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브리지로 가는 길은 늘 이렇게 막히나봐요.”
은하가 차창을 반쯤 내리며 태식을 보았다.
“네, 아마 브리지 까지 막히고 그 뒤로는 괜찮을 겁니다.”
샌프란시스코로 가는 80번 하이웨이는 넘치는 자동차 행렬로 붐볐다. 오전 8시 경이라 그런지 러시아워인듯 했다. 차창 밖으로 멀리 베이브리지가 거대한 회색 철교 같은 모습으로 바다를 사이에 둔 오클랜드와 샌프란시스코를 길게 잇고 있는 것이 보였다. 오른편으로는 만 건너 샌프프란시스코의 상징인 삼각뿔 모양의 트랜스 아메리카 빌딩이 솟은 빌딩군이 한꺼번에 들어오고 더 오른편(뒷편)으로는 두 개의 기둥이 다리를 받쳐주고 있는 금문교가 물 위에 놓여 있었다.
“이 쪽 이스트 베이 지역은 이상해요. 어딜가도 시내하고 금문교하고 베이브리지가 잘 보이더라구요. 아마 언덕이 많은데다 조금 휘어진 곳이라 그런가봐요.”
“그렇겠죠?”
“저 그 쪽이 오전에 워크샵에 가 있는 동안 뭘 할까요?”
“음, 마음대로요. 케이블카 전차를 타던가 미술관을 가던가 아니면 쇼핑도 많잖아요.”
“전차는 함께 타 보고 싶어요.”
“그럼 그럴까요?”
“네. 그런데 우리 음악 들어요. 내가 CD 몇 장 갖고 왔어요. 좋아 하실지 모르겠지만.”
은하가 무릎에 얹어두었던 커다란 숄더백에서 CD 한 장을 꺼내 보이며 난 이런 음악 무지 시끄럽게 트는데… 하며 태식을 보다 CD기에 넣더니 볼륨을 올렸다. 곧 이어 나온 음악은 모 그룹의 노래로 젊은 층에서 선호하는 비트가 강한 최신곡이었다.
“어때요. 신나죠?
“네.”
“난 음악이라면 다 좋아해요. 이거 다음엔 트롯 들어요. 우리. 우전 할땐 트롯 메들리가 최고인거 알아요?”
은하가 목소리를 높여 큰 소리를 냈다.
“트레져 아일랜드에 들렀다 가죠. 괜찮죠?”
태식도 큰 소리로 말했다.
둘은 어느새 톨게이트를 지나 길고 육중한 베이브리지에 올라 있었다.(톨게이트를 지날때쯤 왼편의 오클랜드 항구에는 ‘HYUNDAI’ 라고 쓰인 커다란 상선이 들어와 있었다.) 태식이 베이브리지 중간 지점에서 트레져아일랜드 사인(도로 표지판)을 보고 나와 동그랗게 난 길을 따라 돌자 한 장의 훌륭한 그림 엽서 같은 씬이 펼쳐져 있었다. 바다 건너로 손만 뻗치면 금방 손에 닿을 듯 웅장하고 거대한 샌프란시스코의 빌딩 숲이 바로 눈 앞에 있었다. 금문교도 너무나 확연하게 드러나 있었고.
“아--- 멋지다. 정말. 볼 때마다 좋더라. 그죠?”
“네.”
“수영하면 건너갈 수 있을 것 같은데 아마 보기 보다 훨씬 멀겠죠?”
“네.”
“아—이 몸이 새라면 날아가리---”
은하가 팔을 벌려 날개짓을 해보이자 태식이 그런 그녀를 보며 웃었다.
“노래 불러봐요. 아무도 없는 데서.”
“싫어요. 진자 프로는 아무데서나 노래 부르지 않는 것 알아요?”
어깨에서 흘러내린 커다란 갈색 로잔 그립 백의 줄 하나를 끌어 올리며 은하가 반색했다.
“그런 것도 있어요?”
“네. 그렇다나봐요. 혜리가 그랬어요.”
