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회
딩딩동… 딩동…
비 오는 아침이었다.? 바람도 오다가다 불어 옆집 베란다에 매달아둔 풍경 소리가 간혹 딩동댕 흔들리는 소리를 내고있는… ?
은하는 빗방울이 묻은 거실 창밖을 내다 보았다.? 움츠러든 청보라색 나팔꽃잎들 위로 비가 제법 내리고 있었다.? 작은 참새 한 마리가 창 앞의 푸른 잎 무성한 나무에 앉아 비를 피하고 있는 것도 보였다.? 회색 비구름이 낮게 떠 드리워 있을 때 세상은 마치 낮은 천장을 가진 집인 듯 사람들을 아늑하고 편안하게 감싸주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세상 만물이 구름 밑으로 낮게 떠돌아 다니는 듯 가까운 느낌이 들기도 했고.
후두둑 떨어지는 빗소리를 듣다 은하는 CD의 스위치를 눌렀다.?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 ? ? ? ?
카테리니행 기차는 여덟시에 떠나가네 ? ? ? ? ? ? ? ? ? ? ? ? ? ? ? ? ? ? ? ? ? ?
십일월은 내게 영원히 기억 속에 남으리
내 기억 속에 남으리?
카테리니행 기차는 영원히 내게 남으리
함께 나눈 시간들은 밀물처럼 멀어지고
이제는 밤이 되어도 당신은 오지 못하리
당신은 오지 못하리
비밀을 품은 당신은 영원히 오지 못하리
기차는 멀리 떠나고 당신 역에 홀로 남았네
가슴 속에 이 아픔을 남긴 채 앉아만 있네
남긴 채 앉아만 있네
가슴 속에 이 아픔을 남긴 채 앉아만 있네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곡:Theodorakis? 가사번역:신 경숙? 노래:? 조 수미? ? ? ?
슬퍼서 아름다운 노래, 누군가를 어쩔수 없이 멀리 떠나 보내고 있는 듯한 노래 ‘기차는 8시에 떠나네’였다.? 너무 슬퍼서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 그래서 그냥 좋은…? 이 노래를 듣고 있으면 마음은 어느새 애끓는 노래에 실려 저 먼 그리이스 어느 작은 마을의 기차 정거장으로 가 홀로 앉아있는 듯 하곤 했다.? 저무는 석양 아래…? ?
?은하는 노래가 주는 여운을 즐겼다.? 배우가 무대에서 남의 인생을 연기하며 희열을 느끼듯 그녀도 언제 부터인가 노래가 말해 주는 이야기에 자신의 모든 것을 싣고 싶어 했다.? 고등학교 때 음대에 가고 싶었지만 그것은 막연한 꿈이었을 뿐 구체적인 실상을 드러내 놓기에는 너무도 어린 나이였다.?
?주변의 권유로 E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나서 맞선으로 결혼하자 곧 도미 유학 길에 오르는 남편을 따라 보스턴에 왔을 때 그 곳에서 그녀는 영문학 석사 과정을 밟았었다.? 정훈의 박사학위가 끝나고 한국으로 귀국했을 때 은하는 외국 항공사에 일 자리를 얻어 내내 다녔을 뿐 성악을 배워 보겠다는 생각은 잊은지 오래된 이야기였고.? 작년에 이곳에 와서 혜리를 만나 “너 나 노래 좀 가르쳐 줄래?”할 때까지는.
은하는 되도록 작은 소리로 노래를 따라 불러 보았다. ?
카테리니행 기차는 여덟시에 떠나가네
십일월은 내게 영원히 기억 속에 남으리
내 기억 속에 남으리
카테리니행 기차는 영원히 내게 남으리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최근에 새로 이사와 옆에 사는 젊은 백인 여자는 밤 교대 간호사인지 주로 아침시간에 집에 있고 밤으로 일을 다니는 것 같았다.? 그녀에게 방해가 되지 않으려면 되도록 오후 시간이나 운전하는 자동차 안에서 노래 연습을 하는 수 밖에 없었다.? 아파트는 목조에다 시멘트를 입혔는지 위층에서 걸어 다니는 발자국 소리부터 변기 물 내리는 소리 등이 아래층에 사는 은하네 까지 들려오곤 하였다. ?
아파트의 외양이 분홍빛 지중해 풍인데다 심어 놓은 야자수가 이국적이라 마치 리조트에 온 것 같은 느낌을 자아내는 것이 좋아 이곳에 들었었다.? 산을 통과해 버클리 대학으로로 가는 전철역도 가까운 것이 한 몫 했지만. ?
