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세스 김, 너무 보기 힘들더라.”
은하가 골프 연습장 레슨에 몇 주 만에 나타나 볼을 꺼내고 있을 때 오랜만에 보는 은하에게 다가온 미세스 조가 하이 톤의 목소리를 더욱 높여 반겼다.
“안녕하셨어요? 조 교수님은요?”
“응, 그이 저기 모래 벙커에서 연습 중이예요.”
연습장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 있는 모래 벙커를 턱과 눈으로 가리키며 그녀는 “요즈음 날씨가 덥죠?” 했다.
모래 벙커 안 에는 조 교수와 태식이 모래에 빠진 볼을 밖으로 쳐 내는 연습에 몰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멀리서 봐도 한 눈에 태식이란 것을 금새 알 수 있었다.
“저인 한국 가면 비싸서 자주 못한다고 아주 매일 여기서 살아요 살아.”
“전화 메시지 받고 몇 번 전화 드렸더니 안계시더라구요. 그래서 저 메시지만 남겨 놓았어요. 다시 전화 못드리고.”
“응, 들었어요. 고마워. 저기 미세스 양 오네.”
미세스 양은 파킹랏 쪽에서 지금 막 이쪽으로 오고 있는 중이었다.
“어머 정아 어머니 나오셨네요. 얼마나 보고 싶었게요.”
미세스 신이 동그스름한 얼굴에 웃음을 함빡 담고 은하를 보며 여전히 느릿느릿한 말투를 냈다.
“정말이죠?”
은하가 장난스레 그녀를 보자 미세스 양은 “아이 그럼요. 연습장이 다 빈 것 같았는걸요.” 하며 빈 말이라도 듣기 좋게 했다.
“과장이라도 접수할께요.”
“호호.”
귀엽게 웃는 동그란 얼굴의 미세스 양이 볼을 다 뺄 때 까지 기다렸다 세 사람은 레슨이 있는 타석으로 향했다.
“아니 골프채 몇 개만 빼서 들고 다니지 왜 그 큰 가방을 통째로 메고 다녀?”
미세스 조가 무거운 가방을 등에 메고 있는 미세스 양에게 한 말이었다.
“일 분 이라도 지고 다녀서 살 빼려고요. 상호 아빠가 살찌면 자기 볼 생각 아예 하지 말라고 했거든요.”
“호호 그럴 때가 좋은 때다.”
미세스 조가 한때 우리도 그 나이에는 그렇게 챙기며 살았다는 어조로 말했다. 이미 타석에 와 있던 피터 코치는 은하를 보자 “Hi Eun, how have you been? Long time no see! (안녕, 은, 잘 지냈어요? 오랫동안 못 봤네요.)”하더니 “We have all four Korean ladies today.(한국 숙녀분 네 분 모두 왔군요.) What a lucky day!(럭키한 날이죠!)” 하며 분위기를 띄었다. 이태리계 같은 외모를 가진 그는 낮술을 조금 했는지 벌써 눈 주변이 붉으스레 해져 있었다.
“피터 코치 혼자 사는 홀아비 같지 않아요?”
미세스 양이 뒤에 있던 혜리에게 살짝 건네는 말소리에 “분위기가 여자 없는 분위기야.” 혜리가 다시 귓속말 비슷하게 소곤댔다. “그죠?” 미세스 양이 다시 속삭일 때 벙커샷 연습을 마치고 타석으로 오던 조 교수와 태식이 여자들 중 제일 앞 타석에 있는 은하와 뒤의 여자들을 보며 가벼운 인사를 주고 받은 뒤 여자들이 비워 놓은 제일 앞의 두 타석에 자리를 잡았다. 그제 함께 샌프란시스코에 갔다와 ‘이랬소 저랬소’ 하며 이메일을 보낸 태식을 생각하며 은하는 속으로 웃었다.
조 교수는 은하를 돌아 보더니 사람 좋은 얼굴로 특유의 너스레를 떨었다.
“제수씨, 난 제수씨가 안보이길래 정훈이 보고 싶어 서울로 날아 간 줄 알았어요.”
빙글빙글 웃는 그에게 은하가 한 술 더 떠서 이렇게 말했다.
