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하…”
태식의 얼굴이 점점 가까이 클로즈업 되더니 와락 그녀를 끌어 안아 버렸다. 순간 움직일 수 없을 것 같은 아찔한 쾌감이 몸을 스쳐 갔지만 그를 밀어내 보려고 은하가 애를 썼다. 그를 밀쳐 내려 할수록 그는 더 집요하게 은하를 향해 파고 들어왔다. 먹이를 챈 굶주린 사자와 같이… 절대 놔 주지 않을 것 처럼…
태식에 의해 그녀의 양 가슴이 봉긋하게 드러나고 한 꺼풀의 스타킹이 벗겨져 나갈 때 거부할 수 없는 힘으로 엄습해 오는 심한 쾌락에 그녀는 눈을 감아 버렸다. 그의 손길은 은하의 몸 구석구석으로 다니고 있었다. 하나도 놓치지 않을 것 처럼… “아— ” 은하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얕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어느 순간 눈을 떴을 때 그녀는 정훈의 얼굴을 보았다. 분노에 차서 은하의 몸 속으로 거칠게 파고 드는 정훈의 얼굴을…
따르릉---
따르릉---
협탁 위 전화 벨 소리에 언듯 눈을 뜬 은하는 “하유—”하며 먼저 숨을 골랐다.
“휴-- 꿈이었구나…”
몸에는 땀이 베어 있는 듯 했다.
따르릉---
“은하야, 너 셀폰 왜 안받는거야? 어제 밤에 몇 번 전화해도 통화 안되더라. 메시지 남겨도 연락도 없고 집에도 하루 종일 없고. 어떻게 된거야? ”
은하가 헬로우 하자 마자 성질이 꽤 급한 혜리가 대뜸 말해댔다.
“음, 좀 못받았어.”
“너 목소리가 왜 그래? 어디 아프니? 자다 일어났니?”
방금 꿈에서 깨나 잠긴 소리를 내는 은하의 목소리였다.
“어머 내가 깨웠구나. 쏘리.”
“아냐, 일어날때 됐지 뭐. 노래 레슨도 가야 하잖아 금새. 어제 너무 늦게 잤나봐.”
“그래 너 한테 하두 소식이 없어서 전화했어. 걱정이 되서. 정아도 없는데…”
“피— 엄청 생각해 주는 척 하네 정말.”
은하가 피식 웃자 혜리는 “척이 아니고 진짜야 얘.” 하더니 “이따가 레슨 한 시간만 더 늦게 오면 안돼겠니?” 했다. 준이 아빠와 다녀올 곳이 있다면서.
“알았어 내가 지금 가진 게 시간 밖에 더 있니? 그럴께.”
은하는 흔쾌하게 그래 하며 전화기를 놓은 뒤 욕실로 갔다. 그녀는 코발트색 짧은 팬츠에 가느다란 두 줄이 달린 탑을 훌훌 벗어 수건 걸이에 걸쳐 놓고 샤워 부스의 온수 꼭지를 돌렸다.
엉덩이선 정도 까지 보이는 반 전신 거울에 비친 나신을 보며 방금 전의 꿈을 떠올렸다.
그런 꿈을 다 꾸다니…
찬물도 섞어 틀어 알맞은 온도로 맞춘 뒤 샤워 부스에 재빨리 들어간 그녀는 끈적끈적 하던 몸의 구석구석을 상쾌하게 씻어냈다. 얼마 전에 새로 산 샤워젤은 특별히 맑고 드높은 향을 냈다. 은하는 나지막한 소리로 콧노래를 불러 보았다.
디스파냐 소노라벨라
레지나 손델라모르
뚜티미 디꼬노 스텔라
스텔라디비보 스플렌도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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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하다 그 스파뇨라
아름다운 그 자태
빛나는 그 얼굴에는
사랑의 웃음 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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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 di Chiara의 라 스파뇨라
샤워를 마친 그녀는 타월로 머리를 감싼 채 향 좋은 헤이즐넛 커피도 한 잔 끓여냈다.
