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덕 위의 만남
“얘, 이 곡은 6/8 박자 왈츠야. 그러니까 쿵작작 쿵작작 리듬을 타고 경쾌하게 불러.”
혜리가 피아노 반주를 다시 시작하며 ‘쿵작작 쿵작작’ 을 강조했다. 삼각형 모양을
손으로 그려 가며. 피아노 반주만으로도 유럽 귀족들의 화려한 무도회를 상상할 수 있는 요한 슈트라우스의 봄의 소리 왈츠. 은하는 전주만으로도 벌써 웅장하고 벅찬 감동이 밀려 오는 곡을 맞을 준비를 하느라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노래했다. 이런 대작을 과연 잘 소화해 낼 수 있을까 염려하던 은하에게 노래 중간 중간에 훈수를 불어 넣어주는 혜리 덕에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고나 할까.
“바운스를 해야지. ‘따란 따란’ 하는 작은 장식이 많은 곡이잖아.”
“이 노랜 곡 전체를 큰 원으로 생각하며 불러야해.”
“그렇지.”
“거기서 늘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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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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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리가 구해온 가사를 입에 익숙하게 붙이는데 만도 한참이 걸렸던 이 곡을 공부하느라 은하는 CD를 켜 놓고 반복해 가며 듣고 또 들었었다. 남의 노래를 열심히 듣고 내 노래를 녹음해서 들어 보는 것은 많은 도움이 되는 것 같았다. 정작 노래 부를 땐 그 노래에 취해 자신의 소리를 객관적으로 들을 수 없었기에 은하는 레슨 때 소형 녹음기를 가지고 다니기도 했고 집에서 자신의 노래를 녹음했다 들어 보곤 했다. 막상 녹음된 자신의 목소리를 듣노라면 어찌나 어색하고 쑥스러운지. 혼자서 들어도 괜히 이상해서 단점만 귀에 들리곤 했다.
“너 집에서 꽤 연습 많이 했구나?”
혜리가 대작인 봄의 소리 왈츠 후주를 마치고 나서 은하를 보았다.
“그런 거 같니?”
“응, 근데 너 진짜 드레스 준비해야겠다.”
“왜? 우리 컨서트 할거야?”
지난 번 레슨 때에 곧 그녀에게 배우는 문하생들의 리사이틀을 열지도 모른다는 혜리의 말을 기억하며 은하가 되물었다. 은하의 눈이 반짝이고 있었다.
“음, 그럴까 해.”
너 아마 좋아서 뛸걸 하는 말투로 혜리는 은하를 바라 보았다.
“미미야----!”
은하가 노래 부르는 내내 곁에 얌전히 앉아 턱을 카펫 위에 대고 있던 미미부터 큰 소리로 불렀다.
“미미야!”
은하는 미미를 번쩍 안아 위로 올려 두 손으로 받치고 몇 번을 빙글빙글 돌았다.
“나 데뷰한데 , 미미야. 으흐흐---”
은하의 목소리는 들떠서 한껏 높아져 있었다.
“그렇게 좋니?”
혜리가 즐거워 하는 은하를 보다 말했다.
“얘, 나 무슨 노래 부를까?”
은하가 미미를 품에 안으며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글쎄… 한 곡은 조금 경쾌하고 빠른 곡으로 또 한 곡은 서정적인것으로 하면 어때?
“있잖아, 네가 늘 부르고 다니는 것. 그 슬퍼서 죽겠다는 기차 노래. 너 그 노래 불러 보고 싶어 하지 않았어?”
“아니. 나 요즘 그 노래 안 불러. 나랑 안어울리거든. 후후.”
“그래? 그럼 다음 주 까지 몇 개 생각해와. 레슨 때 마다 연습하게.”
은하의 대답을 제법 무덤덤하게 받아 들이던 혜리가 갑자기 그녀를 보며 그 동안 아무런 언급이 없던 태식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너, 그 사람이 다시 연습장에 나와서 해피 한거지?”
직선적인 성격의 혜리가 농담조로 던지는 말에 은하의 볼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 붉으스름하게 상기되고 있었다. ‘맞아’ 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널 보면 소년 소녀의 소나기를 읽는 것 같아. 지금 우리 입장에서 누군가에 대해 감동할 수 있다는 것. 나 그거 높이 살게. 쉬운 일은 아니잖아.”
제법 로맨틱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그녀에게 은하는 “그렇게 생각해?” 하다 갖고 있는 드레스를 구경시켜 달라고 했다. “난 다 오래된 것 뿐이야.” 하며 이 층 매스터 베드룸에 은하를 데리고 가 클로젯을 열어 보여 준 혜리의 눈 부신 드레스들은 은하의 가슴을 설레이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야-- 환상이다, 노 혜리.”
스파클 장식이 화려한 녹색 드레스를 꺼내 들며 은하는 전신 거울인 클로젯 문 앞에서 자신의 몸에 대 보았다. 이것 저것 꺼내 보여 주며 언제 어떻게 입었었노라고 설명하던 혜리의 얼굴에 지나간 옛날에 대한 추억이 덩그러니 있음을 은하는 읽을 수 있었다.
“너 맞는 것 있으면 내것 입을래?”
혜리는 ‘그래도 좋잖아’ 하는 뜻으로 말했다.
“흐흐, 그래도 돼?”
이번에는 은하가 눈웃음을 보냈다.
“얜.”