“조 교수님 뵙고 싶어서 못갔는데요. 어쩌죠?”
“허허 당신 들었지? 난 오나가나 여자들 한테 파퓰러 한게 약점이란 말야.
조 교수가 제일 뒷편에 서 있는 미세스 조를 보며 농담을 하자 모두들 하하 웃고 말았다. 웃는 소리에 피터 코치가 “What ‘s so funny?(뭐가 그리 재미있어요?)” 하며 다가와 이 사람 저 사람 얼굴을 번갈아 보자 미세스 조가 나서서 방금 일어난 상황을 대충 영어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My husband said he’s very handsome and popular among wemen.(저이가 자기 너무 잘 생겨서 여자들 한테 인기가 많대요.)”
그녀의 말뜻을 재빨리 알아들은 피터 코치는 한 술을 더 뜨고 있었다.
“Why is he talking about me?(아니, 왜 내 얘기를 하고 그래?)”
“하하하”
“You have the prince disease, Peter!(왕자병이시네요, 피터 선생님!)”
조 교수가 걸걸한 소리로 피터 코치를 향해 한 마디 하자 모두들 배꼽을 잡으며 웃고 말았다.
“Prince disease?(왕자병?) I’ve never heard of it.(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데.) What kind of disease is it?(그게 무슨 병이유?)”
그는 어리둥절해 있었다.
눈물을 닦으며 웃던 혜리가 소위 왕자병에 대해 이런 저런 증상이라며 영어로 대충 설명을 하자 피터 코치는 더 우스운 말을 했다.
“Would it be called ‘princess disease’ for the ladies?(그럼 공주병이겠네요, 여자들한테는.)”
“어, 하나를 가르쳐 주면 둘을 아네.”
미세스 조가 조 교수를 보며 감탄하자 조 교수가 다시 나서 조 교수표 콩글리쉬로
“One teach, you know two.(하나를 가르쳐 주면 둘을 아네.) ” 하는 바람에 한 번 더 박장대소를 했다.
웃고 있는 와중에서도 한 넉살 하는 조 교수는 엄지 손가락을 치켜 세워 피터 코치에게 보이며 “Good brain, Good brain!(대단한 머리야. 대단한 머리야!)” 하고 있었다.
각자의 페이스 대로 연습 샷을 시작하기 전에 피터 코치는 수강생들을 가까이 모아 놓고 팔로우 스루에 대해 강조했다. 배꼽이 완전히 목표 지점을 향해 있도록 몸을 돌려야 한다는 것과 오른 발 앞 쪽 역시 그렇다는 내용이었다. 태식은 피터 코치의 강의에만 열중해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을 뿐 의식적인지 은하 쪽은 볼 생각을 안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은하는 피터 코치를 보다 간혹 태식에게 흘끔흘끔 눈길을 보냈다. ‘이랬소 저랬소’ 하던 태식의 이메일이 자꾸만 우스워서. “ ‘바보 같이 당신을 보내고 후회했소’ 라고 했지… 후후.” 꿈속에서 집요하게 은하를 향해 파고 들며 애무하던 태식도 떠올랐다. 현실일까 꿈속일까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로 생생한…
둘이 있으면 허물없어도 여럿이 함께 있을 때는 왜 더 모른 척 하게 되는 건지요.
당신도 지금 내 생각하고 있죠?
말 안해도 다 알고 있어요.
날 안보고 있어도 다 알아요.
태연해 보여도 난 다 안다고요.
연주의 샷은 몇 주 쉬었었지만 만족할만 했다. 역시 시간이라는 것이 무서워서 몇 주간 연습은 못했어도 그 동안 마음 속으로 연구하며 담아두고 있었던 내재된 기간도 무시못하는 힘을 가진듯 했다.
멀리는 안가도 좋으니 똑바로만 날아가다오.
이것이 은하를 비롯한 초보 여성 골퍼들의 바람이었다. 심한 슬라이스나 훅이 나 공 찾느라 민폐 끼치는 일만 없어도 필드 라운딩에 대한 부담감이 없어지기 때문이었다.