난 프림만 한 스푼.
그는 지금 강의실에 있을텐데. 버클리 하스 스쿨에서 기술 정보 정책 특강을 듣는다고 했지. 어제 밤에 보낸 그의 이 메일이 생각나 은하는 한 번 웃어 보았다.
“노인네 같이 ‘이랬소 저랬소’ 하다니. 후후.
그리고 꿈 속에서 날 찾아오고.
너무나도 생생한 꿈이었어.
혼자만의 한갓진 아침 시간을 마친 그녀는 본격적인 성악 연습으로 들어갔다. 혜리가 가르쳐 준 발성법으로 ‘귀신 곡 소리’라는 것이 있었다. 소리가 배에서 올라와 골통을 울리고 깨는 것을 터득하라고 했다. 그러자면 허스키 하게 슬피 우는 ‘귀신 곡 소리’가 딱이라며 가르쳐 준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이히히히히
이히히히히
이히히히히
.
.
.
그 다음엔 사이렌 소리. 가장 낮게 낼 수 있는 소리에서 시작해 가장 높이 까지 도달했다 다시 낮은 소리로 돌아오는.
이
이
이
.
.
.
다음엔 우아하게 숨쉬는 법. 거만한 듯 품위 있는 표정으로 ‘흐’ 하고 일 순간에 공기를 표시 안나게 흡입하는.
‘흐’
‘흐’
‘흐’
.
.
.
은하는 욕실 거울 앞에서 성악 자세를 잡아 보았다.
슬프고도 우아한 얼굴로 그윽하게. 조금은 거만한, 도도한 표정으로.
타월로 감싼 머리가 마르기를 기다리다 클로젯을 열고 무엇을 입을까 하던 그녀는 여성스런 로질리풍 둥근 카라 원피스를 골랐다. 연소라색 원피스는 얇은 허리 벨트 아래로 두 줄의 주름이 잡혀 있는 것으로 아침 저녁으로 싸늘한 이곳 날씨에는 가디건으로 코디 하면 예뻤다.
“어머 벌써 한 시간이 다 되었네. 곧 혜리네 갈 시간이야.”
블로우 드라이어로 머리카락을 매만지기 전 그녀는 벽 시계를 보았다.
“서둘러서 가야겠네.”
은하는 원피스를 입은 어깨 위에 스웨터를 둘러 묶고 아파트를 나서 15분 후 혜리네 집에 닿았다.
“얘, 너 요즈음 보기 힘들다. 잠수탔니?”
“얜 내가 잠수함이 어디있니?”
은하가 혜리네 애완견 미미의 입을 거의 마출듯이 제 입에 가까이 갖다 대고는 아이 어르듯이 그렇지 미미야? 했다.
“어젠 골프 레슨에 아무도 안나오셨어. 나 하고 미세스 신 뿐이었거든. 다들 바쁘셨나봐.”
“으응.”
“근데 넌 어제 어디 갔었니? 전화도 안되고.”
“으응… 나… 샌프란시스코 갔었어.”
“혼자서?”
“응?… 응. 나 혼자 잘 다니잖아.”
태식과 함께였다는 말을 왜 혜리에게도 못하겠는지 몰랐다.
“바보 날 부르지. 같이 가게. 왜 혼자가.”
“너야 준이가 있는데 어디 나오기가 쉽니? 부담만 돼지…”
‘하긴. 그래도 전화해 보지 그랬어. 요즘 방학이라 슬기가 그 정도는 준이 베이비 씻 해 줄 수 있어
“알았어. 다음 번에요 사모님.”
“근데 너 잠수 타더니 피부도 그렇고 더 예뻐진 것 같다? 골프를 안해서 하얘졌나? 좀 매끈해 진 것 같다.
