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시간
몇 시간을 잤을까.
외출복을 입은 채로 침대 위에 쓰러졌던 은하가 서늘한 공기를 끼며 눈을 떴을 때는 새벽녘이 오려는지 큰 길가의 자동차 다니는 소리가 간혹 들려오고 있었다.
4:45AM
전자 시계의 빨간색 숫자들을 보았다. 어둠 속에서 그녀는 손을 뻗쳐 침대 옆 협탁위에 있는 스탠드의 스위치를 찾아 눌렀다. ‘탁’ 하는 순간 눈부신 빛이 방안을 밝혔다.
“옷을 입은 채로 자고 있다니…”
“이불도 안 덮고.”
그녀는 몸을 조이고 있던 살색 팬티 스타킹을 먼저 벗어 내렸다. 곤색 스커트의 허리도 풀고 상의도 벗었다.
어깨에 끈이 달린 아이보리색 면 소재 홈 원피스를 옷장 서랍에서 찾아 걸친 후 FM 스위치도 눌렀다.
102.1 Bay Area Classical Music Station (베이 지역 클래식 음악 스테이션)
고요한 새벽에 어울리는 바이올린 선율의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새벽녘과 바이올린 소리가 이토록 절묘하게 잘 어울린다는 것을 은하는 오늘 처음 알았다. 어제 저녁 태식과 그의 와이프 그리고 조 교수 일행과 마주치고 돌아 왔을 때의 복잡했던 심사가 차분히 가라앉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곧 동이 트고 아침이 올거야.”
은하는 침대 머리맡 협탁 위에 얹어 둔 은색 실버 프레임의 사진 액자를 들었다. 거기에는 정훈과 은하 그리고 정아가 활짝 웃고 있었다. 작년에 L.A. 디즈니랜드에 갔을 때 디지털 카메라로 찍어 컴퓨터에 저장해 놓았다 지난 일월 정훈이 서울로 가기 전에 A4 용지 크기로 뽑아 낸 것이었다.
“나 자기 사진 여기에 넣어 놓고 일년 동안 매일 생각할게.”
정훈이 떠나기 전날 은하는 그를 껴안으며 그렇게 말했었다.
“알았어, 행동거지 조심하고 생산적인 일에 시간 투자해. 시간 금방 간다.”
정훈은 이렇게 교장 선생님 같은 말을 남기고 서울로 갔다. 그는 빈 틈이라곤 찾아 볼 수 없어 거의 모든 것이 정확했고 그러다 보니 남의 실수도 잘 용납이 안 되는 면이 있었다. 그것은 그의 장점이자 단점이기도 했다. 정훈이 떠난 뒤 그의 빈 자리가 크게 느껴지는 경우가 더 많았었다. 오랜 세월 동안 함께 살아서 쌓은 미운정 고운정이 이런 것이구나 하는 것을 알았었다.
셋이서 찍은 사진 액자를 들여다 보던 은하의 입가에 작은, 쓸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난 왜 당신 마음 속에 기대볼 수 없는 거지?”
“당신 마음 속에 내가 들어갈 수 있는 틈을 줄래?”
“그냥 그렇게 당신 앞에서
살려고 했는데 난 지금 남자가 생겼어.”
“난 그 사람이 좋아.”
“그 사람도 날 좋아 하나 봐.”
“이럴 때 난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은하는 액자를 내려 놓고 주방으로 가 커피 메이커에 원두를 한 스푼 넣고 커피를 내렸다. 머리가 혼탁할 때 연한 원두 커피는 도움이 됐다.
커피 메이커에서 똑똑 커피 떨어지는 소리가 나자 향긋한 커피 향이 퍼져 나갔다.
“음---- 헤이즐넛 향!”
은하가 킁킁거리며 냄새에 취해 있을 때 등 뒤에서 영아인지 일어나 이쪽으로 오고 있는 소리가 들렸다.
“엄마, 벌써 일어났어?”
뒤를 돌아 보자 식탁 앞에 정아가 금방 자다 깬 얼굴로 서 있었다.
“정아야, 왜 벌써 일어났어?”
“그냥 눈이 떠졌어. 나도 모르게.”
“더 자지 그래?”
은하가 식탁 의자를 빼내 앉으려는 정아 곁으로 다가가 정아의 긴 머리칼을 쓸어 내리다 “우리 딸” 하며 살며시 팔을 둘러 안았다.
“엄마, 무슨 일 있어?”
정아가 은하의 갑작스런 동작이 조금 의외라는 듯 은하를 보았다.
“일은? 우리 정아가 예뻐서 그러지…”
“흐흐, 엄마들은 다 그렇게 얘기한대.”
정아에게서는 제법 숙녀티가 났다. 요즘 들어 키도 부쩍 커지고 안았을 때 폭신한 기분이 느껴져 오는 것이 이젠 많이 자라버린 정아가 대견하고 기특해서 은하는 정아의 등을 몇 번 두드렸다.
“우리 정아, 누가 이렇게 낳았을까?”
“엄만? 또 그런 말 하면 나 도로 들어간다.”
그런 말 듣기에는 너무 많이 나이가 든 것인지 쑥스러워진 정아가 은하에게서 도망(?) 가려 하고 있었다.
“안 할게. 그런 말 안 해. 정말이야.”
“근데 엄마 오늘 이상하다…”
정아가 은하의 안색을 살피더니 말을 이었다.
“어제 조 교수님 아저씨 보니까 아빠 생각 나서 그래? 그런 거지?”
“그런가?”
은하가 정아를 보며 웃었다.
은하의 무드가 조금 다운된 것을 알아 차렸는지 정아는 은하를 식탁 의자 하나에 밀어 앉히더니 머그 잔에 커피를 부었다.
“정아 때문에 엄마 호강하네.”
정아가 건낸 분홍 잔을 받아 들고 은하가 웃으며 정아를 바라 보았다.
“엄만 그렇게 웃는게 더 어울려. 그거 알아?”
“그래?”
“그럼 매일 웃고 다녀야겠네. 흐흐.”
“아이 너무 오바하지 말고. 바보 같잖아.”
“그런가?”
“흐흐흐” 정아와 은하가 함께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