은하가 노래를 끝내갈 때 즈음 전화벨이 울렸다. “아침 나절에 누굴까…” ?
“은하야, 나야.”
혜리는 은하가 헬로우 할 새도 없이 수화기를 들자 바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
“응, 왜?”
은하는 스피커의 볼륨을 낮추었다. ?
“오늘 날씨 죽이게 좋다, 얘.? 안 그러니?”
“왜 아냐, 너무 좋다.? 그지?”
“아이 난 비 오는 날이 좋더라.”
혜리가 콧소리 섞인 목소리를 내더니 “이런 날 좋다고 하는 사람은 아마 너하고 나 밖에 없을거야.? 이 세상에.? 후후”하고는 웃었다.
“맞아, 혜리야.? 근데 또 있었잖아.? 왜 지난 번 미장원 갔다가 읽은 여성지에서 어느 중견 연극 배우하고 탤런트.? 그이들도 비오는 날 서로 날씨 좋다 그런다는데.”?
“가끔씩 같은 부류가 있어서 다행이다,얘.? 근데 너 지금 뭐하니?”
“그 노래 있잖아. 내가 좋아 하는 거.? 그거 듣고 있었어, 나.”
“기집애, 사연도 없는 주제에 그런 꼴꼴한 노랠 듣냐?? 잘 났어 정말.”
“그럼 어울리는 사연 하나 만들어 봐?”
“에이그 점점.”
“왜?? 난 안 어울리니??
“얘 그건 그렇고, 나 오늘 골프 렛슨 못 가게 생겼다, 어쩌니?”
“왜 무슨 일 있어?”
“응, 우리 준이네 유치원에 헬퍼 가는 날인데 내가 깜빡 했지 뭐니, 글쎄.? 오늘 아침에 달력 보고 알았어.? 나 요즈음 왜 이러니?? 그러니까 나 기다리지 말고 잘 하고 와.? 네가 기다릴까봐 전화 했어.? 얘 근데 오늘 비 와서 레슨이 있을까 몰라, 정말.? 사람들이 어디 나오겠니?”
“글쎄…”
“얘, 골프장에 전화해봐.? 잘 하면 레슨 캔슬 됐을꺼야.”
“알았어.? 그냥 나갔다가 아무도 없으면 연습이나 하고 오지 뭐.? 타석에 지붕 있잖아.”
“그래, 그래라 뭐.? 운동해서 남 주냐?? 우리 나이에? 한 미모 하려면 운동해야 하지 않겠니?? 후후.”
“나 미국 있는 동안 골프 좀 접수해 보려고 한다, 왜?’
혜리에게 걸려 온 전화는 한참이나 계속되다가 어머 내 정신 좀 봐. 나 가야돼 하는 말로 끝이 났다. ?
비가 좀 그치려나 은하는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비는 조금 잦아 들었고 저쯤 하늘에서 빠꼼이 맑은 기색을 드러내고 있는 부분이 곧 이쪽으로 번져 올 것 같은 분위기였다.? 줄여 놓았던 CD의 볼륨을? 올리고 다시 들어 볼까 하던 은하는 이미 끝나버린 CD의 스위치를 눌러 꺼버렸다.? 대신 주방으로 가 오늘? 정아에게 만들어 줄 함박 스테이크용 갈은 고기를 냉동실에서 꺼내 싱크대 위에 얹어 놓고 곧 화장을 시작해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은하는 파우더 룸 거울 앞으로 가 막 파운데이션을 손등에 묻혀 색을 조절하다 거울 앞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한 번 점검해 보려는 듯이 이리 저리 돌려 보았다.? 요즈음은 왠지 거울 앞에 서면 자신의 모습을 한 번 씩 점검해 보는 습관이 생겨난 것 같았다. ?
거울 속에는 어제 밤에 보았던 것 처럼 서른 중반을 훨씬 넘긴 나이였지만 아직은 단아하고 고운 얼굴과 몸매를 지닌 여자가 서 있었다.? 완숙미라고 할까, 금방 잡아 올린 물고기 처럼 이십대의 풋풋하고 생생한 느낌이 주는 긴장감 보다는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느낌의 부드러움 같은 것이 느껴져 왔다. ?