혜리가 오랜만에 원피스를 꺼내 입은 은하를 아래 위로 훑어 보며 “무슨 좋은 일 있니?” 했다.
“좋은 일?… 음 있어.”
있지만 말 안해주겠다는 얼굴로 은하가 얼굴을 안고 있던 미미에게 바짝 댔다.
“뭔데?”
혜리가 더 궁금해져 죽겠다는 듯 은하에게 가까이 왔다.
“비밀.”
“치, 말해봐라 뭐.”
“…”
“뭔데에?”
“근데 혜리야… 너… 너 말이야…”
은하가 말을 잇지 않고 뜸을 들이자
“너 뭐어 확 말해봐. 갑갑해 죽겠다.”
하며 재촉해댔다.
“너… 준이 아빠 말고 다른 남자 생각해 본적 있니? 솔직히 말해봐.”
은하가 의외의 질문을 던지자 혜리는 별 것도 아닌 것으로 우스워 미치겠다는 듯 깔깔 웃어대다 은하에게 물었다
“왜? 너 영작 강의실에서 괞찮은 젊은 애 하나 봐 뒀니? 서양이야 동양이야? 귀엽니? 깔끔하니? 섹시해?”
은하가 약간 쑥스러웠는지 반색하며 말했다.
“얜 내가 애들 하고 다니게 생겼니?”
“그럼 누군데? 부담 없는 약탕관 영감이야?”
하더니 다시 깔깔 웃어댔다.
“그게 아니구— 넌 준이 아빠 말고는 다른 남자들 한테는 눈길이 안가냐구.”
“얜 내가 준이 보기도 힘들어 죽겠는데 무슨 다른 남자 생각할 힘이 있니? 준이 석이 슬기에다 준이 아빠 까지 아주 유치원이다 유치원.”
“…”
“너… 혹시 너무 외로운거 아니니? 너 한테 그런 말은 처음 들어봐.”
웃어 넘기던 혜리가 반색하며 물었다.
“…”
“너 같이 하는 일 많은 애가 외로울 틈이 있을까. 강의 듣지 골프하지 성악하지 정아 있지… 하긴 너희 너무 떨어져 지내는 것 같아. 정아 아빠 좀 오시라고 해. 1월에 귀국한 뒤로 벌써 몇 달째니? 2월 3월 4월 5월 6월 7월 혜리가 손가락을 꼽아 보였다.”
“정아 아빠가 뭐 내 말대로 되는 사람이니? 시간표 짜서 자기가 다 알아서 하는 사람인데…”
“하긴. 얘, 한국으로 돌아 가야 하는 1월이면 이제 시간 금방이야. 곧 짐 싸야 할 날이 올 텐데 즐겁게 지내. 너 혼자 있는 시간, 앞으로 언제 또 이런 날이 쉽게 오겠어.”
혜리는 위로의 말 겸 달래는 말을 해놓고 나서 그리 대수롭지 않다는 듯 피아노 뚜껑을 열더니 레슨 시작을 알렸다. 은하가 피아노 한쪽 켠에 놓인 뮤직 스텐드를 펴는 동안 혜리는 벌써 발성 연습 반주를 시작하며 워밍업을 했다.
“자, 티 이 이 쫄깃쫄깃하게. 아래에 끙 힘 주고.”
“티 이 이 ”
“입 너무 크게 벌렸다. 앞니만 보이게 시작.”
“티 이 이”
‘티 이 이”
“티 이 이”
혜리의 건반은 점점 높은 음으로 올려졌다.
“자, 높은 음에서는 입 천장을 점점 늘쿠고 소리가 공명하도록. 호루라기 알지?”
“티 이 이”
“티 이 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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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 천장이 동굴이라고 했지. 이번엔 티 이 이 이 이”
“티 이 이 이 이”
“티 이 이 이 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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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하고 목에 힘 빼라. 눈은 멀리 시선을 두고 아련하게.”
