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덕 위의 그 날
새벽녘 은하가 언뜻 눈을 떴을 때 태식은 옆에서 자고 있었다. 눈을 뜨자 마자 처음에는 여기가 어딘지 잠시 멍한 상태였다. 늘 살던 집이 아닌 낯선 곳에서 눈을 뜰 때 흔히 그렇듯이. 옆에 있는 태식을 확인하자 이내 그녀는 지난 밤의 일을 기억해냈고 자신이 태식의 스튜디오에서 그과 함께 잠자리에 들었다는 것을 알았다. 은하쪽을 향해 누운 조용하고 얕은 태식의 숨소리로 봐서 그는 아직 잠에 빠져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은하는 태식이 깨지 않게 조용히 침대에서 일어나 소리 나지 않는 걸음으로 창가로 가 블라인드를 한 개만 살짝 손으로 들어 보았다. 밖은 아직 뿌연 새벽 기운이 역력했다. 얇은 나일론 소재 속치마 한 개만을 걸친 그녀의 몸으로 약간의 새벽 한기가 느껴져왔다. 여름이지만 베이 지역이라 아침 저녁으로는 서늘한 버클리의 기온을 알 수 있었다. 희뿌연 구름과 안개에 가린 금문교와 샌프란시스코가 있는 곳을 그녀는 내다 보았다.
“지금은 보이지 않네.”
그녀는 속으로 혼잣말을 하다 새벽녘이 되도록 남아 지키고 있는 불빛들을 보았다.
깜빡 깜빡…
새벽을 지키고 있는 창백한 전기 불빛들이 흔들려 보였다. 이상했다. 깜깜한 밤에는 영롱해 보이고 화려했던 불빛들이었는데… 너무 고요해서 불빛 마저 흔들려 보이는 것일까.
은하는 다시 침대로 소리없이 다가와 살며시 태식의 옆 자리에 누웠다. 인기척을 느꼈는지 그가 자다 말고 잠에서 덜 깬 음성으로 “벌써 일어났어요?” 하더니 팔을 뻗어 은하의 어깨 위에 놓았다. 은하가 “도로 잘래요” 하며 그의 벗은 품으로 파고 들었다. 그는 그런 은하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한 번 쓰다듬어 내린 뒤 곧 다시 잠이 든 것 같았다.
은하는 지난 밤 그와의 격렬했던 정사를 떠올렸다. 몸을 가눌 수 없었을 만큼 짜릿하게 전율해 오던… 그에게도 묻고 싶었다. 내가 좋았는지…
“행복해. 지금 이 순간.”
“그러나 아침이 오는 것이 두려워.”
아침이 되고 날이 밝아지면 이성과 관념과 도덕의 잣대를 들이대고 재야 하는 것들이 너무나 많음을 알고 있었기에…
한참 이런 저런 생각을 하던 은하도 그대로 잠이 들었다.
얼마나 잤을까. 간혹 덜거덕 거리는 소리에 잠을 깬 은하는 태식이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 쪽에서 덜걱 거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뭐해요?”
훤해진 창의 블라인드를 한 번 보고 나서 은하가 침대에서 일어나 앉으며 주방에 서 있는 태식에게 물었다.
“이제 일어났어요?”
그는 은하 쪽을 뒤 돌아 보며 웃음을 띠었다.
“지금 몇 시예요?, 근데”
“난 그 쪽이 이렇게 잠꾸러기인 줄 몰랐어요.”
그가 한껏 장난스럽게 은하를 볼 때 그녀는 벽에 걸린 금속성의 시계를 보았다.
8시25분
“어머, 벌써 이렇게 됐어요?”
은하가 시트를 젖치고 발을 침대 밑으로 내려 딛었다.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뭐해요?”
태식의 곁으로 다가가며 은하가 물었다.
“밥해요.”
쌀을 전기밥솥에 얹으며 태연하게 대답하는 그가 우스워 은하가 흐흐 웃다 “남자가 해주는 밥 먹게 생겼네요.” 했다.
“나 샤워하고 나올게요.”
베시시 웃으며 욕실로 들어 가는 은하의 뒷 모습을 보다 그는 밥솥의 스위치를 눌렀다.
은하가 샤워를 마치고 나서 백 속에 넣어 다니는 미니 화장품으로 간단한 화장 까지 마쳤을 때 아침 밥상은 식탁 위에 차려 있었다. 밥에 국에(비록 인스턴트였지만) 달걀 프라이에 김에 김치 까지. 그리고 몇 가지 밑반찬.
“아침에 밥 먹어요?”