은하는 자외선 차단이 든 파운데이션을 꼼꼼이 얼굴에 펴 바른 후 가루 분을 덧 발라?
희고 뽀송뽀송한 느낌의 피부 표현에 신경을 썼다.? 눈썹은 진갈색에다 회색 아이섀도우를 섞어 묻혀 정리해 주고 눈두덩이에는 펄이 든 옥색 계열을 펴 발라 주었다.? 눈 꼬리 부분에 살짝 짙은 청색 섀도우를 묻혀주고.? 입술은 옅은 핑크색과 코럴 계열의 색.? 그녀가 부담 없이 즐겨 하는 색이었다.? 그녀는 여기에 투명 립그로스로 덧발라 젖은 듯 반짝이는 입술을 만들어냈다. ?
색조 화장이란 묘한 것이어서 자칫 밋밋하기 쉬운 은은해 보이는 그녀의 동양적인 흰 얼굴을 화사하고 생기 있게 살아나게 해주었다.? 특히? 펄이든 연한 푸른 계열의 아이섀도우는 그녀의 선이 곱고 깔끔한 외모를 고급스럽고 화려한 느낌이 들 수 있도록 해 주는 역할도 하곤 했다. ?
은하는 아침에 일어나면 되도록 이른 시간에 재빠르게 화장하는 습관이 있었다.? 물론 10년 가까이 사회 생활을 하다 보니 매일 아침 자신을 가꾸어야 했지만 정훈도 깔끔하게 화장한 은하의 모습을 좋아했다.? 은하 자신도 화장하고 나면 하루가 상쾌해지는 기분을 느꼈고.? 어쩌다 후줄근한 모습으로 게으름을 부리고 있을라 치면 정훈은 영 못마땅한 얼굴로 ‘나태한 여자가 제일 싫다’는 식으로 말하곤 했다.
?
은하는 레이어를 넣어 커트한 어깨 길이의 머리카락을 평범한 검은 줄로 묶으며 속으로 말했다.
“정 은하, 오늘은 나이스 샷 알지?”
은하가 버클리의 골프 연습장에 닿았을 때 비는 그쳐 있었다.? 파킹랏에는 비 맞은 차들이 대여섯 대 세워져 있을 뿐 텅 비어 있었다.? “레슨이 없나?…”? 함께 레슨을 받는 조 교수 부부나 미세스 양의 차도 없었다.? ?
태식의 차도…
그의 검은색 볼보 승용차를 은근히 찾던 그녀는 혼자서만 괜한 상상을 한 것 같아 스스로 부끄러워졌다. ?
“나 정아 엄마 맞아?”
은하는 자동차 트렁크에서 드라이버와 7번 아이언 등 몇 개를 거내 들고 흰 장갑도 꺼내 챙겨 든 뒤 지붕이 있는 1층 레인지로 향했다.? 레인지에는 너그럽게 보이는 백인 할아버지와 중국계인지 학생으로 보이는 젊은 청년 두 사람이 나란히 서서 볼을 때리고 있었다.? 한 학생은 은하 보다 더 초보 골퍼인지 스윙의 각 동작을 몇 개로 끊어 계속 한 동작만을 여러 번 반복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
“비 오는 날도 연습 나온 것을 보면 곧 늘겠군, 후후.” ?
자동차 키 홀더에 같이 걸어 놓은 공 찾는 카드를 찾아 볼 기계에 꼽자 바구니에 볼이 콰르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쏟아져 담겼다.? 공 바스켓을 들고 어디쯤에 자리를 잡을까 살피던 그녀는 중국 학생들 뒤쪽에 고무 티가 하얗게 알맞은 높이로 올라와 있는 티박스를 발견하고 그 쪽으로 향하기로 하고 걸음을 옮겼다.
몇 걸음을 옮겼을까. ?
“저…? 이거 그쪽 거 아니예요?”
뒤에서 나는 말 소리에 가던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다 보자 언제 왔는지 태식이 서 있었다.? 그가 내민 그녀의 흰색 장갑이 눈에 들어 오고.? 은하는 “아마 안 올거야.”생각했던 태식을 보자 내심 조금 당황했지만 이내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장갑을 받아 들며 그에게 물었다.
“어머, 이거 제가 흘렸어요?”
“네.”
“어디서요?”
“여기서 조금 전에…”
“고마워요.? 빌려 주신 책은 잘 보고 있어요.”