살짝 눈을 흘기며 ‘별 걸 다 묻네’ 하는 식으로 혜리가 은하의 팔을 한 번 만졌다.
“얘, 하긴 백화점에 가면 드레스 엄청 많더라. 여긴 고등학생들도 프롬에 갈 때 드레스 입고 결혼식에도 주빈들은 다 입으니까.”
“정말 웬 드레스들이 그렇게 많아?”
언젠가는 드레스를 입고 무대에서 서려는 꿈을 꾸며 수시로 둘러 보던 백화점의 그 많던 드레스들을 떠올리며 은하는 혜리에게 말했다. 사실 은하는 일전에 한 백화점의 클리어런스 세일(최종 세일)이 있을 때 눈에 드는 드레스 한 벌을 사 놓은 것이 있었다. “언젠가 드레스를 입을 날이 있을 거야.” 하며. 조촐한 검정색에 허리 부분에는 약간의 스파클이 반짝거리는… 지나치게 파이지 않은 드레스라 부담없이 입을 수 있는. 그리고 화사한 색깔의 숄을 두르면 멋스러운.
몇 가지 드레스를 꺼내 연신 거울 앞에서 대 보던 은하에게 혜리는 “차 마시고 갈래?” 물어왔다. “오늘은 드레스 보다 레슨 종쳤네.” 하며.
“어쩌지? 나 곧 가봐야 해.”
“바쁜 일이야?”
“약속이야.”
“점심 약속이야? 누군지 나 한테만 얘기해 주면 안돼니?”
“그렇게 궁금하면 따라와라 뭐”
은근히 궁금해 하는 혜리에게 ‘저…’ 하며 얼버무리는 대신 ‘따라와서 확인해’ 하는 명쾌한 답을 내놓았다.
“너 대충 얼버무리는 대신 당당한 태도를 취하겠다 이거지? 그래 좋다. 대답이 시원해서 봐 준다 뭐.”
“후후후.”
“얘, 떡 본김에 제사지낸다고 드레스에 협조하는 의미에서 나 그 동안 익힌 사소한(?) 무대 매너 하나 보여줄게.”
은하는 오랫동안 연습해왔던 관중을 향한 무대에서의 절을 해 보였다. 우아하게 도도하게 자신만만한 태도를 취하며.
“무대에선 넘치는 카리스마가 있어야겠지? 이렇게. 못말리는.”
“하하하”
둘은 이 층에서 내려와 주황색 금잔화와 붉은 사루비아가 핀 혜리의 집 드라이브 웨이로 나왔다. 그것들은 혜리가 옛날 생각이 나 집 앞에 심은 것이라고 한 적이 있었다.
“혜리야, 생각나니? 꼭 고등학교때 같애. 그때 교정에 사루비아 많았잖아.”
“얘, 우리 그 사루비아 안에서 엄청 사진도 많이 찍었잖아. 그 사진들 다 어디에 있는지 몰라.”
“기억나? 우리가 사랑하게 될 남자는 어떤 사람일까 얘기 했던 것.”
“응, 그랬었지?”
그땐 이렇게 바다 건너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식을 만나 꼭꼭 숨겨야만 하는 사랑을 하게 될 줄은 몰랐었다. 아무도 모르게 그가 있는 버클리 언덕으로 가곤 하는 자신을 그땐 알 수가 없었다. 그를 만나는 설레임으로 가슴이 벌써 뛰어 오는 것을.
“혜리야, 나 갈게.”
은하는 웃음 지어 보이는 혜리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고는 그녀의 집이 있는 신규 주택 단지를 빠져나와 버클리로 향했다. 샌프란시스코가 보이는 그의 스튜디오에 가는 일은 매 주 반복되는 일이었지만 아직도 태식은 그녀에게 그리운 사람이었다. 그의 전부를 차지할 수 없는 제약 때문일까. 그의 아이를 낳고 평범한 결혼 생활을 했다해도 여전히 그는 내게 그리운 사람일까. 언젠가 혜리는 이렇게 말했었다. “환상이야. 살 맞대고 살면 다 그렇고 그럴걸.”
“환상이라도 좋아. 난 지금 그가 좋아…”
윤 태식
지금 당신 날 기다리고 있는 것 맞죠?
당신도 내가 그리운 것 맞죠?
왜 내 가슴이 이렇게 소녀처럼 콩콩거리는 거죠?
당신이 있는 그 언덕 위엔 늘 바람 줄기가 지나가곤 하죠.
일렁이며 지나다니는 바람을 맞다
난 어느새 당신과 나란히 창 가에 서 있죠.
언덕 아래 저 만치 아득하게 보이는 바다
그 너머 샌프란시스코
금문교
그리고 베이 브리지
내게 마음으로 전해져 오는 당신의 사랑
지금 당신 날 기다리고 있는 것 맞죠?
난 당신이 있는 그 언덕으로 가고 있다구요.
그도 계단을 오르는 내 발자국 소리에 특별한 느낌을 갖곤 하는 것일까?
집 안에서도 발자국 소리가 다 들리는지 노크가 없어도 그는 자주 문을 열어주곤 했었다.
“그에게 말해야지. 드디어 노래를 하게 되었다고. 그는 함께 기뻐해 줄거야.”
은하는 작은 미소를 지으며 백뮤러를 한 번 보았다. 투명한 갈색의 선글라스 너머 연옥색빛 아이샤도우의 웃음 짓고 있는 고운 눈매가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