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만나면 안될 것 같아.
흔들리는 내 마음을 나도 잘 모르겠어.
이러다가 더 깊게 빠져들면…”
은하는 문득 문득 떠오르는 태식의 얼굴을 지워 보려고 노력했다.
“은하야, 너 오늘도 연습장에 안보이더라. 무슨 일이야? 어디 아팠니?”
“미세스 김, 미세스 조예요. 요즈음 왜 보기가 힘들어요?”
“저 상호 엄마예요. 다음 주에는 골프 레슨 나오실거죠?”
은하가 골프 연습장에 몇 주 째 모습을 보이지 않자 함께 레슨을 받는 여러 사람들이 전화를 걸어 걱정스레 물어 오곤 했다. 그녀는 그저 “네, 요즈음 좀 바빠서…” 하며 얼버무렸지만 연습장에 더 이상 나가지 않으려고 마음 먹은 터였다.
태식이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눈빛을 보면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도 은하에게 관심이 있다는 것을. 그것은 두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어떤 교감 같은 것이랄까. 조 교수를 비롯한 여러 사람이 함께 있는 곳에서 서로 애써 외면하고 있어도 어떤 느낌이 오고 가는 것… 매 주 나가던 골프 레슨 연습장에서도 그랬고 공원에서의 바베큐팀이 다 함께 어울려 갔었던 버클리 마리나(버클링에서 바다에 면한 작은 부두)의 미국 독립 기념일의 불꽃놀이에서도 마찬가지였지... 잠깐이었지만 어두운 밤 하늘을 가르며 여러 가닥으로 길게 떨어져 내리는 불꽃을 올려다 보다 서로의 눈이 마주치게 되었을 때 그녀는 분명 태식에게 다가서고 싶은 자신을 확인할 수 있었고 태식 또한 은하에게 “너에게로 가까이 가고 싶어.”라고 말하고 있는듯 했었던… 숨길 수 없었던… 눈빛…
송 경희…
그녀의 이름도 너무나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공원에서 바비큐 하던 날 혜리에게서 들은 그의 와이프의 이름 세 자.
“이건 아니야… 이래서는 안돼… 그를 더 이상 만나서는 안돼.”
은하는 들릴 듯 말 듯 혼잣말을 하며 고개를 가로 젓다 아파트 거실의 서향으로 난 작은 창을 통해 들어오는 늦은 오후의 뜨거운 햇살을 막아 보려고 블라인드에 달린 투명 막대 손잡이를 왼편으로 돌렸다. 비도 없는 여름 오후의 햇살은 어찌나 건조하고 강렬한지… 이제 가을이나 지나야 비 구경을 할 수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연습장에 나가는 대신 이제 더 열심히 노래 불러 보는 거야. 지금 내 꿈은 언젠가 작은 무대에 서 보는 거쟎아… 사람들에게 고운 노래를 들려 줄꺼야.”
은하는 세계 명가곡집을 펴 들었다. 이리저리 뒤적이다 작년에 혜리에게서 배운, 마르티니의 Piacer d’Amor (사랑의 기쁨)을 펴 가사를 먼저 음미해 보았다. 기분도 가라 앉는데 더 신나는 노래를 불러 볼까 하던 은하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사랑의 기쁨은 어느덧 사라지고
사랑의 슬픔만 영원히 남았네
눈물로 보낸 나의 사랑이여
그대 나를 버리고 가는가
야속하다.
사랑의 기쁨은 어느덧 사라지고
사랑의 슬픔만 영원히 남았네
.
.
.
눈을 감고 조용히 노래 부르는 은하의 마음에 태식이 살며시 다가왔다 이내 사라져 갔다.
“그래. 그를 만나는 기쁨은 이내 사라지고 마는 것 일거야.”
“환상을 쫓는 것 뿐이겠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휴대폰 전화벨이 익숙한 노래를 불러내고 있었다. 정아가 다운로드 받아 넣은 최신곡으로.
이 시간이면 정아 아빤가?