하며 은하는 다시 샌프란시스코 쪽을 바라 보며 방금 말한 것도 잊어버렸는지 가벼운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저 여자는 누굴까.
뭔데 저렇게 작은 일에 좋아하고 감탄하고 설레하고 즐거워 하는 것일까.
태식은 자신으로 인해 별 것 아닌 것으로 기뻐해 주고 감동해 주는 여자가 눈 앞에 있다는 사실이 좋았다. 그것은 오랫동안 느껴 보지 못했던 것으로 그녀가 좋아 하는 뭔가를 더 해서 다 주고 싶은 마음을 들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는 연한 갈색 기지 팬츠에 얇은 흰색 반팔 니트와 가디건을 갖춰 입은 은하의 뒷모습을 바라 보았다. 굽이 있는 통굽 샌달을 신은 그녀의 키가 평소 보다 크게 보였다. 깔끔하고 세련된 모습의 그녀가 자꾸만 태식의 마음을 흔들리게 하고 있었다. 옆에 두고 사랑하고 싶은데… 아직 순수하고 포근한 마음을 가진 그녀를…
“갈까요?”
은하의 뒷모습을 한 동안 바라 보던 태식을 돌아 보며 은하가 말했다.
“우리 저 도시 안으로 들어 가는 것 맞죠?”
그녀가 샌프란시스코의 빌딩들을 가리키며 차문을 열었다.
“이상해요. 대도시는 각박하고 메말랐지만 그 안에 접근할 때는 묘한 쾌감을 주거듬요. 그래서 뉴요커들이 뉴욕을 못떠난다는 말이 있나 봐요.”
둘은 둥그스름한 길을 돌아 다시 베이 브리지를 탔다. 거대한 철골 구조의 회색 다리에 오르자 샌프란시스코의 크고 작은 군상들이 더욱 가까이 다가 오고 있었다.
“워크샵이 포웰에 있는 세인트 프란시스 호텔이라고 했죠?”
“네.”
“거긴 시내 중심가에다 관광지이니까 다닐 데가 많잖아요. 제 마음대로 다닐 테니까 이따 오후에 만나요 우리.”
“지금 잠깐 인사하고 금방 나올께요. 그게 좋을 것 같아요.”
“싫어요. 그런거. 오후에 만나요. 나 가끔은 혼자 다니고 싶어요.”
태식이 “정말이에요?” 하며 은하를 향해 다정한 눈길을 보냈다. .
“저 그럼 먼저 현대 미술관 앞에 내려 주고 가세요. 이 참에 돌아 보게요.”
“전화 하세요. 다 끝나면 아마 두 시쯤 될 것 같아요.”
“걱정 마세요. 저 마음대로 두서없이 다니는 거 무척 좋아해요. 한갓지잖아요.”
“조심해서 다녀요.”
태식은 혼자 보내는 은하가 안됐는지 그렇게 당부하며 “이따가 보시죠.” 하고는 3가에 있는 미술관 앞에 그녀를 내려 놓고 갔다.
은하는 떠나는 그의 차 꽁무니를 잠깐 보다 미술관 건물을 올려다 보았다. 단체 관람인지 입구에는 초등학교 5-6학년이나 되어 보임직한 아이들이 인솔 교사를 따라와 줄을 서 있었다.
다 보려면 서너 시간은 족히 걸리겠다. 은하는 혼자말을 하며 미술관 계단 입구로 들어 섰고 잠시 혼자라는 쓸쓸함에 새로운 것을 접할수 있다는 희열과 기대 같은 것이 동시에 느껴져 왔다.
은하가 자유 정신의 작가 오노 요코의 전위예술 관람을 마지막으로 몇 층으로 된 미술관을 다 둘러 보고 나서 기념품점에 들렀다 1층 카페에서 샐러드와 오렌지 주스 한 잔으로 가벼운 점심을 대신하자 시간은 한 시 경이 되어 있었다. 오래 서 있던 탓에 피곤이 느껴지는 다리도 좀 쉴 겸 그녀는 한 십분 정도 앉았다가 미술관을 나와 거리로 나섰다. 거리는 어느새 재빛으로 흐려져 있었고 바람도 셌다. 샌프란시스코의 날씨는 알 수가 없군.
