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동안의 격정이 씻은 듯 멈추고 태식이 쓰러지다 시피 침대 위로 등을 대고 누웠을 때 둘 다 말이 없었다. 깜깜한 공간에 벌거벗은 두 사람의 얕은 숨소리만 들려오고 있었다.
잠시 후 그를 보며 은하가 모로 누우며 물었다.
“왜 전화 안 했어요?”
“…”
“아이, 말 안 하기로 했어요?”
“…”
“아이, 뭐예요?”
태식의 벗은 가슴 위에 손을 얹어 쓸어 내리는 은하의 보채는 듯한 독촉에 태식은 입을 열었다.
“…잊어 보려고 했어요…”
“…”
“…은하에게 난 아무것도 해 줄 것이 없는 놈이란 걸 알았거든.”
“…”
“그리고 그 날 레스토랑에서 정아를 보는 순간 내가 은하를 만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또 만나면 나쁜 놈이다… 이런 생각.”
“그런데 왜 날 데리고 들어왔죠?”
은하가 얼굴을 그의 가슴 위에 대며 부드러운 음성으로 물었다.
“… 그 쪽을 보면 그런 내 마음이 무너져… 아무도 막을 수 없는… 그런 거.”
“…당신 나쁜 사람 아니야. 나 지금 이대로 이 순간 행복해.”
은하가 태식의 가슴에 얼굴을 댄 채 말했다. 그리고는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나… 그 쪽한테 바라는 것 없어요. 나도 알아요. 현실을. 매달리면서 나 책임져 달라고 안 그럴게. 나 그렇게 못난 여자 아니야.”
여기 까지 자못 심각한 어조로 말하던 은하의 어조가 밝아지며 그녀는 불꽃 놀이 이야기를 꺼냈다.
“그런데 아까 불꽃놀이 봤어요?”
“네.”
“환상이었죠?”
“네. 예뻤어요. 누구처럼…”
태식이 은하의 머리카락을 한 손으로 쓰다듬어 내렸다.
“피— 그런데 그렇게 거칠고 난폭해요?”
“허허, 미안해요.”
“됐어요. 그리고… 참, 생일날은 잘 보냈어요?”
그의 와이프와 함께 보낸 것을 알면서 은하가 물었다.
“네… 와이프에게 미안했죠.”
그는 은하에게 솔직한 심정을 털어 놓았다. 숨기는 것 보다는 오히려 솔직한 것이 더 듣기 나았다. 은하 자신도 정훈을 생각하면 미안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정아는 엄마 닮았어요.”
은하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다 태식이 처음 보았던 정아 얘기를 꺼냈다.
“흐흐, 그래요? 근데 그거 칭찬이에요, 아니에요?”
“칭찬으로 접수해요.”
“흐흐, 네. 그런데 아까 술 했어요?”
“술 냄새 났어요?”
“조금이요.”
“네, 조금 했어요. 요 아래서.”
“누구하고 했는지 알아도 돼요?”
“…혼자서요.”
“네? 혼자요?”
“네.”
“무슨 생각 했어요? 혼자 술 하면서.”
“음, 알아 맞춰 봐요.”
“아이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음… 모르겠다.”
정말 모르겠다며 무슨 생각 했는지 말해 달라는 은하에게 그는 예상치 못했던 질문을 던졌다.
“정아 아빠는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요.”
“…알고 싶어요?”
“그냥 궁금해요. 조 교수님 말씀으로는 야망이 많은 친구라고 하던데… ”
둘이 몸까지 섞어 놓고도 서로의 배우자나 가정 생활에 대해 이렇다 할 이야기를 나누어 본 적은 없는 것 같았다. 의도적으로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두 사람의 만남 자체에 포커스를 맞추었을 뿐 둘을 감싸고 있는 주변 환경에 대해서는 되도록 잊고 싶었을 것이다.
“네, 맞아요… 조 교수님이 잘 보신 거예요. 그 사람.”
은하의 목소리가 약간 쓸쓸해지려 하다 다시 밝아졌다.
“그 사람은 내 첫 남자였고요.
‘첫 남자’라는 말에 태식이 킥킥대며 웃었다.
“요즘도 그런 말 쓰나요?”
“왜 웃어요? 지금 심각한데.”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있던 은하가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안 웃을게요. 계속해봐요.”
그가 일부러 웃음을 멈추었다.
“그런데요?’
태식이 궁금해했다.
“그런데 이렇게 두 번째 남자가 생겼어요. 어쩌죠?”
은하가 어둠 속에서 일어나 앉는 척 하다 누워있는 태식 위에 몸을 포갰다.
“허어, 간지러워요.”
태식이 은하의 머리카락을 뒤로 모아 쥐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은하가 태식의 어깨 위에 얼굴을 묻고 정훈의 이야기를 계속했다.
