곡을 공부하느라 은하는 CD를 켜 놓고 반복해 가며 듣고 또 들었었다.  남의 노래를 열심히 듣고 내 노래를 녹음해서 들어 보는 것은 많은 도움이 되는 것 같았다.  정작 노래 부를 땐 그 노래에 취해 자신의 소리를 객관적으로 들을 수 없었기에 은하는 레슨 때 소형 녹음기를 가지고 다니기도 했고 집에서 자신의 노래를 녹음했다 들어 보곤 했다.  막상 녹음된 자신의 목소리를 듣노라면 어찌나 어색하고 쑥스러운지.  혼자서 들어도 괜히 이상해서 단점만 귀에 들리곤 했다.

 

 

너 집에서 꽤 연습 많이 했구나?

혜리가 대작인 봄의 소리 왈츠 후주를 마치고 나서 은하를 보았다.

 

그런 거 같니?

 

, 근데 너 진짜 드레스 준비해야겠다.

 

? 우리 컨서트 할거야?

지난 번 레슨 때에 곧 그녀에게 배우는 문하생들의 리사이틀을 열지도 모른다는 혜리의 말을 기억하며 은하가 되물었다.  은하의 눈이 반짝이고 있었다.

 

, 그럴까 해.

너 아마 좋아서 뛸걸 하는 말투로 혜리는 은하를 바라 보았다.

 

미미야----!

은하가 노래 부르는 내내 곁에 얌전히 앉아 턱을 카펫 위에 대고 있던 미미부터 큰 소리로 불렀다.

 

미미야!

은하는 미미를 번쩍 안아 위로 올려 두 손으로 받치고 몇 번을 빙글빙글 돌았다. 

나 데뷰한데 , 미미야.  으흐흐---

은하의 목소리는 들떠서 한껏 높아져 있었다.

 

그렇게 좋니?

혜리가 즐거워 하는 은하를 보다 말했다.

 

, 나 무슨 노래 부를까?

은하가 미미를 품에 안으며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글쎄 한 곡은 조금 경쾌하고 빠른 곡으로 또 한 곡은 서정적인것으로 하면 어때? 

있잖아,  네가 늘 부르고 다니는 것.  그 슬퍼서 죽겠다는 기차 노래.  너 그 노래 불러 보고 싶어 하지 않았어?

 

아니.  나 요즘 그 노래 안 불러.  나랑 안어울리거든.  후후.

 

그래? 그럼 다음 주 까지 몇 개 생각해와.  레슨 때 마다 연습하게.

 

 

 

은하의 대답을 제법 무덤덤하게 받아 들이던 혜리가 갑자기 그녀를 보며 그 동안 아무런 언급이 없던 태식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 그 사람이 다시 연습장에 나와서 해피 한거지?

직선적인 성격의 혜리가 농담조로 던지는 말에 은하의 볼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 붉으스름하게 상기되고 있었다.  맞아 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널 보면 소년 소녀의 소나기를 읽는 것 같아.  지금 우리 입장에서 누군가에 대해 감동할 수 있다는 것.  나 그거 높이 살게.  쉬운 일은 아니잖아.

 

제법 로맨틱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그녀에게 은하는 그렇게 생각해? 하다 갖고 있는 드레스를 구경시켜 달라고 했다.  난 다 오래된 것 뿐이야. 하며 이 층 매스터 베드룸에 은하를 데리고 가 클로젯을 열어 보여 준 혜리의 눈 부신 드레스들은 은하의 가슴을 설레이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  환상이다, 노 혜리.

 

스파클 장식이 화려한 녹색 드레스를 꺼내 들며 은하는 전신 거울인 클로젯 문 앞에서 자신의 몸에 대 보았다.  이것 저것 꺼내 보여 주며 언제 어떻게 입었었노라고 설명하던 혜리의 얼굴에 지나간 옛날에 대한 추억이 덩그러니  있음을 은하는 읽을 수 있었다. 

 

 

너 맞는 것 있으면 내것 입을래?

혜리는 그래도 좋잖아 하는 뜻으로 말했다. 

 

흐흐, 그래도 돼?

 

이번에는 은하가 눈웃음을 보냈다.

.

살짝 눈을 흘기며 별 걸 다 묻네 하는 식으로 혜리가 은하의 팔을 한 번 만졌다.

 

, 하긴 백화점에 가면 드레스 엄청 많더라.  여긴 고등학생들도 프롬에 갈 때 드레스 입고 결혼식에도 주빈들은 다 입으니까.

 

정말 웬 드레스들이 그렇게 많아?