호텔이 있는 포웰가 쪽으로 걸어가며 은하는 미술관에서 본 피키소의 그림이 생각났다. 젊은 여인과 그녀의 딸로 보이는 어린 소녀, 두 사람이 유럽의 어느 골목길을 쓸쓸히 걸어 나가고 있는. 그림 속이었지만 여인과 어린 딸의 어깨에 얹힌 외로움의 무게가 보는 이로 하여금 마음을 아프게 하는. 그것은 피카소의 초기 작품이라고 했다. 사람의 어깨에 필연적으로 얹힌 외로움을 알았기에 그는 훗날 대단한 화가가 될 수 있었을까. 이런 생각을 하며 거리를 걷던 은하는 유니온 스퀘어 앞에서 손목 시계를 한 번 보았다.
한시 반.
아직 시간이 남았어.
그녀는 삭스 피프스 애브뉴 백화점을 지나 포스트가 길을 따라 근방에 즐비한 명품 숍들을 쇼인도 너머로 대충 보며 걸었다. 막스마라 매장에 들어가 걸어 놓은 옷을 보던 은하가 에스카다 매장 안에 들어 서자 한국인 직원이 “도와 드릴까요?” 라고 했다. “아뇨, 그냥 보는거예요.” 하며 사양할 때 익숙한 노래 벨 소리가 울렸다.
“태식 그 사람인가.”
은하는 매고 있던 커다란 숄더백을 뒤져 휴대폰을 받았다. 백 안에서 울리는 휴대폰을 찾아 드는 것은 언제나 시간이 걸렸다.
“헬로우”
전화기를 재바르게 펴 귀에 대고 숍을 나오며 은하가 말했다. 수신 상태가 좋지 않은지 전화기는 ‘지지직’ 소리를 냈다. ‘private (등록되지 않은 번호)’ 이라 뜬 휴대폰 화면이면 아마 국제 전화일 확률이 높았다.
“여보세요.”
“나요.”
순간 은하의 가슴 한 켠이 ‘쿵’ 하고 내려 앉는 것 같았다. 정훈이리라 생각하고 있었지만 전화기를 타고 들려 오는 그의 목소리에 꼭 그가 태식을 기다리는 자신을 보고 있는 것 같아서. 그녀는 애써 마음을 진정 시키며 대답했다.
“…아… 당신이에요?”
“누가 옆에 있나?”
조금은 부자연스러운 느낌을 눈치 챘는지 정훈이 물어왔다.
“아니. 밖에 나와 있어.”
“집에 전화 하니까 안받더라구.”
“으응 지난 번에 예기했지. 정아 사이언스 여름 캠프 간다고.
“그래 잘 있지? 지금 어디야?”
“응 샌프란시스코 시내에 나와 있어 나. 여기 저기 구경하는 중이야.”
“여럿이 같이 있나봐. 시끄럽네.”
“응… 좀… 자긴 잘 지내지?”
“나야 어머니가 계시니까 별 일 없지. 지난 번 출장도 잘 다녀 오고.”
“으응.”
“이제 미국 생활도 얼마 안남았는데 정아도 잘 봐 주고 당신도 영어를 더 배우든지 생산적인 일에 시간 투자해. 남들 놀 때 다 놀면 언제 남 보다 나아져. 알았지? 쓸데없이 여럿이 어울려 다니지 말고. 시간 아까와.”
“알았어.”
언제나 그렇듯 정훈의 교장 선생님 같은 일장 훈시에 대해 은하가 별로 반박할 말은 없었다.
“늦지 않게 집에 들어가. 위험해.”
“응.”
“또 전화할게. 바빠서 끊어.”