그녀는 벽에 걸린 둥근 시계를 얼른 한 번 쳐다 보았다. 서울의 정훈은 아침 시간에 일어나 전화하곤 하니까. 엊저녁인가 부터 숄더백 안에 넣어 둔 셀폰(휴대폰)을 찾아 드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백 속의 잡동사니 사이에서 작은 것을 찾아 내기란. 그 사이 벨이 끊어지지나 않을까 은하는 수화기를 펴자 송신 번호를 확인할 새도 없이 귀에다 대고 바로 정훈을 불렀다. 아니 정훈이기를 바라는 마음이 더 컸는지 모른다. 흔들리고 있는 은하의 마음을 잡아 줄 수 있는 사람은 지금 정훈 밖에 없기에…
“헬로우, 당신이야?”
“…”
“헬로우.”
“… 저… 윤 태식 입니다.”
은하의 가슴이 속에서 ‘쿵’ 하는 소리를 냈다.
“…”
“지금 전화해도 되는거죠?… 연습장에서 안보이시길래… “
“…아… 네… 저… 그냥 별 일 아니에요… 그 동안 좀 바빠서요.”
은하는 어물거리고 있었다.
“… 오늘 저녁 때… 나올 수 있는겁니까?”
“…”
“…그냥… 식사나 함께 할까 해서요.”
“…”
“아파트 근처에 데리러 갈까요?”
“…아니, 저…”
“그럼 그 쪽이 나오세요. 버클리 마리나 아시죠? 그 끝에 스케이트 라는 레스토랑이 있어요. 거기서 기다릴께요.”
“…”
전화는 이내 끊어졌다. 들고 있던 전화기를 어떻게 내려 접었는지 자신도 모르는 일이었다. 한참을 움직일 줄 모르고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던 그녀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던 자신이 꼭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가야 하는건가.”
“말아야 하는건가.”
마음을 가다듬자 갈등이 오고 있었다.
잠시 망설이던 그녀는 파우더 룸으로 가 이내 가루분을 덧 바르고 립스틱도 지워 입 가에 분을 눌러준 뒤 핑크과 살구색을 섞어 다시 정성스럽게 그려 주었다. 물에 젖은 듯 촉촉한 느낌이 드는 립글로스를 발라주고.
그에게 끌리는 어떤 힘… 그것은 거부할 수 없는 그 어떤 것이었다. 도망가려 해도 갈 수 없는, 생각하지 않으려 애써봐도 자꾸만 쫓아 오는…
클로젯을 열어 걸어 놓은 옷들을 이리저리 보던 은하는 니랭스 회색 스커트에 샤링을 넣은 네크라인이 여성스러운 연노랑 긴 소매 블라우스 탑을 스커트 위로 코디해 입고 겉봉에 미스트 베이지라고 적힌 스타킹도 뜯어 곱게 올려 신었다. 그리고 오랬동안 클로젯 안에서 잠 자고 있던 샤넬의 검은색 핸드백을 꺼내 들었다. 금속과 가죽을 꼬아 만든 두 줄의 무개가 기분 좋게 느껴지는. 작지만 도톰한 질감이 느껴지는, 고급스러움이 느껴지는 정장용 백이었다.
외출 준비를 끝내고 나서 자동차 키를 찾아 들고 여느때와 다름없이 거울 앞에 섰을 때 그녀는 상쾌하고 새로와 지는 기분이 들었다. 거울 속의 여자는 눈에 띠게 예쁘고 화려한 얼굴은 아니었지만 삼십대 후반이라 보기에는 아직 청아하고 아름다운, 오히려 잘 익은 완숙미가 주는(세상을 더 산 나이가 주는) 부드러움이 섞여 더욱 여성스럽게 느껴지는 한 여자가 서 있었다.-- 갸름한 흰 얼굴, 이마에서 콧등으로 흐르는 고운 선, 은은하고 잔잔한 동양적 이미지… 상큼해 보이는 목선, 어깨 정도의 길이 까지 내려오는 헤어 스타일이 그녀를 나이 보다 더 아래로 보이게 하고 있는. 은하는 파후더 룸의 거울 앞에서 한 바퀴 돌아 뒷모습을 한 번 점검한 뒤 아파트를 나섰다.