“Don’t head up. Watch the ball.(머리 들지 말고 공을 보세요.) ”
“Use your body power not arms.(팔이 아닌 몸통을 사용하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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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 한 사람 돌아가며 스윙을 봐 주던 피터 선생은 수강생들을 경사진 곳으로 데려가 내리막과 오르막 경사에서의 샷에 대해 얘기한 후 다음 주에는 피칭과 칩핑에 관해 얘기 하겠다고 한 후 레슨을 마쳤다.
“우리 오랜만에 다 모였는데 점심이나 하고 헤어집시다.”
레슨이 끝나고 조 교수의 제안에 따라 가게된 곳은 오클랜드의 자장면 집이었다. 자그마한 몰 안에 한식집 일식집 중국집 비디오 대여점 노래방 등이 나란히 들어선 한인 몰에 들어서자 조 교수네와 태식이 먼저 와서 차를 세워 놓고 자장면집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좁다란 파킹랏에 차를 댈 곳이 없자 은하는 조 교수와 태식의 차 뒷 편에 이중 주차를 해 놓고 혜리와 함께 내렸다.
“좀 기다리래요. 어떻게 장사가 잘 되는지 만원이에요. 만원.”
미세스 조가 일행에게 다가 오고 있는 은하와 혜리에게 말했다. 조 교수와 태식은 나란히 서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마 며칠 전에 남자들 끼리 라운딩 했던 때를 이야기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거참 골프는 마음대로 안돼요. 처음에 잘 된다고 자만할 것도 안된다고 낙담할 것도 아니드라구요. 인생살이 하고 비슷해.”
조 교수가 검은 뿔테 안경을 손으로 올리며 말했다.
“원래 18홀 까지 다 가봐야 승패를 알 수 있다는 것 아닙니까.”
“과욕을 버려야 잘 되두만요… 근데 그저깨 학회에 버클리의 니만 교수 왔었어요? ”
“네. 오전에 잠깐 왔다가 간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아—내가 늦게 가서 못봤구나. 그날 일이 있어 못가는 건데 연기되는 바람에 갈 수 있었잖아요. 근데 그 친구 다른 학교로 옮긴다는 말이 있습디다. 연구비도 많고 한국 학생들도 많이 데리고 있다는데…”
“그래요?”
그때 미세스 양이 도착했고 일행은 자리가 난 식당 안으로 들어 갈 수 있게 되었다. 방금 식사를 마친 손님들이 일어난 자리를 치우느라 학생인듯 보이는 종업원은 행주질을 치고 있었다.
“자 좁지만 다 앉아보죠.”
여럿이 둘러 앉다 태식의 옆에 앉게 된 은하는 그와의 간격이 너무 없어 조금 신경이 쓰였다. 태식도 그런 은하의 마음을 읽었는지 조심스러워 하는 것 같았다.
“그 두 사람 사이 좀 띠어요.”
반 팔을 입은 은하와 태식 사이를 가리키며 조 교수는 농담을 했다.
“윤 교수, 나 정훈이 한테 혼나요. 내가 은아씨 수호천사 하기로 했거든. 정훈이 한테 약속했어요.”
“허허” 웃는 태식의 얼굴을 혜리가 쳐다 보았다.
“자꾸 그러시면 반대로 더 가까이 가는 수가 있어요.”
태식이 농담을 받으며 옆에 있던 조 교수 쪽으로 더 자리를 좁혀 은하와의 간격을 조금 더 띠어 보려 했다.
“자--- 자장면과 짬뽕 사이에서 고민하지 말고 신속하게 고르세요.”
“조 교수님, 저 질문 있어요. 볶음밥 먹어도 되는거죠?”
미세스 양이 느릿한 목소리로 그녀 다운 질문을 던졌다.
자장 셋 짬뽕 둘 볶음밥 하나로 주문한 뒤 점심을 마치자 여자들이 디저트로 커피를 쏘겠다고 해서 근처 스타벅스에 몰려가 자장면과 볶음밥의 어느 정도 느끼한 기분을 눌러 주었다. 그곳의 커피는 색이 짙고 좀 독한 편이었지만 뜨거운 물을 몇 잔 받아 섞은 뒤 여럿이 나누어 마셨더니 썩 훌륭한 커피 맛이 났다.
“음--- 역시 커피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