“근데… 그 사람은요… 스스로 너무 대단해서 내가 필요치 않은 것 같아요.”
“나… 그렇게 매력 없는 여자 같아요?”
은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
“말해봐요 ,어서. 뭐라고 안 할게.”
“아니오.”
“정말이죠?”
은하가 고개를 들어 태식을 다시 보았다.
“네.”
“아이, 엉터리. 무슨 대답이 그렇게 짧아요? 네, 아니오 밖에 모르는 ㅅㅏ람 같아요.”
“아닌데.”
흐흐흐 둘이 함께 웃었다.
은하는 알고 있었다. 태식이 굳이 말하지 않았어도 그녀를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그것은 두 사람만의 교감 같은 것으로 가만히 있어도 가슴을 벅차게 만들었고 먹지 않아도 배 부르게 하는 힘이 있었다.
“그런데 언제부터 여기서 기다렸어요? 오래 됐어요?”
태식이 한 팔을 접어 머리 밑으로 대며 물었다.
“해질녘부터니까 한 두어 시간 됐나 봐요. 오늘 강의도 없다고 알고 있는데 왜 안올까 궁금했어요. 혼자서 술 마시는지는 몰랐어요.”
“낮에 실리콘 벨리에서 벤처하는 한국 사람들과 세미나가 있었어요. 그래서 조 교수님 하고 몇 분 같이 저녁 하고 오다 들렸어요.”
“혼자서 무슨 생각 했는지 이제 물어봐도 돼요? 음… 서울생각 했어요?”
은하는 서울에 있는 그의 두 아이들과 와이프를 서울 생각이라 함축해서 말했다.
“아니오…”
“그럼 혹시 내 생각 한건 아니죠?”
은하가 반신반의하며 농담하듯 물었다.
“…그 쪽 생각했어요, 나. 그 쪽 하고 아주 옛날에 만났으면 어땠을까, 그런 생각.”
“그럼 15년 전쯤?”
“벌써 그런가요?”
“네.”
“우리 그때 만났어도 이랬을까요?”
“이런 게 뭔데요?”
은하가 장난스레 물었다.
“모르면 가르쳐줘요?”
태식도 장난기가 동했는지 그의 위에 올라와 있던 은하를 밀어내려 그가 은하 위에 올라왔다.
“아아--- 무거워요. 숨막히니까 내려가요. 우린 아마 엄청 사귀었을 거예요.”
은하는 ‘내가 답을 다 알아요’ 하는 식으로 태식을 장난치듯 소리 치며 밀어 내렸다.
“나 그 쪽이 다니던 학교에도 자주 갔단 말이에요. 서클 모임이 가끔씩 있었거든요. 봄엔 목련이 하얗게 예뻤는데… 그때 나 못 봤어요? 어머, 맞아요. 그 쪽 전자 공학과 나왔다고 했죠?”
“네.”
은하가 뭔가 이제야 생각났다는 말투로 태식 옆으로 돌아 누워 시트를 덮은 채 팔을 머리에 괬다.
“그 때 서클 선배가 그 쪽하고 같은 과였었을 거예요. 김 기용이라고.”
“기용이를 알아요?”
태식도 의외라는 듯 은하를 보았다. 그리고는 ‘불켜요’ 하며 누운 채 머리맡의 스탠드를 켰다. 희미한 불빛이었지만 어둠 속에 있던 두 사람에게는 눈 부신 빛이었다.
‘아—눈부시다.”
은하가 손으로 눈을 가리며 “기용 선배 아는 사람이에요?” 반문했다.
“알다 뿐인가요? 고등학교 대학교를 같이 다녔는데. 지금 특허 변리사로 잘 나가죠. 오기 전에도 송별회 겸 동창회로 만났었어요.”
“어머, 정말이요? 진짜 우습네요. 내 친구가 기용 선배랑 결혼했다는 거 아니에요.”
은하의 음성이 신기하다는 듯 높아졌다.
“그랬어요?”
“그러니까 은하씨 친구가 기용이 와이프인 거예요?”
“네에.”
대답하는 은하의 목소리가 더 높아지고 있었다.
“키가 좀 크고 쌍커풀 진 눈이 부리부리한 김 기용 맞죠?”
은하가 과거 기용의 모습을 떠올리며 다시 한 번 확인했다.
“네. 그 친구 미남이죠.”
“어머 세상 참 좁다. 아무튼 한 다리 건너면 다 아는 사람이라니까요.”
“맞아요. 기용이 그때 서클 활동 열심히 했었어요. 그 친구 다방면으로 재주가 많아서 한시도 가만히 있지를 못했죠. 별명이 마당발이었거든.”
“그럼 혹시 기용선배 와이프도 봤어요? 이름이 강 현정인데.”
