닿을 수 없는 그대
“얘, 은하야. 왜 그 사람 요즈음 안 보이니?”
“누구?”
“모른척 하기는…”
운전을 하다 혜리가 옆에 앉은 은하를 갈색이 옅은 선글라스 너머로 보았다.
“누구? 누군지 말해봐. 그래야 대답을 하지.”
“있잖아. 네가 관심 있는 사람 말이야. 오늘도 연습장에 안 나왔잖아. 벌써 몇 주
니?”
터널을 지나 은하의 아파트로 향한 차 안에서 혜리는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너 정말 몰라? 안 만났어?”
“얜, 말했잖아. 나도 그 레스토랑에서 본게 마지막이야.”
혜리가 눈을 가늘게 뜨고 은하를 보았다.
“노 혜리, 괜한 공상 말고 운전이나 잘 해. 새로 뽑은 비싼 차 깨질라.”
“정말 와이프한테 끌려서 서울로 갔나? 아닌데… 세희가 공항에 나갔었는데 분명히
송 교수 혼자 출국 했다던데… ”
“그렇게 궁금하면 전화해서 물어 봐라 뭐. 왜 연습장에 안 나오시는데요 하고.”
“얘, 매 번 레슨에 나오던 사람이 왜 와이프 왔다 간 뒤로 안나오느냐구? 이건 증발이야. 증발.”
태식의 와이프 송 교수가 가고 난 후 몇 주가 지나도록 태식에게서는 정말 소식이 없었다. 골프 연습장에도 통 얼굴을 보이지 않자 조 교수는 “이 친구 마누라 따라서 한국 갔나?” 했었다. 혹시나 이 메일을 보냈을까 은하는 컴퓨터 앞에 앉을 때 마다 열어 보았지만 그에게서 온 것은 없었다. 은하는 그에게 전화 해 볼까 했지만 본의 아니게 와이프와 은하를 동시에 마주치게 했던 혼란스러움을 정리하려면 그에게도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 계속 미루어 왔었다.
“얘, 벌써 다 왔다.”
“그러게. 트렁크 좀 열어줄래? 채 꺼내 가야지.”
“참 열어줘야지?”
혜리가 운전석 아래 버튼을 눌러 뒤 트렁크를 열었다. 은하는 혜리의 벤츠에서 내려 트렁크의 골프 클럽들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차 안의 혜리에게 “들어왔다 갈래?” 했다.
“나 준이 데리러 가야해. 갈께.”
“어— 그렇지? 잘 가. 벤츠 고마웠어.”
은하가 눈을 한 번 찡긋했다.
혜리는 인사는 무슨… 하는 의미로 “치—“ 하더니 이내 흰색 벤츠 E 클라스를 몰고 사라졌다.
아파트 앞에 내려서자 은하는 태식의 안부가 정말 궁금해졌다.
“무슨 일이기에 연락이 없는 것일까.
혹시 송 교수가 우리 사이를 눈치 챈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내가 부담스러워 진 것일까.
그것도 아니면 몸이 아픈 걸까.”
은하는 긴 줄이 달린 키를 바지 주머니에서 꺼내 아파트 문을 열고 들어가자 나갈 때 깜빡 잊고 식탁 위에 두고 나간 휴대폰을 집었다.
2 missed calls (받지 못한 전화)
그 사이에 두 번 전화가 왔었다면 혹시 태식인가 싶어 은하는 전화 번호를 확인했다.
415-875-6597
영아였다.
“작은 엄마, 저 영아예요. 기숙사에서는 잘 지내고 있어요. 음식도 먹을만 하구요. 시내라 다 가까워서 좋아요. 일본인 룸메이트는 꽤 착해요. 학원에는 일본애들이 많은데 쓸만한 남자애가 없네요. 흐흐. 궁금하실 것 같아 전화 드렸어요. 또 할께요.”
“흠, 잘 있다니 다행인걸.”
패스 워드를 입력하고 영아가 남긴 메시지를 확인한 은하는 은근히 태식이기를 바랬던 마음이었는데 그가 아니어서 조금은 허전한 마음이었다.
“보고싶어…”
은하는 태식이 전화 할 때까지 기다릴까 망설이다 휴대폰을 열어 그의 번호를 눌렀다.
1-510-335-5099
“그가 받으면 뭐라고 해야 할까. ‘왜 이렇게 소식이 없어요’ 라고 말해야 할까.”
곧 신호음이 들렸다.
따르릉
따르릉
.
.
.
다섯 번을 반복한 뒤 메시지를 남기라는 레코딩이 흘러 나왔다. 간단한 문자 메시지를 보내볼까 하던 은하는 “저 은하예요. 전화 주세요.” 하고는 휴대폰을 기운 없이 접었다.
거실 카펫 위에 내려 놓았던 골프 클럽들을 주워 한 쪽 벽에 세워 둔 골프 백에 챙겨 넣은 후 은하는 정아의 방에 들어가 아침에 학교 가느라 늘어 놓은 정아의 옷가지를 정리해 클로젯에 걸고 빨 것은 따로 모아 빨래 통에 넣은 후 침대도 단정하게 만들어 놓았다. 카펫 위에 떨어져 있던 하마 봉제인형도 제 자리에 올려 놓고.