?산뜻하게 미소 지으며 그에게서 받아 든 장갑을 든 채 은하가 돌아 서려 하자 태식이 저… 하는 바람에 그녀는 돌아 서려다 말고 태식을 보았다.? 은근히 기다리고 있던 그에 대한 마음을 감추고 싶어 자신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돌아 서던 그녀였다.?
“저…? 그날 밤엔 잘 주무셨어요?’
은하가 일부러 언제 인가 하는 눈빛을 보내자 태식은
“그 커피 마신 날…”하며 말끝을 흐렸다.
“아 네,”
은하가 기억난다는 듯이 이내 아는 척을 하며 장난기를 잔뜩 섞어 대꾸했다.
“어쩌죠?? 덕분에 하얗게 밤을 지샜는데요.”
“…? 그럼 미안해 지는데요…” ?
그가 정말 미안한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서있는 양이 우스워 은하는 더 의기양양해져 태식을 향해 말했다. ?
“음… 그럼 다른 것으로 갚으세요.”
‘…그럼… 이따가 괜찮으세요?”
그가 은하를 보면서 어색해 하며 말을 이었다.
“시간이……”
태식도 여자에게 시간 있느냐는 말을 물어 본 지가 한참 옛날 일인지 그 말이 쉽게 입에서 나오는 것 같지가 않았다.? 그가 소년 처럼 쭈뼛거리며 시간이… 하며 다시 물어 올 때 은하는 사십 넘은 남자 맞아 하는 생각을 하며 그 모습이 우습기도 하고 순수해 보이기도 해서 놀려 주고 싶어졌다.
“흐흐, 시간이 영어로 뭐냐구요?”
“허허허”
은하의 그 말에 둘은 함께 소리 내어 웃었다.
“좋아요.? 시간을 내서 그쪽의 죄책감을 기꺼이 덜어 들이죠.”
큰 선심 쓰듯 이 말을 한 뒤 은하는 돌아서서 타석으로 산뜻하게 걸어갔다.
검은색 바지에 상체의 적당한 선이 드러나는 아이보리색 티셔츠를 입고 뒤 돌아 서서 걸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 보는 태식의 가슴이 소년 처럼 뛰어 오고 있었다. ?
그녀는 태식에게 괜히 이유도 없이 호감이 가는 여자였다.? 지적이고 단아한 모습에 절제되어 있는 상냥스런 태도가 너무나 여성스러워 보이는 그녀이기 때문일까.? 외모와는 또 다르게 시원하고 털털한 면도 재미있는 구석도 있어 만나면 기분이 좋은 까닭일까.
은하가 타석에 자리를 잡자 태식도 볼을 빼와 은하의 타석에서 두 타석 앞에 자리를 잡았다.? 곤색 캐주얼 면 바지에 흰색 상의를 입은 그의 뒷모습이 은하의 눈에 들어왔다.? 멋진 스윙을 하는 그의 모습도.
태식은 별 다른 말이 없는 남자인 것 같았다. ? 복잡하지 않고 심플한 남자의 매력을 그는 가지고 있었다.? 대체로 조용하고 과묵한.? 그는 상냥하거나 다정다감한 타입은 아니었지만 언제나 그 자리에 그대로? 있어 줄 것 같은 느낌을 주는 믿음직한 남자였다. ?
은하의 볼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갔다.
그의 볼도 함께 아득히 선을 그리며 날아 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어디로 갈까요?”
한 시간 여의 연습이 끝나고 회색 빛 골프 장갑을 벗어 카트에 실린 가방 안에 넣으며 태식이 물어왔다.
“음, 글쎄요…”
“어디 가고 싶은 데는 없어요?”
“음… 아하, 맞다.? PF Chang’s 에 가죠.? 미국식 중국 음식점이라 분위기가 꽤 산뜻하잖아요.? 가격도 좋구요.”
은하가 태식의 얼굴을 보며 괜찮죠? 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
“그러시죠.”
“배고파요?”
타석을 빠져 나와 파킹랏으로 걸어 가며 그가 물었다.
“네, 어느새 12시가 되어 가잖아요.”?
은하가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대답하자 태식이 웃어 보였다.
그는 손목 시계를 한 번 보았다. ?
태식은 은하와 같은 곳에 나란히 차를 세운 것 같았다.? 자신의 흰색 어코드 옆에 가지런히 주차해 놓은 태식의 차를 보자 은하는 기분이 묘해지는 것을 느꼈다.? 넓은 장소를 다 두고 자신의 차 옆에 세웠다는 것이 그랬다.