 

 

언젠가는 드레스를 입고 무대에서 서려는 꿈을 꾸며 수시로 둘러 보던 백화점의 그 많던 드레스들을 떠올리며 은하는 혜리에게 말했다.  사실 은하는 일전에 한 백화점의 클리어런스 세일(최종 세일)이 있을 때 눈에 드는 드레스 한 벌을 사 놓은 것이 있었다.  언젠가 드레스를 입을 날이 있을 거야. 하며.  조촐한 검정색에 허리 부분에는 약간의 스파클이 반짝거리는 지나치게 파이지 않은 드레스라 부담없이 입을 수 있는. 그리고 화사한 색깔의 숄을 두르면 멋스러운.

 

 

몇 가지 드레스를 꺼내 연신 거울 앞에서 대 보던 은하에게 혜리는 차 마시고 갈래? 물어왔다.  오늘은 드레스 보다 레슨 종쳤네. 하며.

 

어쩌지? 나 곧 가봐야 해.

 

바쁜 일이야?

 

약속이야.

 

점심 약속이야?  누군지 나 한테만 얘기해 주면 안돼니?

 

그렇게 궁금하면 따라와라 뭐

 

은근히 궁금해 하는 혜리에게 …’ 하며 얼버무리는 대신 따라와서 확인해 하는 명쾌한 답을 내놓았다.

 

너 대충 얼버무리는 대신 당당한 태도를 취하겠다 이거지?  그래 좋다.  대답이 시원해서 봐 준다 뭐.

 

후후후.

 

, 떡 본김에 제사지낸다고 드레스에 협조하는 의미에서 나 그 동안 익힌 사소한(?) 무대 매너 하나 보여줄게.

 

은하는 오랫동안 연습해왔던 관중을 향한 무대에서의 절을 해 보였다.  우아하게 도도하게 자신만만한 태도를 취하며.

 

무대에선 넘치는 카리스마가 있어야겠지? 이렇게.  못말리는.

 

 

하하하

 

 

 

    

둘은 이 층에서 내려와 주황색 금잔화와 붉은 사루비아가 핀 혜리의 집 드라이브 웨이로 나왔다. 그것들은 혜리가 옛날 생각이 나 집 앞에 심은 것이라고 한 적이 있었다. 

 

혜리야, 생각나니? 꼭 고등학교때 같애.  그때 교정에 사루비아 많았잖아.

 

, 우리 그 사루비아 안에서 엄청 사진도 많이 찍었잖아.  그 사진들 다 어디에 있는지 몰라.

 

기억나?  우리가 사랑하게 될 남자는 어떤 사람일까 얘기 했던 것.

 

, 그랬었지?

 

 

 

 

그땐 이렇게 바다 건너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식을 만나 꼭꼭 숨겨야만 하는 사랑을 하게 될 줄은 몰랐었다.  아무도 모르게 그가 있는 버클리 언덕으로 가곤 하는 자신을 그땐 알 수가 없었다.  그를 만나는 설레임으로 가슴이 벌써 뛰어 오는 것을.

 

 

 

혜리야, 나 갈게.

 

은하는 웃음 지어 보이는 혜리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고는 그녀의 집이 있는 신규 주택 단지를 빠져나와 버클리로 향했다.  샌프란시스코가 보이는 그의 스튜디오에 가는 일은 매 주 반복되는 일이었지만 아직도 태식은 그녀에게 그리운 사람이었다.  그의 전부를 차지할 수 없는 제약 때문일까.  그의 아이를 낳고 평범한 결혼 생활을 했다해도 여전히 그는 내게 그리운 사람일까.  언젠가 혜리는 이렇게 말했었다.  환상이야.  살 맞대고 살면 다 그렇고 그럴걸.

 

 

환상이라도 좋아.  난 지금 그가 좋아…”

 

 

 

 

윤 태식

 

지금 당신 날 기다리고 있는 것 맞죠?

 

당신도 내가 그리운 것 맞죠?

 

왜 내 가슴이 이렇게 소녀처럼 콩콩거리는 거죠?

 

당신이 있는 그 언덕 위엔 늘 바람 줄기가 지나가곤 하죠.

 

일렁이며 지나다니는 바람을 맞다

 

난 어느새 당신과 나란히 창 가에 서 있죠.

 

언덕 아래 저 만치 아득하게 보이는 바다

 

그 너머 샌프란시스코

금문교

그리고 베이 브리지

 

 

내게 마음으로 전해져 오는 당신의 사랑

 

지금 당신 날 기다리고 있는 것 맞죠? 

 

난 당신이 있는 그 언덕으로 가고 있다구요.

 

 

 

 

   

그도 계단을 오르는 내 발자국 소리에 특별한 느낌을 갖곤 하는 것일까?

 

집 안에서도 발자국 소리가 다 들리는지 노크가 없어도 그는 자주 문을 열어주곤 했었다.

 

 

 

그에게 말해야지.  드디어 노래를 하게 되었다고.  그는 함께 기뻐해 줄거야.

 

은하는 작은 미소를 지으며 백뮤러를 한 번 보았다.  투명한 갈색의 선글라스 너머 연옥색빛 아이샤도우의 웃음 짓고 있는 고운 눈매가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