그는 늘 이런 식이었다. 한때는 이런 그가 숨 막혀 투정도 부려 보았지만 정훈은 결혼 초나 지금이나 일방통행에 대해서 만큼은 변함이 없었다.
수화기를 접자 은하의 머리 속은 혼란스러워 지고 있었다. 그녀가 태식을 몇 번 만나면서 남편 정훈의 입장을 생각 안해 본 것은 아니지만 막상 태식과 함께 있을 때 정훈의 목소리를 들으니 마치 큰 죄를 짓고 있는 것 처럼 머리 속이 하얘지며 핑 하고 도는 기분이었다.
흥청거리는 인파와 달리는 자동차의 소음 속에서 무작정 앞만 보며 걷던 그녀가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 보았을 때 유니온 스퀘어 근방에 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떻게 걸어 왔는지 나도 모르겠어…”
유니온 스퀘이 광장에 우뚝 솟은 기둥 같이 둥글고 긴 탑이 눈에 들어왔다. 회색빛 돌판으로 만들어진 광장 건너 세인트 프란시스 호텔의 그리 높지 않은, 옆으로 길게 지어진 진회색 복고풍 건물도.
“태식은 지금 저 호텔 안에 있을거야.”
은하는 그의 편안한 몸짓과 은하를 향한 따뜻했던 미소를 떠올렸다. 그의 눈길은 “난 널 곁에 두고 싶어.” 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었다. 말은 안해도 느낌으로 알 수 있는 것이 바로 사랑 받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유도 없이 그냥 좋아지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은하에게는.
무슨 말을 해도 조용히 들어 줄 것 같은 사람.
망가지고 상처 받은 모습을 보여 주어도 될 것 같은 편안한 사람.
“그러나 난 저 호텔 안으로 들어갈 수 없는거야.
학회 워크샵이라고 했는데 혹시 아는 사람이라도 만나면… 그의 입장이 난처해 질꺼야.
난 여기서 이렇게 바라만 보아야 하는거야.”
조금 전 걸려왔던 정훈의 목소리도 아직 뇌리에 남아 있는데…
흠-- 은하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유니온 스퀘어에 세워진 탑 맨 위에 너울대는 스커트를 입고 손에 무엇인가를 들고 있는 여인상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때 다시 핸드폰 벨이 다시 울렸다.
510-335-5099.
휴대폰 화면에 뜬 낯익은 태식의 번호.
“…”
“은하씨?”
“네…”
“무슨 일 있어요? 목소리가 그 쪽 같지 않아요.”
“너무 걸어 다녀서 그런가 봐요.”
“지금 어디 있어요?”
“여기요?”
“네.”
“유니온 스퀘어에 있어요.”
“여긴 다 끝났어요. 오래 기다렸어요?”
“아뇨. 덕분에 오랜만에 구경 많이 했어요.”
“정말이에요?”
“네.”
“조금 후에 그리로 갈께요.”
“네.”
“그럼 곧 봐요.”
전화기를 접어 숄더백에 넣은 후 은하는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흐려진 날씨에 짝을 맞추듯 바람 마저 휭휭 소리를 내고 있는데.
이곳의 날씨는 변덕스러워.
금새 햇빛이더니 그 다음엔 비 구름
거기에다 거리를 쓰는 바람…
때론 구름도 바람에 쓸려 몇 가닥씩 풀어져 지나다니지.
소리없이 안개도 잔뜩 뭉쳤다가 스스로 풀어지곤 하지.
광장을 가로 질러 보이는 호텔에서는 정장 차림의 서양 남자들이 대여섯 무리 지어 밖으로 나오는가 싶더니 그 뒤로 태식의 모습도 보였다. 이제 곧 그는 이쪽을 향하여 오리라.