“제 차 옆에 세우셨네요.”
“네, 반가와서요.”
“같은 한국 사람이라서요?”
“…네.”
“PF Chang’s가 어딘지 아세요?”
“뒤 따라 갈께요.”
“놓지면 안돼요.”
“그럼 제 쎌 번호 드릴께요.”
“말해 보세요.? 외울께요.”
“335-5009’
“335-5099?? 삼삼오오 영구우다 그쵸?? 영구말이에요, 하하.”
은하가 무슨 발견이라도 한 듯 좋아하자 태식은 “그러네요.”하며 빙긋이 웃음 지으며 물었다
“그 쪽은요?”
“저는요, 287-5381. 어렵죠?”
“네, 꽤 복잡한데요.”
“외울 수 있을 것 같아요?”
“놓지면 붙잡아야 하니까 외워야겠죠?”
“어디 한 번 외워 보세요.”
“2 8 7 5 3 8 1.”
그가 또박 꼬박 숫자를 외워냈다.
“갈까요, 그럼.? 24번을 타다가 680하이웨이를 월넛크릭 쪽으로 타고 마운틴 디아블로에서 나오시면 돼요.”
은하가 들고 있던 골프채와 신발 등을 벗어 트렁크에 챙겨 넣으며 역시 뒤 트렁크에 골프 가방과 카트 등을 집어 넣고 있던 태식에게 일러 주자 그는 은하 쪽으로 가볍게 고개를 까닥 하며 알겠다는 표시를 해주었다.?
“그럼 떠나시죠.”
은하가 앞서서 가고 태식은 그녀를 ?아 꼬불꼬불한 버클리의 언덕길을 내려온 후 그들은 월넛 크릭으로 향하는 프리웨이에 올랐다.? 백뮤러로 보이는 태식은 운전에만 열중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저 앞만 보며 은하를 따라 오고 있는.? 순간 은하는 자신을 ?아 오고 있는 남자에 대한 묘한 쾌감 같은 것을 느꼈다.? 마치 두 사람이 무슨 공범자 같다는 생각도.? 은하는 태식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가끔씩 선글라스 너머 백뮤러로 그를 훔쳐 보았다.? 그의 표정은 시종일관인 것 같았다.
은하가 하이웨이에서 두 번째 차선으로 계속해서 주행하자 그도 은하 뒤에 바짝 붙어서 따라 오고 있었다.? 그러나 몇 번 다른 차들이 은하와 태식의 사이에 끼어 들어 왔을 때 은하는 속력을 줄여 끼어든 차들이 스스로 다른 차선으로 옮겨 가도록 했다.? 옆 차선의 트럭 두 대가 속력을 내며 휙휙 달려 나갈 때 ‘마운틴 디아블로 넥스트 엑싯(다음 출구)’표지판 사인이 눈에 들어 오자 은하는 오른편 깜빡이를 켜서 내리는 신호를 보냈다.? ? ? ? ? ? ?
레스토랑은 큰 쇼핑몰 안에 자리잡고 있어 찾기가 수월했지만 한창 점심 시간이라 레스토랑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주차장은 만원이었다.? 은하만 마침 나가는 차가 있어 그곳에 주차를 할 수가 있었고 태식은 쇼핑몰에 준비된 대형 주차장으로 가야 했다.
먼저 주차한 은하는 레스토랑 입구에서 태식을 기다렸다.? 프라다 풍의 검은 팬츠에 몸에 적당히 피트되는, 둥근 네크 라인 제법 시원하게 파인 아이보리색 긴 팔 티셔츠, 뒤가 트인 납작한 굽의 샌달, 청회색 자가드? 계열의 숄더 백.? 이런 것들이 어우러져 그녀의 모습은 상당히 심플한 도회적인 고급스러움을 풍기고 있었다.? 운동할때 맸던 검은색 고무줄을 풀고 반짝이는 집게 핀으로 올려 고정해 놓은 머리채가 풍성해 보여 자칫 수수해서 밋밋할 수 있는 그녀의 갸름하고 참한 얼굴을 화려하게 받쳐 주고 있었다.? 귓볼에 딱 붙는 작은 꽃잎 모양의 다이아 귀걸이가 깔끔한 인상을 풍기고 있었고.? ?
“사람이 많네요.”