정아를 비롯한 이곳의 아이들은 한 번 입었던 옷은 다음 날 다시 입지않는 습관이 있었다. 그래서 한 번 입었던 것도 저녁이면 빨래감으로 변해 있곤 했다. 어떤 집은 한 번 쓴 수건도 다시 걸지 않고 빨래통으로 들어 간다고 들은 적이 있었다.
주방 싱크대 위에는 아침에 먹다 남은 오믈렛이 랩에 잘 씌워진 채 있었다. 보온 밥통에서 현미와 보리를 섞어 지어놓은 밥을 푸고 어제 저녁에 끓여 놓았던 미역국에 김치와 잔멸치 볶음을 꺼내 은하는 점심을 먹었다. 한갓지게 혼자서 먹는 점심이라 인터넷을 접속해 한국 TV의 음악 프로그램을 틀어 놓고.
구월이 오는 소리
다시 들으면
꽃잎이 피는 소리
꽃잎이 지는 소리
.
.
.
“꽃잎이 피고 지는 소리…
그것은 어떤 소리일까?
들리지는 않지만 마음으로만 들을 수 있는 소리일거야.
꽃을 피우고 지우기 위해.”
우리 잠시 스쳐 지나는 바람이라 하여도
아무도 모르게 사랑하면 돼
우리들의 만남이 허락되지 않는다 하여도
아무도 모르게 사랑하면 돼
아무도 아니 그 누구도 몰라
서로를 바라보는 원하는 이 느낌을
아무튼 그 무엇도 우릴 갈라 놓을 순 없어
시간은 흘러 우리 사랑은 깊어 가네
우린 점점 깊게 빠져드네
땀 맺힌 잡은 손에 뜨거운 입맞춤에
그녀 숨소리에
이대로 행복해 이대로 만족해
사람들 몰래 아무도 모르게
우리의 미래 생각 않은 채
째깍째깍 돌아가는 시간마저 잊은 채로 .
우리 잠시 스쳐 지나는 바람이라 하여도
아무도 모르게 사랑하면 돼
떨어지는 혜성처럼 스치는 인연이라도
아무도 모르게 사랑하면 돼
.
.
.
아무도 모르게 곡: 정 연준 가사: 이 하늘, 정 재용 노래: DJ DOC
은하가 좋아하는 그룹이 나왔다.
그들의 슬픈 노래—마치 은하를 두고 부르는 곡 같았다.
“그들도 그런 사랑 해 보았을까?”
“ ‘그게 어디 말처럼 쉽게 될 것 같아’ 라는 그들의 말이 맞아.”
지독하게 고정된 세상을 향한 그들의 외침이 신선해서 은하는 그들을 좋아했었다. 다수의 편에 선 그 견고한 틀을 깨어 버릴 수 있는 용기. 그런 것들을 그들은 자주 보여 주었었다. 한 때 무대라는 고정관념을 깨고 무대 위에 개를 데리고 나왔을 때 그들은 멋있었다.
사람들이 정해놓은 일정한 패턴을 따라 지금껏 얌전히 살아온 은하였지만 예전에는 그것만이 옳은 것인 줄 알고 그것에 맞추려고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삶의 방식은 한 가지가 아니라 다양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다. 나이 들어 좋은 점은 세상을 보는 눈이 넓게 열린다는 것이라고 할까.
사랑하고 결혼하고 함께 살고… 이런 것들이 사람의 근본적인 외로움을 치유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사랑’이라는 말—한참이나 잃어 버리고 살았던 그 단어는 나이가 이렇게 되도록 아직도 설레는 말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누가 날 사랑하고 있다는 것-- 막으려 해도 멈출 수 없을 만큼-- 비록 그것이 얼마나 오래 갈지 모른다 해도-- 은하는 지금의 그 사랑이 좋았다. 여자로 태어나서 여태껏 경험해 보지 못했던 그런 무조건적인 사랑이. 한 남자에게서 한 여자로 받는 사랑이.
틀어놓은 음악 프로그램의 휘날레가 장식될 때 혼자서 점심 먹은 것을 대충 치운 그녀는 정아가 학교에서 돌아 오는 시간에 맞춰 간식 준비를 서둘렀다. 달걀과 감자, 당근을 삶아내 오이 절여 짠 것을 섞어 에그 샌드위치를 만들어 접시에 예쁘게 돌려 담았다.
“정아가 보면 좋아할 거야. 걘 감자를 좋아하니까.”
은하는 마음 속으로 만족한 웃음을 지었다. 싱크대 앞에 선 김에 정아의 저녁 준비도 마쳐놓고 나서 은하는 9월 학기 들어 수강하고 있는 영작 강의의 숙제를 했다. 숙제를 다하도록 그때 까지도 전화는 없었다. 태식에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