그러나 그를 바라 보고 서 있던 은하의 표정이 이내 조금 굳어졌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옆에 있던 나무 뒤에 반쯤 숨어 들었다. 태식의 뒤로는 조 교수를 따라 나오는 미세스 조의 슬림한 녹색 투피스가 은하의 눈에 띄었고 그녀의 뒤 젊은 남자 둘도 일행인듯 밖으로 나와 태식과 인사를 나누는 듯 했다. 이어 일행은 태식을 남기고 네 사람이 함께 대기하고 있던 택시에 오른 후 마켓가 쪽으로 갔다. 은하는 순간적으로 그들이 유니온 스퀘어 쪽으로 오고 있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녀는 대리석 같이 생긴 넓은 돌판으로 만들어진 자리에 힘없이 걸터앉았다.
“난 여기에 왜 이렇게 있어야 하는 거지?”
“내가 너무 초라해 보여…”
파웰가에서 언덕을 오르는 케이블카 전차가 땡땡 소리를 내며 가고 있었다. 전차 난간에 매달린 사람들은 흥에 겨워 있으리라.
저 만큼에서는 옅은 회색빛 양복을 입은 태식이 은하쪽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 오고 있었다. 한 손에 서류 가방을 챙겨 든 그의 익숙한 걸음걸이는 그가 바로 태식이라는 것을 멀리서도 알 수 있게하며. 늘 캐주얼한 차림의 그를 보아 오다 오늘 아침 정장 차림의 그를 보았을 때 전혀 새로운 느낌이 들었었다.
은하는 그가 유니온 스퀘어에 한가하게 앉아 있는 사람들 사이를 지나 점점 그녀 곁에 가까워 지는 것을 알면서도 모른 척 무표정하게 앞만 보고 있었다. 드디어 그가 은하 앞에 다가와 곁에 앉았다. 그리고는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누굴 기다리시나 보죠?”
“아뇨.”
“그런데 왜 여기 있어요?”
“누가 저더러 여기 있으래요.”
“누구요?”
“아주 바보 같은 사람 있어요.”
“바보 말을 들었으면 그 쪽도 바보 맞죠?”
“맞아요. 멍청해서 이렇게 앉아 있는 거예요. 나.”
은하가 농담인지 자조 섞인 목소리인지를 냈다.
“화났어요?”
그제야 태식이 장난기를 거두고 몸을 반쯤 돌려 은하를 보았다.
눈을 내리고 있던 은하에게 그의 연회색 줄무늬의 타이가 보였다.
“…”
“일어나서 가요. 자—“
태식이 먼저 벤치에서 일어나 은하에게 손을 내밀었다.
“…”
“자—”
그는 말없이 어두워진 은하의 표정을 읽었는지 앉아 있는 은하의 손을 잡아 일으키고 “우리 전차 타러 가요.” 했다. 그를 따라 포웰길을 내려가 은하는 케이블카 전차를 탔다. 뱅뱅 둘러 줄을 진 행렬에 서 있다 전차에 오른 두 사람은 밖을 향해 난 긴 나무 의자에 나란히 올라 앉았을 때 태식은 양복 저고리를 벗어 들고 타이를 풀어 서류 가방 안에 넣었고.
때댕댕 때댕댕 ------
출발 신호를 알리는 종소리에 은하와 태식이 어느 사이 서로 마주 보며 웃음 지었다. 전차는 언덕길을 올라 간간히 정차하며 사람들을 싣고 내려 놓는 동안 벨 소리를 울려댔다. 늙수그레한 기관사는 그 날 따라 흥이 났는지 종을 울리면서 신명 나는 묘기를 보이며 장기자랑을 해내자 전차 안의 사람들이 흥겨워 하며 박수를 쳐댔다.
땡땡 때댕댕 탁탁 때대댕댕 탁탁……
은하의 마음도 언제 그랬냐는듯 태식의 옆에서 가뿐해지고 있었고.
언덕을 오른 뒤 내리막길을 내려온 전차는 은하와 태식을 바닷가 부두 피셔먼즈 워프에 내려 놓았다. 들뜬 관광객의 행렬에 섞여 다니던 두 사람은 시장통 같이 서민적인 곳에서 커다란 드럼통의 펄펄 끓는 물 속에 넣었다 두드려 깨 주는 게맛을 보았다. 서서 먹는 게맛은 맛 보다 즐거움인 것 같은.