은하가 차를 대고 오는 태식과 레스토랑 문을 열며 말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아직 자리 나기를 기다리고 있는 몇몇 백인들이 있었고 프론트의 안내 직원은 “May I have your name, please? (성함을 말씀해 주시죠.)“ 하며 은하와 태식을 상냥하게 맞았다. ? ? ? ? ? ? ? ? ?
10분 정도 잠시 기다려야 한다는 그녀의 말에 따라 의자에 앉아 기다리던 두 사람이 흰색 블라우스 풍의 셔츠를 옆이 트인 긴 검은색 스커트에 넣어 입은 키가 큰 금발의 웨이트리스를 따라가 앉은 곳은 커다란 흰 말 조각상 앞이었다.?
“뭘 하실래요?”?
안내 하던 웨이트리스가 주고 간 메뉴를 보다 태식이 물었다.
“우리 점심 메뉴 두 개 시켜서 나눠 먹지 않을래요?? 하나는 새우나 소고기 그리고 또 하난 샐러드 같은 거.? 뭘 좋아 하세요?” 메뉴를 들여다 보던 은하가 물었다.
“아무거나요.? 그 쪽이 좋아하는 것으로 하시죠.”
“그럼, 슈림프 위드 랍스터 소스에다 시금치 샐러드 어때요?”
“네.”
은하는 시원하게 생긴 아이스 워터 두 잔을 들고 나타난 남미 풍의 웨이터에게 두 가지를 주문 했다.
“조 교수님 하고는 아주 잘 아시는 사이 이신 것 같았어요.”
“네, 형 친구예요.? 제가 버클리에 1년 비지팅 스칼라로 올 수 있게 소개시켜 주시고 도와 주셨어요.? 여기서 강의도 함께 듣고 도움도 많이 주시죠.? 저녁에 오라고 해서 댁에도 여러 번 갔었어요. ”
“네에.”
“혜리씨 하고는 친하신 것 같던데…”
그가 얼음 조각이 가득 든, 레몬 조각이 띄워진? 물잔을 들고 물을 한 모금 마시며 물었다.
“네, 고등학교 2학년 때 같은 반이었구요, 대학도 과는 다르지만 같은 학교를 다녔어요.? 그 뒤에 제가 정아 아빠 따라 보스턴에 사 오년 있는 동안 혜리가 재미교포하고 결혼해서 미국 L.A.에 왔다는 소식만 들었었는데? 여기 있을 줄 몰랐어요.? 오클랜드 한국 마켓에서 만났다는 것 아니에요.”
“네에.”
“우습죠?? 이 넓은 곳에서 한 지점에서 만날 수 있다는거.”
“네.”
태식이 레몬향이 퍼진 물잔을 들어 다시 물을 마셨다.
음식은 꽤 시간이 지나서야 나왔다.? 부드러운 소스를 끼얹어 볶은 새우와 시금치 잎에 호두를 깨서 올린 샐러드였다. ?
Enjoy your meal.(맛있게 드십시오.) 하며 웨이터가 사라지자 태식이 드시죠 하며 권했다.
“음--? 샐러드 드레싱 맛있다.? 그죠? ”
밑접시에 샐러드와 새우를 나누어 담고 샐러드부터 맛을 보던 은하가 이탈리안 드레싱 처럼 마늘향이 풍기는, 올리브유를 섞은 소스맛에 만족해 했다.
“음, 새우도 맛있어요.”
은하가 새우 하나를 집어 먹으며 부슬부슬한 밥이 담긴 밥통에서 밥을 퍼 밑접시에 담고 있는 태식을 보며 말을 이었다.
“전 데치지 않은 시금치만 잔뜩 있는 것은 미국에서 처음 먹어 봤어요. 그런데 맛 ?I찮죠?? 고소한 호도맛 하고 쌉살한 시금치 맛이.”
“네.”
은하가 오늘 주문한 음식은 성공이야 하는 만족한 얼굴로 태식을 보았다. ?
“그런데 뭐 물어 봐도 돼요?”
새우와 소스를 섞은 밥을 먹고 있던 태식이 ‘그러시죠’ 하는 눈으로 은하를 보았다.
“음… 그러니까 옛날에… 학교 다닐 때 미팅 많이 했어요?”
“…”
“지금 이렇게 말없이 밥만 먹고 있으니까 생소한게 꼭 미팅 분위기 같아서요.”
“하하, 그 쪽은요?”
“먼저 말해 보세요.”