윤 태식 교수… 그가 전화해서 만나자는 말을 할 수 있을지는 상상외였다. 너무 젠틀하고 말 수가 별로 없던 그였기에.
“윤 태식...”
“내 마음이 왜 이렇게 설레고 있는 거죠?”
은하는 버클리 마리나로 향하는 차 속에서 그의 이름을 떠올리며 혼자 살며시 미소 지어 보았다.
스케이트는 개인용 요트와 보트가 묶여 정박 중인 선착장을 지나 삐죽이 나온 반도의 제일 끝 부분에 있었다. 만에 들어온 바닷물은 오후의 햇빛을 받아 은빛으로 보였고. 넓다란 주차장 한 켠에 차를 대고 레스토랑에 가까이 가고 있을 때 은하의 가슴은 조금씩 콩닥거리며 뛰어 오기 시작했다. ‘철렁철렁’ 커다란 돌을 여러 겹 쌓아 만든 방파제에 바닷물 부딪히는 소리가 더욱 그녀의 가슴을 울렁이게 만들고 있었다. 회사에서 일할 때 고객들을 많이 상대해 왔었지만 한 여자의 자격으로 한 남자를 만난다는 것이 도대체 얼마 만인지... 묘한 설레임과 흥분이 느껴져 왔다.
은하는 애써 들뜬 마음을 가라 앉히고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갔다.
가슴이 깊게 파인 반짝이 소재 탑을 입은 호리호리한 백인 여자가 은하를 맞았다.
“Hi, how are you this afternoon?(어서 오세요. 안녕하십니까?)”
“Fine, thanks.(네, 고마워요.) I’m looking for Mr. Kim.(미스터 김을 찾고 있어요.)”
“Oh, he’s waiting for you.(아,네, 그 분이 기다리고 계세요.) This way, please.(이쪽으로 오시죠.)”
그녀의 안내를 따라 레스토랑 왼편으로 들어서자 칵테일 바가 나왔고 그 너머 창가 테이블에 태식이 앉아 바닷물이 맞닿은 듯 느껴지는 창 밖을 보고 있었다.
“Thank you.(고마워요.)”
은하는 안내해준 빨간 머리의 리셉셔스트에게 살짝 미소 지어 보이며 말했다.
창 밖을 내다 보다 은하를 본 태식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이 마주친 두 사람은 서로를 잠시 바라보며 가볍게 웃었다.
“찾아오기 힘들지 않았죠?”
마침 리셉셔니스트가 빼내준 의자에 막 앉으려는 은하에게 태식이 먼저 말을 부쳐왔다.
“네, 쉬웠어요.”
“허허 시험문제 물어본 것 아닌데...”
자리에 앉으며 던지는 그의 농담에 둘은 함께 웃었다.
곧 웨이트리스가 마실 것을 주문 받으러 왔을 때 은하가 핑크 레이디를 주문하자 태식도 같은 것으로 주문했다.
저녁식사 하기에는 약간 이른 시간이라 손님들이 많지는 않았지만 드문드문 이른 저녁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바닷물이 아주 가까이 있네요.”
은하가 넓고 길게 설계된 창을 내다 보며 말했다. 삼면이 유리로 된 레스토랑은 마치 물 위에 떠 있는 것 처럼 바닷가에 인접해 지어져 있었다. 건물 아래 부분에 바다 속으로 여러 개의 기둥을 세워 건축한 스타일로 지은. 인접한 바다 바로 건너 맞은편에는 샌프란시스코 시내의 스카이라인이 선명하게 보였고 시내 북쪽으로 난 아치형의 금문교도 높이 솟은 두 교각을 선명하게 내놓은 채 그 붉은 색을 드러내고 있는 오후였다.
“샌프란시스코는 다 구경하셨죠?”
창이 만들어낸 한 폭의 사진 같은 경치를 내다 보며 은하가 태식을 보며 물었다.
“아직 많이는 못했지만 대충이요.”
“어디 어디 가 보셨어요?”
“ 피셔먼즈 워프하고 유니온 스퀘어 전차 타는데, 차이나 타운 정도요.”
“네에, 전 금문교가 황금색일줄 알았는데 붉은빛 이더라구요. 샌프란시스코에 안개가 자주 끼니까 안개 속에서도 잘 보이라고 그랬다죠 아마.”