“아니오. 빵도 먹고 라면도 먹고… 오늘은 그 쪽 때문에 밥했어요.”
식탁 의자에 앉으며 그는 약간은 멋 적어 했다.
“어머 그렇게 얘기 하니까 그 쪽 가정주부 분위기예요. 흐흐. 나 하고 바뀐 것 같아요.”
“허허 그 쪽 가정주부 맞아요? 분위기가 아니에요. 늦게 일어나지, 샤워부터 했지, 거기다 어디 가는 것 좋아하지…”
“근데 우리 밥 먹고 어디 갈 건데요?”
은하가 이때다 싶어 눈을 반짝였다.
“거 봐요. 내 말이 맞지.”
“그거야 늘 나오라고 한건 그 쪽이니까 윤 교수님이 책임이 더 많죠.”
윤 교수님이라는 호칭에 그가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며 “그 쪽에게 그런 호칭은 처음 들어봐요.” 했다.
아침 식사 후 둘은 자판기 맛이 나는 커피를 끓여 마시고 그의 스튜디오가 있는 버클리 언덕길을 나란히 산책했다.
그와 언덕길을 걷는 것
꽃이 핀 길을 나란히 걷는 것
나뭇잎 흔들리는 길을 다정히 걷는 것
바람도 보내고 흩날리는 꽃잎도 보내고
아무런 상관 없는 과거의 기억들을 하얗게 지우고
그와 나 사이의
은하가 유럽 풍의 집이 아기자기 하게 늘어 선 길 모퉁이를 돌다 태식의 팔짱을 살며시 껴보았다.
“나 이렇게 잠깐만 행복해도 되는 거죠?”
“…네.”
“난 잠깐만 당신을 사랑하는 거야.”
은하는 마음 속으로 그렇게 말했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가 속한 틀을 깨고 그를 내 것으로 가져 오려는 것이 얼마나 이기적인 사랑인지를. 그건 사랑이 아니야. 내 욕심을 채우려는 것 일뿐.
“우리 겨울에 서울로 들어 가면 만날 수 없겠죠? 더 이상. 전화 할 수도 이메일 할 수도…”
“…”
은하는 잘 알고 있었다. 그를 만날 수 있는 시간은 그와 함께 할 수 있는 것은 이곳 뿐이라는 것을.
답이 나올 수 없는, 조금은 칙칙해지는 분위기가 싫어 은하가 밝은 음성으로 화제를 바꾸었다.
“생일이 여름이라고 했죠? 8월 25일.”
“기억하고 있었어요?”
“네.”
“…”
“뭐 할거예요?”
이 말을 해 놓고 은하는 아차 하는 생각을 했다. 내일 이곳에 오는 그의 와이프가 함께 할 텐데… 괜한 질문을 했다는 후회를 할 때 태식이 먼저 말했다.
“실은 내일 와이프가 와요…”
조금 머뭇거리는 말투였지만 그는 솔직하게 털어 놓았다.
“… 알고 있었어요.”
와이프가 온다는 말을 한 태식이 무안해 질까 봐 은하는 더 명랑한 어조로 곧 말을 이었다.
“나도 몇 주간 바빠질 것 같아요. 시댁 조카가 샌프란시스코 어학원에 연수 오는데 도와 달라고 했거든요. 공항 픽업해서 데리고 있다가 필요한 물건 사서 기숙사에 보내려면 아마 나 보기 힘들 거예요. 이제 정아도 올거고요.”
은하는 애써 태식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느라 은근히 억양을 높였다. 연인이 돼주었다 어떤 때는 오래 전에 돌아 가신 어머니 같이 푸근하게 느껴지는 그녀에게 응석 부리고 싶어지는 것이 지금 태식의 마음이었다. 이 여자에게서 느껴지는 원초적인 아늑함, 부드러움, 그리고 여린 듯 강한 감성과 세련된 도회적 분위기…
시원한 바람이 머물던 언덕길을 내려와 그의 스튜디오에 닿았을 때 은하가 말했다.
“나 가기 전에 한 번만 안아 주면 안돼요?”
말없이 그녀를 품에 안은 그는 밀착된, 마주 닿은 그녀에게서 다시 뜨거워지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영원히 가지고 싶지만 그럴 수 없을 것만 같은, 아니 그래서는 안될 것 같은 그녀를 뇌리에 새기려는 듯 태식은 은하의 가지런한 몸 하나하나를 정성들여 훑고 지나갔다. 여러 각도에서 그녀를 가져 보며…
창 밖에는 뿌연 안개 구름이 풀리면서 멀리 샌프란시스코와 금문교가 점차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