“그렇게 물으니까 정말 미팅 나온 것 같아요.”“
“Is everything alright? (다 괜찮으신가요?)”? 지나 가던 남미 풍의, 젊어서 더 깔끔해 보이는 웨이터가 최대한의 친절함을 발휘해 보였다. ?
“Yes, Thanks.(네, 고마워요.)”? 은하가 그 웨이터에게 눈웃음을 가볍게 보이고 태식을 다시 보았다.
“사실은… 미팅에서 와이프를 만났어요.”
“네에…”
은하가 고개를 몇 번 끄덕였다.?
“몇 학년때요?”
“제가 대학원 1학년때요.”
“네…”
“친구 하나가 미팅이 있는데 못 나갈 사정이 생겼으니 절 더러 대신 나가라고 해서 갔다가 파트너로 만나서 결혼 했어요.”
“그러세요?… 그랬구나…”
이럴 때 “와이프는 예뻐요?” 그럴 수도 없고 뭐라고 해야 할 지 잘 떠오르지 않아 머뭇거리고 있을 때 마침 태식이 입을 열었다. ?
“그럼 그 쪽은요?”
“저요?? 전 소개로 결혼 했어요.? 엄마가 잘 아는 집안의 사람이었거든요.”
“네… 그 쪽은 남학생들이 많이 따라 다녔을 것 같은데…”
“어머, 그렇게 보여요?? 칭찬인가요? 그렇게 접수해요?”
“네.”
은하가 새우를 한 입 베어 물다가 베시시 웃어 보였다. ?
“그런데요, 어쩌죠?? 하나도 건지지 못하고 결국 중매로 결혼했어요.”
은하가 영양가는 하나도 없었다는 표정을 지을 때쯤 점심은 거의 끝나가고 있었고 레스토랑 안의 많던 사람들도 줄어 빈 테이블이 여기 저기 눈에 띄었다.
“꽃 예쁘죠?”
가늘고 길다란 투명 유리 화병에 꼽아놓은 보라빛 난초 두 송이에 시선을 주며 은하가 물었다.? 한 개는 길게 다른 한 개는 낮은 키로 꼽혀있는.
“네 보기 좋아요.”
“제가 어릴 때 우리 집 앞에는 꽃이 많이 피어 있었어요.? 백일홍 채송화에 봉숭아 꽃 난초도 있었거든요.? 그 때가 좋았었는데… 아무런 걱정도 없을 때 였던 것 같아요… ? 아빠가 화단을 예쁘게 가꾸어 놓으셨거든요.? 지금은 안계시지만…”
은하는 난초를 보자 어렴풋이 옛날 어릴적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자상했던 아빠 에 대한 기억까지… ?
이렇게 격의 없는 말을 할 수 있을 만큼 그녀는 태식을 그냥 편안하고 따듯한 남자라고 생각했다.? 무슨 말을 해도 될 것 같은…? 어쩌다 어깨를 빌릴 수 있다면 머리를 기대 보고 싶은…
“저… 실은 말할게 있어요.”
점심을 먹다 말고 잠시 옛 생각을 하고 있는 듯한 은하가‘뭐죠’하는 얼굴로 쳐다보자 태식은 말을 이었다.
“저… 그 쪽을 본적이 있어요.? 두 번. ”
“정말이에요?”
“거짓말 아니에요.”
“아이 뭐예요.? 진작에 말했어야지 지금 와서 그런 말을 하면 어떻게 해요?? 정말 너무하다.”
은하가 귀여운 불평을 하자 태식은 빙긋이 웃었다.? 은하가 자주 쓰는 단어‘어쩌죠’를 흉내내며.?
“내 맘인데 어쩌죠?”
“아이 말해봐요 얼른.? 한국에서요 아니면 미국에서요?”
“허허허.? 그렇게 무서운 얼굴을 하니까 더 말이 안 나오네.? 그냥은 안 되겠는데요.? 다음 번 미팅은 그 쪽이 책임 진다면 몰라도.”
“알았어요.? 다음 번은 기약 할께요.? 됐죠?”
“…사실은… 한 달 전쯤에 그 쪽이 제 차 옆에 섰던 적이 있었어요.”
“제가요?”
“네.”
“저 맞는거 확실해요?”
“네.? 골프 연습장에서 보기 얼마전 이었는데… ”
“어디죠?”
