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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지된 만남


BY 애니 2006-01-25

금지된 만남

 

 

 

 

은하와 태식의 만남이 깊어 가듯 노던 캘리포니아의 가을도 점점 짙어가고 있었다. 

 

인디언 서머라 불리는 늦더위가 물러 갈 때 즈음 어김없이 가을은 찾아 왔고 메마른 여름에 지친 나뭇잎들이 물기 없이 건조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사계절의 구분이 그리 뚜렷 지는 않은 캘리포니아였지만 더러 붉고 노란 가로수들이 눈에 띠는 것을 보면 그래도 가을은 가을인가 보다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러다 겨울이면 흐리고 비오는 날이 많아지는 우기가 오겠지.  지난 겨울처럼.

 

태식을 만나는 은하의 일상은 이어졌고 그럼에도 변함없이 정아의 엄마로서 충실했다.  혜리에게 받는 성악 레슨도 연습장에서의 운동도 여전히 은하의 생활이었다.  일 주일에 한 번 학교 강의실에 나가 앉아 있는 것도 그랬고. 

 

이제 얼마 후면 한국으로 돌아갈 날이 올 거야.  그도 가야 하겠지.

 

계획했던 시간 일 년이 거의 지나가고 있었다.  태식도 마찬가지였고.  정아가 새학기를 시작하는 3월이 되기 전에 귀국해야 했다.  그 역시 새 학기 3월 전에 Y대로 돌아가야 했고.  1년 기한으로 나온 비지팅 스칼라(객원 연구원) 생활을 마감하는 연구 논문 준비에 바쁜 일상을 보내는 태식을 은하는 일 주일에 한 번씩 만났다.  매주 같은 날에.  더러 서로 시간이 있고 보고 싶을 때면 전화해서 만나는 날도 있었다.  그를 만나도 되는가 하는 마음 속의 갈등 같은 것은, 특히 정훈에게서 전화를 받았다거나 할 때 흔들리는, 그를 볼 때면 어느새 사라지고 마는 미미한 존재가 되어 가고 있었다. 

 

 

우리 포도 나무 천지인 나파 포도밭에 갑시다.  와인도 시음하고.

요세미티 국립공원 구경이나 하고 오죠.

킹즈 케년 계곡의 냇물이 우릴 불러요.

해프 문 베이 어때요?

 

미국을 접수하겠다는 조 교수의 벤을 타고 함께 주변 구경도 다녔지만 은하와 태식의 사이를 눈치채지는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은하는 태식의 창 가에 놓아 둔 넓다란 소파에 누워 창 밖을 바라보는 날이 많아졌다.  파란 도화지 같은 하늘에 뭉개 구름도 뭉쳤다 풀리고 오래된 전기 줄에 작은 새들이 날아 앉아 있기도 했다.  어떤 때는 오후 내내 먹구름이 머리에 닿을 듯 내려 앉아 있다가 그대로 밤이 오기도 했다.  맑은 날이라 해도 흐린 구름 같은 바다 안개가 다리 위로 솟은 금문교 아치의 허리 즈음을 감싸고 돌다 슬며시 바람 따라 없어지는 곳.  그러다 어둠이 내리면별이 뜨기도 했고.  달이 지고 다시 차고 만을 끼고 있는 베이 지역이라 흐리고 낮 안개 끼는 날은 정말 많았다.  아무리 햇볕 짱짱한 여름날이라 할지라도 그늘 밑 부는 바람이 서늘한 언덕이었으니.

 

태식이 일(연구)하는 동안  언제나 그 자리에 그림처럼 남아있는 멀리 샌프란시스코 시내와 금문교, 베이 브리지를 바라 보다 은하는 어려운 노래가사를 외우기도 하고 책을 보기도, 그가 구독하고 있는 신문을 읽기도 했다. 매 달 써 내야 하는 아파트의 빌(청구서)들을 체크에 쓰기도 하면서.

 

여기서 보면 구름도 바다도 황혼도 시시각각 그 모양과 색깔을 달리하고 있어요.  같은 적은 한 번도 없네요.  황혼빛이 어떤 때는 층을 이룬 퇴적암처럼 색색이 얇게 한 줄씩 쌓여 있더라구요.  옅은 오렌지색, 연분홍색, 연보라색, 그리고 그 위에 회색…”

은하는 태식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바다도 가끔씩 두 가지 색을 내는 것 알아요?  저기 봐요.  앞은 짙은 코발트색 그 뒤는 옅은 쑥색.  그죠? 