“크루스 배는 어때요?”
유람선 배가 떠나는 피어 41 티켓 부스를 지날 때 태식이 은하의 의향을 물었다.
“우리 이왕 나왔는데 마음 먹고 한 번 놀아 볼래요 그럼?”
은하가 명랑한 얼굴로 ‘좋아요’ 하는 사인을 보내자 태식은 ‘그럴까요, 그럼’ 하는 눈빛을 은하에게 보냈다.
인파에 섞여 탄 유람선은 과거 감옥이었다는 알카트레즈 섬을 돌아 거대하게 보이는 금문교 밑으로 지나더니 다시 금문교 밑으로 들어와 부두에 닿고 있었다. 여름이었지만 바다 바람은 쌀쌀했고. 뱃전에 기대 배가 만들어 내는 물살을 보고 있던 은하가 옆에 선 태식을 미소 지으며 보고 있었다.
“난 누가 유람선 같은 거 타는지 궁금했었는데… 내가 타고 있네요. 그 쪽은 한강 유람선 타 보았어요?”
“아니오. 그래도 남산 타워는 가봤어요.”
“우리 이따가 내리면 차 타고 금문교 건너 갔다 올래요?”
“그래요.”
“그냥… 그 쪽이랑 갔다 오고 싶어서요.”
“…”
“추억이 될 것 같아서요.”
추억이라고 말한 은하는 입가에 잔잔하고 고운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너무 고와 어떤 때는 애잖해 보이는 것이 그녀의 미소였다.
“그럼 우리 볼륨 짱짱하게 올려 놓고 그 쪽이 가져 온 CD 들으면서 막 달려 볼까요?”
“어머 자신 있어요?”
은하가 ‘막 달려 보다니요? 안 어울려서 못할걸’ 하는 얼굴로 태식을 향해 고개를 한 번 갸우뚱해 보이자 그는 ‘두고 보세요’ 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한 시간 여 만에 배에서 내린 은하와 태식은 다시 땡땡거리는 케이블카 전차에 올라 탄채 출발지 였던 포웰가로 왔고 그곳에서 태식은 주차해 놓았던 자동차를 찾아 은하를 태운 뒤 그림 엽서 마다 등장하는, 샌프란시스코의 상징인 꼬불꼬불 휘어진 꽃길이 아름다운 롬바르드 언덕길에 갔다가 금문교를 향해 달렸다.
처음 보면 “아---” 하고 아찔할 만큼(스릴있음) 급경사 언덕 길 투성이인 샌프란시스코 시내를 벗어나 해안가 도로를 달리고 있을 때 뿌옇게 흐렸던 날씨는 걷히고 어느새 다시 맑음이었다. 태식 딴에는 달린다고 평상시 보다 속력을 조금 더 내 보는 모양이 우스워 은하는 연신 그를 보며 웃다 “그 쪽 젊잖은 줄 알았는데 꽤 귀여운 데가 있네요.” 하며 음악의 볼륨을 높였다.
“금문교는 이쪽으로 가는 거예요.”
은하의 길잡이에 따라 101 노스로 접어든 태식이 장난기 가득한 눈으로 은하를 보았다.
“제법인데요. 꽤 쓸만한 것 같아요. 이제 바보 아닙니다.”
“흠,그럼 그 쪽도 바보 아니죠. 그렇담 이렇게 해야죠 우리. ”
은하가 운전 중인 태식의 머리 위에 자신의 왼 손을 얹으며 몇 년 전에 인기 있었던 드라마의 한 장면에서 본 대사의 흉내를 그대로 냈다.
“너의 바보를 사하노라.”
“하하하” 유쾌한 웃음 소리에 음악 소리에 푸른 바다 넘실대는 금문교를 넘어 소살리또를 향해 둘은 달렸다. 은하가 끼고 있는 녹색의 무테 반투명 선글라스가 시원해 보이는 오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