“유니버시티 애브뉴에서요.? 그때 신호등이 노란불 이었는데 옆 차선에서 누가 조금 급정거를 하길래 무심코 내다 보았어요.? 그런데 큰 소리로 노래를 따라 부르고 있는 거예요.? CD인지…? 운전석 창문을 반쯤 열어 놓고.”
“그래서요?”
“그래서 제 차 창문을 내려서 무슨 노래를 하나 슬쩍 들어봤죠.”
태식이 소리 없이 빙그레 웃어 보였다.
“아이 뭐예요?? 정말 심하다.? 그래서요?”
“그랬더니 한국 분 이더라구요.”
“무슨 노래였는데요?”
“지금 심문 하는 것 아니죠?? 무서워요.”
“진실을 규명 하자는 것이지 심문은 아니에요.”
“모르는 노래 였어요.? 듣기는 들어 봤지만.? 무슨 성악곡 같기도 하고…? 무슨 기차는 가고 뭐 그냥 앉아 있다는 가사인 것 같았어요.? 그런 노래 알아요?”
“…네.”
은하는 태식이 본 여자가 자신이 틀림 없음을 시인 하는 표정이 되었다.
“그럼 불러 보시죠.? 그 노래가 맞나 확인해 줄 수 있어요.”
“어머 싫어요.”
은하가 주위를 둘러 보며 반색 했다.
“그럼 다음에 사람들 없는 데서 한 번 불러봐요.? 다 들어 보고 나서 가르쳐 줄께요.”
“나빠요 정말.”
은하가 태식을 향해 살짝 눈을 흘겼다.
“그런데… 전 노래를 잘 모르지만 잘 하시던데요.”
“정말이에요?”
“어--거짓말 아니에요.”
접시에 올려진 음식을 거의 다 먹고 난 태식이 손 까지 흔들어 보이며 부정하고 있었다.
“실은 혜리가 제 노래 선생이거든요.? 한 십개월쯤 ?楹た?span style="font: 12.0px Helvetica"> 성악 레슨 받은지.? 아마 그때도 노래 연습 중이었을거예요.”
“혜리씨는 성악을 전공 했나보죠?”
“네.? 성악과 졸업 하고 이태리에서 공부 했어요.? 소프라노예요.”
“네.”
“걔는 성악과를 다니고 전 영문과에 다녔어요.”
“아 네.”
“그런데… 두 번째는 어디서 봤어요?? 궁굼해 죽겠어요.? 얼른 말 해 보세요.”
“아 네…? 그 뒤 얼마 후에 학교 캠퍼스 드위넬 빌딩 앞에서요.? 그 쪽이 맞을 거예요.? 저는 그 근처에 일이 있어 지나가는 중이었는데.”
“드위넬 빌딩 앞이라면… 어쩌죠?? 그것도 맞는 것 같아요.? 저 일주일에 한 번씩 영작 강의 들으러 다니거든요.? 그런데 그게 무슨 요일이었는지 혹시 기억 나요?”
“음… 그러니까… 월요일.? 나노 기술 강의가 월요일이니까 월요일 맞아요.”
“이번에도 맞는 것 같네요.? 영작이 월요일에 있으니까.? 깨끗이 승복 할께요.? 의심 안하고.”
은하가 짧은 한숨을 한 번 지으며 이젠 졌다는 표정을 짓자 태식이 “거봐요.”하는 듯 만족한 웃음을 지었다.? 그때 남미 풍의 깔끔하게 생긴 웨이터가 첵(계산서)을 가지고 나타나 “Was everything all right?? Here is your check.”(다 괜찮았습니까?? 여기 계산서 입니다.) 하며 놓고 갔고.? 태식이 계산서를 집을 때 계산서와 함께 나온 포츈 쿠키 한 개를 집어 비닐 포장을 뜯으며 은하가 조신하게 예의를 차렸다.
“잘 먹었어요.”
Keep your plans secret for now.(앞으로의 일은 비밀에 붙치세요.)
은하가 집은? 포춘 쿠키 안의 작고 하얀 종이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그 쪽은 뭐라고 써 있어요?”
은하가 태식이 보고있던 포춘 종이를 “이리 줘보세요.”하며 받아 읽어 보다 둘은 마주 보며 까르르 웃었다.
You will soon get something special because of your charm.(당신의 매력 때문에 뭔가를 얻을 거예요.)
“후후, 그 쪽 매력 있는 거 맞아요?”
둘은 점심 식사 손님이 썰렁하게 빠져 나간 레스토랑에 한참 남아 있다 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