은하가 말을 마칠 때쯤 연갈색 머리를 뒤로 단정히 묶은 아담한 체격의 웨이트리스가 “Enjoy your drink.(맛있게 드세요.)” 하더니 빛깔 고운 칵테일 두 잔과 메뉴판 두개를 테이블 위에 놓고 갔다. 삼각형 모양의 칵테일 잔을 찰랑 찰랑 채우고 있는 맑은 분홍빛 음료. 마셔 버리기 아까울 정도로 고운 색. 은하는 잔을 들어 잠시 고운 색을 바라보았다.
“칵테일 괞찮아요?”
은하가 핑크색의 칵테일을 함께 나온 빨대로 젓다 한 모금도 채 마시기 전에 태식이 물어왔다.
“후후 어쩌죠? 아직인데요.”
은하가 눈웃음을 보내자 태식이 웃었다.
“그럼, 그 쪽은요? 맛있어요?”
“어쩌죠? 너무 괞찮은데요.”
태식이 ‘어쩌죠?’ 하던 은하를 따라 말하자 둘이서 또 싱긋 웃었다.
두 사람은 그릴드 씨배스를 주문해서 먹었다. 가재 수프가 나오고 나서 뼈 없이 발라낸 흰살 생선 필레를 그릴에 살짝 구워낸 뒤 쪄낸 아스파라가스와 레몬 피스와 함께 서브된 생선 요리는 가는 실파 같이 생긴 타임과 들국화 모양의 애잔한 꽃잎을 하나 얹어 나왔다.
먹어 없애기에는 안타까울 만큼 예쁘게 장식된 생선을 포크로 잘라 먹으며 태식은 은하가 궁금해 하며 물어 보는 데로 자신의 이야기를 해 주었다. 삼 형제의 두 번째로 원래 태생은 충청도인데 초등학교 때 사업하시던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이사했다는 거며 대입 때 재수한 이야기, 학위는 미시건에서 끝냈다는 것, 세베티칼(안식의) 교환 교수를 동부쪽으로 가려다 나노 기술이 발달한 샌프란시스코 쪽으로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 등.
“네에.” 하면서 듣고 있던 은하와 태식 앞에 아담한 몸매의 웨이트리스가 다시 와 Would you care for dessert?(후식 드실건가요?)” 했을 때 두 사람은 이미 포만한 상태였다. 대부분의 미국 레스토랑은 어찌나 음식을 많이 주는지… 먹기도 전에 기가 질리는 적도 있었다.
“나가시죠.”
굳이 자기가 나오라고 했으니 계산은 자신이 하겠다는 태식이 크레딧 카드로 팁 까지 지불을 끝내자 두 사람은 레스토랑 바로 옆의 피어(바다로 난 교각)로 걸어갔다. 너무 많이 먹었으니 좀 걸어서 정리를 하자는 의미로.
피어는 제법 긴 다리로 바다 먼 곳 까지 한참이나 죽-- 이어져 두 사람이 앞만 보며 걷기에 좋았다. 늦은 오후의 햇살이 두 사람의 어깨에 나란히 얹혀 편안한 느낌을 주고 있을 때 간혹 낚시대를 바다 밑에 드리운 채 간이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한가로와 보였다. 시멘트로 된 바닥 위를 걷는 소리가 또각 또각 경쾌한 소리를 내고 있었고. 기우는 햇빛을 받은 물살이 작은 바람에 실려 한 쪽으로 밀리는 듯 하자 나무 다리가 물살 반대 방향으로 둥둥 떠내려 가는 느낌이 들었다. 바람에 일렁이는 물살이 쉬지않고 찰랑찰랑 소리를 내고 있는데.
“해가 무척 길어 졌어요. 아직도 밝으니…”
“그렇네요… 골프 레슨 나오실건가요?”
“… 아직 잘 모르겠어요.”
“…”
“왜요? 궁금하세요?”
“… 그 쪽이 없으니까 이상하게 골프장이 텅 빈 것 같아서요.”
바지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은 채 태식이 하늘을 한 번 올려다 보았다.