“티 이 이 이 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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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음도 다 내 눈 아래다. 재껴지는 소리 내지마. 뒤집어 씌워야지. 그렇지. 둥글게 위에서 파도 처럼 감싸 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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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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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리는 노래 보다도 발성에 신경을 많이 썼다. 발성을 그대로 노래에 옮겨 보라고 늘 말해주곤 했다. “뭐 불러 볼까… 오늘은.” 혜리는 이태리 가곡집을 이리저리 뒤적이다 물었다.
“뭐 불러 보고 싶은 것 없니?”
“나 오늘 팝송에서 하나 불러 볼까?”
은하가 준비해 온 팝송 대백과를 펴 보이며 로미오와 줄리엣(A time for us) 괞찮지? 하자 “음이 너무 낮지 않니? 조금 높여 볼까? 우린 그게 편할걸. 명색이 소프라노 잖아.” 혜리가 살짝 눈웃음을 보냈다.
A time for us some day there’ll be
By courage born of a love that’s free
A time when dreams so long denided
Can flourish as we unveil the love
we now must hide
A time for love through tears and thor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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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사,곡: H.Rota, L.Lusik, E.Snyder 노래: Johnny Mathis
“정 은하 노래 잘 하는데! ”
혜리는 은하가 노래를 마치기를 기다렸다 엄지와 집게 손가락으로 OK 사인을 보내며 한 가지를 마저 지적해 주었다.
“노래 마칠 때 입안으로 끌어 당기듯이 마쳐야지 숨을 다 내 뱉으면 헛헛하고 재미가 없어져. 알고 있지?”
“나 이 노래 얼마나 불러 보고 싶었는지 몰라. 이거 하고 Love story, Summer time, 에델바이스, 알로하오에, 산타루치아… 그리고 또 엄청 많아. 언제 다 부르지?”
“이제 니 실력이면 다 부를 수 있어. 오늘은 푸니쿨리 푸니쿨라 불러봐. 니 속이 다 시원해 질거다.”
혜리는 소장한지 오래되어 누렇게 빛 바랜 애창 가곡집을 펴자 손으로 한 번 쓸어 내려 푸니쿨리 푸니쿨라에 페이지를 고정한 다음 힘찬 전주를 시작했다. 쿵쾅대는 피아노 전주에 은하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나서 행진곡 처럼 웅장한 곡을 맞을 준비를 했다.
진짜 활화산에 오르는 것 처럼 불러봐야지. 느린 보다는 빠른 곡이 더 쉬워.
아이세라 난니네 메네 싸글리에떼
뚜사이에아도?
뚜사이에아도?
아도르스또꼴린그라또 끼우디스피에떼
파르메논포
파르메논포
.
.
무서운 불뿜는 저기 저 산에
올라가자
올라가자
그곳은 지옥 같이 무서운 곳
무서워라
무서워라
산으로 올라가는 수레 타고
모두 가네
모두 푸니쿨리 푸니쿨라
가네
떠오르는 저 연기 손짓해요
오라오라
오라고요
가세 가세 저기 저곳에
가세 가세 저기 저곳에
푸니쿨리 푸니쿨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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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Denza 곡 푸니쿨리 푸니쿨라
“아--- 가슴이 탁 트인다 혜리야.”
“스트레스 확실하게 사라지지?”
“후후 응”
“자, 다시 불러 보자. 준비 됐지?”
“네, 선생님.”
현란하게 움직이는 혜리의 반주를 넣는 손놀림에 감탄 하다 은하는 다시 노래 불렀다.
아이세라 난니네 메네 사글리에테
뚜사이에아도?
뚜사이에아도?
아도르스또꼴린그라또 끼우디스피에떼
파르메논포
파르메논포
.
.
곡 자체에서 벅찬 감동이 밀려왔다.
“이래서 성악가들과 가수는 노래를 부르는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