“네, 결혼식에서 보고 그 뒤에 몇 번 더 만난 적이 있어요.”
“네? 그 쪽 그럼, 결혼식 거기에 왔었어요? 어느 교회였었는데.”
“은하씨 거기 왔었어요?”
“어머, 그럼 우리 거기서 부딪힌 사이? 너무 신기하다. 그럼 사진 찍었어요? 신랑 신부 친구들 찍는 것?”
은하가 상기된 표정으로 일어나 앉으며 시트를 끌어다 가슴 위 까지 가렸다.
“그랬을 걸요. 그 쪽도?”
“네, 나중에 친구가 보여 주었는걸요. 어떻게 나왔는지. 나 거기 있는 건 분명해요. 후후 우습다. 그 사진 안에 우리 둘 다 있는 거죠? 그러니까.”
“허허 그 사진 구해서 한 번 봐야겠는걸요?”
“나도요. 얼마나 웃길까?”
“난 그때 병역 특례자 훈련 갔다 온 걸로 기억하는데… 기용이도 같이 갔었거든요.”
“흐흐 그럼 더 우습겠다. 그땐 어떤 모습이었는지 보고 싶네요.”
은하가 일어나 벗어 놓은 옷으로 반쯤 몸을 가리고 욕실로 향하며 말했다.
“미남이었죠.” 태식이 빙글빙글 웃으며 농담을 하자 은하가 태식을 향해 ‘글쎄요’ 하는 뜻으로 고개를 한 번 갸우뚱해 보이고서 욕실로 들어갔다.
사실 태식은 미남이라고 까지 할 수는 없는 평범에 가까운 외모였지만 남자의 느낌이
묻어나는 만큼 어느 정도 남성진 외모의 소유자였다. 스포츠를 좋아한다든가 과묵한
편에 속하는 것, 대체로 느긋하고 감정 흐름이 간결한 점 등이 은하가 본 그의 성격이
었다. 은하처럼 괜히 어디에 가고 싶다든가 뭐가 갑자기 먹고 싶다든가 옛날 생각이
난다든가 뭐가 너무 예뻐서 한참 바라본다든가 하는 등의 즉흥적인 변화가 그에겐 거의 없었다.
골프 연습장에서 은하가 연습 샷을 망치고 난 후 다가간 벤치에서 기대 앉은 그를 처
음 보았을 때 그는 평범한 외모의 남자였다. 눈에 띨 것도 튀는 것도 없는. 그러나 그
의 침착함과 따뜻해 뵈는 눈빛이 보기 좋았었다. 그를 만나면서 은하를 감싸 주고 지
켜주는 편안함에 은하는 차츰 그의 곁으로 가까이 갔었다. 그리고 이젠 그의 여자가
되었다. 얼만큼 더 그의 옆에 머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아니 그런 생각은 지금 않기로 했지만.
은하가 욕실에서 머리를 매만지고 단정히 옷을 갖춰 입고 나왔을 때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가 샤워를 했다. 깔끔히 씻고 나온 그의 모습은 상큼해 보였다.
“흐흐, 지금 보니까 미남인 것 같네요. 그 쪽. 아까는 미안했어요.”
“하하.”
태식이 웃었다. 그 말이 외교적 발언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듯.
은하가 태식의 목에 팔을 감으며 다정한 눈길을 보냈다. 이젠 가야 할 시간이 되었음을 알리는.
“우리 먼 훗날 지금 이 기억들을 생각하며 웃을 수 있을까요?”
“…네. 웃을 거예요.”
그는 편안한 얼굴로 대답했다.
“고마워요. 날 예쁘게 봐줘서.”
“…?”
“나도… 한 남자에게 일방적인 사랑 받을 수 있는 여자란 것을 이제야 알았거든요. 조건 없는…”
“… 어쩌죠?… 조건이 있는데.”
“…?”
진지한 표정의 은하를 보는 그의 눈이 장난스러워졌다. 그리고는 ‘이렇게요’ 하며 은하의 입술에 그의 입술이 닿아왔다. 음미하듯 다시 은하의 입술을 열고 있는 그는 마치 악기 주자와 같이 섬세하고 감미로웠다. 오래 전에 캠퍼스에서 어쩌면 지나쳤을지도 모르는 그녀, 남의 여자인 그녀의 일부만이라도 지금 그에게 남겨두려는 것처럼.
그의 숨소리가 은하의 귓전에 느껴질 때 멀리서 사이렌 울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오고 있었다.(*사실 은하와 태식은 오래 전, 그러니까 대학생이었을 때 태식의 학교 교문에서 부터 학교로 들어가는 긴 길에서 태식이 은하의 옆을 지나쳐 지나간 적이 있었다. 둘은 그 사실을 모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