“정말 그랬어요?”
“…전 거짓말 같은건 안하는 놈입니다.”
그는 여전히 해가 기운 하늘만 보며 걷고 있었다.
“아이 순 거짓말이다. 지금 한 말이 거짓말 아니면 뭐예요?”
“그런가요? 하하”
“그런데 생일은 언제죠?”
“여름, 그러니까 8월이에요. 그 쪽은요?”
태식이 은하를 보았다.
“전 1월이요.”
“음식은 뭘 좋아하세요?”
은하가 명랑 단순 과의 질문을 계속했다.
“음 다 먹어요.”
“그럼 혐오 음식도요?”
“아니오, 그런건 잘 안먹어 봤어요.”
“무슨 색을 좋아해요?”
“음…….. 곤색 같은거.”
“후후 그런데 우습지 않아요?”
태식이 “왜요?” 하는 얼굴로 은하를 보았다.
“우리가 지금 이 나이에 스무살 애들이 주고 받는 대화를 할 수 있다는거.”
은하가 새삼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태식를 보다 말을 이었다.
“난 이제 너무 나이가 들어서 이런 말들을 주고 받을 기회가 다시는 없을거라 생각했어요. 우리 나이면 어디서 어떻게 돈 벌고 누가 출세하고 뭐 이런 얘기 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러고 보니 그렇네요.”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이상하다는 얘기 아닌가요?”
은하가 ‘우리’라는 단어를 써 놓고 속으로 묘한 기분을 느끼고 있을 때 태식도 ‘우리’라는 단어를 썼다. ‘정말 이상한건가’ 하는 장난스런 표정으로.
“우리 그렇게 이상해요?”
“우리 지금 잠시 스무살로 망가진 것 맞죠?”
“하하하”
둘은 망가졌다는 은하의 표현에 함께 바라 보며 웃었다.
“그 쪽은 어떤때는 정말 스무살인 것 같을 때가 있어요. 그거 알아요 본인이?”
“방금 그 말 보기 보다 귀엽다는 뜻으로 접수 할게요.”
“산뜻하고 명랑해 보일 때 그래요.”
“그럼 우리 망가진 김에 왕창 망가져 볼까요?”
태식이 ‘어떻게요?’ 하는 얼굴로 다시 은하를 보았다.
“왜 있잖아요. ‘나 잡아봐라’ 같은거. 영화에서 여자가 막 뒤어 가다 이유도 없이 넘어지면 남자는 뒤 따라 오다 괜히 같이 넘어지는거. 그리고 또 있다. 여자가 느티나무 같은 나무 기둥을 잡고 빙글 빙글 돌면서 분위기 잡는거.”
“하하하, 은하씨 정말 우스운 여자예요. 분명 철 들었는데 이럴 때 애들 같아요.”
“그만 웃어요. 나 망가졌다고 속으로 욕하고 있죠 지금?”
은하가 혼자서 웃고 있는 태식의 얼굴을 보며 다그치듯 물었다.
“저 사실은 보기 보다 훨씬 우스운 여자예요. 사람들이 첫인상 보고 얌전한 요조숙녀로 봐 주지만 실은 그렇지 않을 때가 더 많아요.”
“예를 든다면요?”
“음… 우선 말도 잘 하고 요즈음 애들 노래도 잘 부르고 이상한 날씨도 좋아하고… 흐리고 비 오는 날 같이… 음… 또 꿈도 황당하구요.”
“꿈이요?”
태식이 반문했다.
“네 꿈이요.”
“무슨 꿈인지 알고 싶어요. 알아도 돼요?”
나란히 피어 끝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다 태식이 잠깐 멈춰서며 은하를 보았다.
“웃으면 안돼요.”
웃으면 안된다는 은하의 말이 지레 웃겨 태식이 웃다 은하가 계속 쳐다 보자 “하하 안 웃을게요.” 했다.
“벌써 웃고 있잖아요. 지금.”
“아뇨. 이젠 안웃어요. 봐요. 안웃고 있잖아요.”
태식이 애써 표정관리를 하고 있는 것이 은하의 눈에 그대로 보였다.
“그럼 말할께요.”