 

 

둘은 매주 수요일이면 어김없이 만나 함께 수제비며 찌개도 끓여 먹고 숙제도 하고 비디오, CD도 빌려 보고 산책도 하고 이런 저런 웹 사이트에 들어가 킬킬대며 웃기도 하면서 오후를 함께 보내곤 했다.  한 번은 개인의 가치를 돈으로 계산해 주는 사이트에 들어 갔다가 은하가 70만불이라는 계산이 나오자 둘은 웃었다.

 

 

태식의 학회가 있어 유럽의 동화 마을 같은 까멜(몬트레이 반도에 있는 예쁜 마을, 배우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한때 시장으로 있었던)에 함께 드라이브 해 갔다 왔었고 샌프란시스코 시내를 지나 다니다 멀리서만 보아 오던, 소방수의 호스 모양을 본 떠 올린 코잇 타워에도 끙끙거리며 돌 계단을 올라 갔었다. 아래에서 부터 탑이 서 있는 언덕 끝까지.(이 때 둘은 헉헉 한 운동했었다.) 

 

 또 샌프란시스코의 얼굴 사진처럼 엽서에 등장하는 그 자리- 빅토리안 스타일의 고풍스런 집들이 늘어 선 뒷편으로 보이는 현대식 고층 빌딩이 같이 나오는- 에도 함께 서 보았었다.(엽서에 나오는 바로 그 자리라는 것에 묘한 통쾌함을 느끼며.)  시월의 어느 수요일, 하늘거리는 들꽃들 너머 오렌지 나무들이 줄지어 늘어선 교외로 나갔다가 사이프러스 나무 그늘 밑에서 페스트라미 샌드위치를 나누어 먹을 때의 행복함이란  이대로 시간이 정지해 준다면

  

두 사람이 가끔 가는 버클리 동네의 드라이클리닝 가게 중국계 아주머니는 함께 다니는 둘을 부부 사이로 보았는지 아주 잘 어울리는 커플이라며 한국 사람이냐고 물어 왔었다. 

 

 

 

그와 함께 있는 수요일 오후는 어찌나 빠르게 지나가는지 은하가 아파트로 돌아가야 하는 시간은 쉽게 돌아오곤 했다.  마치 젊은 연인들의 감질나는 짧은 데이트 처럼.

 

 

벌써 갈 시간이야?

은하가 아쉬움에 그렇게 말하면 그는 시간 빠르죠? 하곤 했다.

 

어쩌죠? 나 가기 싫다.

은하는 이 말을 습관처럼 남기고 뒤돌아서곤 했다.  그럴 때면 태식은 어서 가요. 짧은 한 마디로 은하를 재촉해서 돌려 보냈다.  늦은 저녁 시간까지 엄마 없이 혼자 있을 정아를 배려해 주는 그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떤 때는 서운하게 들리는 적도 있을 만큼. 

 

 

그의 스튜디오를 떠나 아파트로 가려면 한 삼십 분쯤 운전을 해야 했지만 그 시간은 잠깐이었다.  정아가 있는 아파트로 들어 오기 전 그녀는 지붕이 달린 주차장에 차를 주차한 후 노란 불빛 가로등 아래서 태식에게 전화하곤 했다. 

 

나 잘 왔어요.

전화를 걸면 그는 언제나 같은 대답을 보내 주었다.

잘 자요.

얄밉도록 침착하고 편안한 목소리로.

 

그의 목소리를 듣고 난 후 키 큰 야자수가 몇 그루 우뚝 선 밤 하늘을 올려다 보면 마치 별도 달도 구름도 안녕, 잘 자. 하며 은하를 향해 미소지으며 손짓해 주는 것 같았다.

 

 

—“

밤 공기를 가르는 싸늘한 바람을 맞다 아파트로 들어 왔을 때 정아는 제 방에서 컴퓨터 앞에 앉아 열중일 때가 많았다. 

 

엄마 왔어?

 

일 주일에 한 번 늦게 오는 엄마에 대해 별 불만이 없는 정아에게 미안할 때가 있곤 했지만 그녀는 되도록 당당해지려고 했다.

 

정아와는 상관 없는 내 생활일 뿐이야.

이렇게 생각하려 애를 썼다.  아니 그렇게 스스로를 정당화 시키려 했다.

 

그래도 정아를 챙겨준 뒤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 때면 그녀는 마음 속으로 기도했다.  전 어떻게 해야 하는 거죠? 라고.  그를 만나기 전으로 사랑하기 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