“네.”
은하가 태식의 얼굴을 살폈다. 그는 아직 괜히 나오는 웃음을 참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웃으면 어떻할래요? 내기해요.”
“음… 여기서 저 끝까지 업고 가기 어때요?”
그가 피어의 끝을 가리켰다.
“안 웃으면 내가 업어줘야 되는 것 아니죠?”
“그건 그 쪽 마음대로 해요.”
“싫으면 안 업힐 권리도 있구요.”
“조건이 너무 많은데요.”
“좋아요. 그럼 말할께요.”
은하가 한참 뜸을 들이다 입을 열었다.
“전… 멋진 드레스를 입구요…”
“입구요오…”
태식은 다음이 궁금하다는듯 ‘입구요’를 반복했다.
“무대에서 노래를 하는거예요.”
“하하하” 태식이 꾹 참고 있던 웃음을 터뜨렸다.
“거봐요. 웃고 있잖아요. 지금.”
“너무 귀여운 꿈이라서요.”
“이루어 질 수 없는 꿈이라 생각해요?”
“아니오. 그게 아니고… 잘 될 것 같아요. 그리고 그쪽에게 어울릴 것 같아요.”
그는 아직도 빙긋이 웃고 있었다.
“거짓말 아니죠?”
“아니에요.”
태식이 손까지 내저으며 오바했다.
“그런데 혜리가요, 내가 카페 차리면 몰라도 불러 줄 사람이 없을거래요 글쎄.”
“어이 혜리씨 안되겠네요.”
“맞아요.”
두 사람은 거의 피어 끝에 오고 있었다. 황혼이 곱게 물들어가는 서쪽 하늘은 예뻤다.
“노을이 연분홍빛을 내는지는 처음 알았어요. 어머 그 위는 보라빛이에요.”
연회색의 가벼운 구름과 분홍이 만나서 흐린 보라빛을 내는듯 했다.
“어----- 예쁘다.”
은하와 태식은 거의 피어의 끝에 닿았다. 출발점이었던 육지는 한참 멀게만 느껴지는, 외딴 한 점 작은 섬에 두 사람만 서 있는 느낌이었다. 더 이상 갈 수 없는 끝에 왔을 때 둘은 레스토랑에서 보다 눈 앞에 더욱 가까이 다가온 금문교와 샌프란시스코의 빌딩숲을 바라 보다 왼쪽 난간 한 켠에 기대섰다.
나란히….
길다란 베이 브리지와 샌프란시스코의 빌딩들이 물결 너머 보이는데…
별 말이 없이,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피어의 끝이 주는 적막감을 느끼다 태식이 저…하며 그 동안 참아왔던 말을 꺼냈다.
“…보고 싶었어요.”
은하는 정말이냐고 묻지 않았다. 대신 ‘나 기대봐도 돼죠’ 하며 태식의 어깨에 살며시 머리를 기대 보았다. 동시에 그의 오른팔이 은하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시원한 바다 바람이 은하의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갔을 때 레즈베리향 같은 달콤하고 향긋한 향내가 났다.
두 사람은 황혼이 지고 옅은 어두움이 드리우도록 그대로 있었다. 만 바로 건너 도시에선 하나 둘씩 불빛이 살아 나고 저무는 하늘가의 피어를 따라 늘어선 가로등이 줄 지어 밝혀 지고...
“춥네요.”
태식이 가만히 춥다고 한 은하를 보았다.
“한 번만 안아 주면 안될까요?”
태식이 말없이 은하를 가슴에 안았다.
“이제 따뜻해요?”
“네.”
“내일 샌프란시스코에 함께 안가실래요?”
은하를 살며시 안은 채 태식이 물었다.
“…”
“포웰가에 있는 세인트 프란시스 호텔에서 내일 오전에 워크샵이 있어요.”
“네에…”
“같이 가서 시내 구경도 하고 밥도 먹고 하시죠.”
“네.”
“제 차로 함께 가요, 내일.”
“네.”
“그런데 ‘네’ 밖에 모르는 사람 같아요.”
“네. 지금은요.”
둘은 서로가 키득키득 웃고 있다는 것을 금새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