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만남
“저기 금문교하고 베이 브리지 좀 봐. 난 여기 오면 이상하게 로맨틱해 지더라.”
혜리가 버클리 언덕 아래로 바다를 두고 그림 처럼 펼쳐진 샌프란시스코와 오클랜드의 스카이라인에서 눈을 떼지 못하였다.
“환상이다, 그지?’
“하늘 좀 봐. 아___ 파랗다, 정말. 봄 하늘 맞아? ”
“꽃들 좀 봐. 너무 예쁘다. 진짜.”
꼬불 꼬불한 언덕길을 돌아 돌아 제일 꼭대기에 있는 골프 연습장에 가느라 주변 경치는 제대로 볼 새도 없는 은하 옆에서 혜리는 쉬지 않고 언덕 아래 펼쳐진 경치에 감탄하고 있었다. 더러는 차 창 밖으로 지나 가는 꽃을 보며 “얘, 은하야, 저 꽂은 꼭 닭 대가리 같이 생겼다, 응?” “어머, 저건 너무 색이 강렬하지 않니? 한 개성한다, 그지?” 하며.
골프장으로 가는 미로 같은 언덕길은 참 예뻤다. 미국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유럽 같은 아기자기한 느낌을 갖게 해주는 곳이었다. 지은 지는 오래 되었지만 저 마다 나름대로 귀여운 맛을 내고 있는 주택들과 풍성한 수풀이 낯익은 곳에 찾아 온 것 처럼 편안한 느낌을 주고 있는 곳이었다.
“이쯤이면 거의 다 온 것 같은데… 난 여기 여러 번 왔어도 잘 못찾겠더라.”
스탑 사인 앞에 정차하며 은하가 좌우로 고개를 둘러 보았다.
“맞아, 은하야, 저기서 우회전이야. 무조건 꼭대기 까지 올라 가면돼.”
“난 한 번 갔던 길 못찾아 가기에다 기계치인거 너 알지?”
“얘, 난 차 안에서 개스통 여는데가 어딘지 몰라서 한참 헤멘 적도 있다 뭐.”
“호호호, 이건 비극이다 비극”
둘은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얘, 저기다.”
혜리가 키 큰 나무로 둘러 싸인, 언덕 맨 위의 골프장을 손으로 가리켰다.
“어머 다 왔네.”
은하네가 골프장 입구에서 파킹랏에 들어서자 퍼딩 연습 중인 사람들이 몇몇 보였다. 클럽 하우스 가까이에 주차하려고 빈 자리를 찾던 은하의 눈에 한 켠에 주차된 태식의 검은색 볼보 승용차가 들어 왔다. 갑자기 은하의 가슴이 은근히 설레 오기 시작했다. 혜리는 벌써 안전 벨트를 풀고 챙이 넓은 모자를 갖추어 쓰며 “골프는 다 좋은데 햇빛이 문제라니까.” 하며 내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은하야, 골프 클럽 몇 개만 가지고 갈거지? 뭐뭐 빼 줄까?” 파킹랏 중간 쯤에 차를 대고 차 안에서 트렁크를 열어 주자 먼저 내린 혜리가 트렁크 문을 올리며 은하에게 물었다.
“응? 으응, 드라이버하고 5번 우드하고 7번 아이언.”
혜리의 말에 대충 생각 난 대로 대답을 해 놓고 은하는 운전석에서 내리며 자동키를 눌러 차문을 잠그었다.
“이 나이에 가슴 떨림이라니…”
누구 때문에 가슴이 두근 거릴 수 있다는 게 은하는 우스웠다.
그녀가 골프장 주변의 소나무 숲에서 나는 향긋한 파인향을 한 번 크게 들여 마셔 본 후 “음—향기롭다.” 하고는 혜리 옆으로 가 열어 놓은 트렁크 안에서 꺼낸 왼손 흰 장갑을 끼고 있을 때 함께 레슨을 받는 미세스 조가 웃으며 저 쯤에서 그녀들 곁으로 다가 왔다. 그녀는 가느다란 몸매에 특유의 하이 톤 목소리를 내며 그녀는 두 사람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냈다.
“나오셨네요, 두 분.”
“네, 안녕하세요?”
은하와 혜리가 동시에 그녀에게 인사했다.
“조 교수님은 안나오셨어요?” 은하가 미세스 조 옆에서 뵈지 않는 조 교수에 대해 물었다.
“아, 네, 먼저 연습장으로 들어 갔어요. 공 빼고 있을 거예요, 지금.”
“네에.”
“정아 아빠는 여전히 잘 계시죠?”
“네, 별 일 없어요.”
“아유, 두 분이 얼른 만나서 함께 사셔야 할텐데… 하긴 떨어져 있으면 아마 연애하는 기분일 거예요. 그죠?”
“네, 그럴 때도 있어요.”
“난 평생에 한 번도 헤어져 지내 본 적이 없어놔서 어떤 때는 미세스 김이 부러울 때도 있는 거 알아요?”
하면서 그녀는 “먼저 들어 갈께요.” 라고 말하고 나서 레슨이 있는 레인지로 걸어 갔다.
그녀의 남편 조 진 교수는 S대학의 경영학과 교수로 버클리 하스 스쿨에 1년 비지팅 스칼라(교환 교수)로 나와 있는 중이었다. 은하의 남편 정훈과는 고등학교와 대학 선후배 사이로 고등학교에 다니는 아들 둘을 두고 있었다. ‘범’자 돌림인 그녀의 아들들은 학교에서 이름 때문에 놀림을 당하는 일이 많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범’이란 영어로 ‘거지’를 뜻하기 때문이었다.
“오늘 잘 쳐질지 모르겠다, 은하야. 내일 모레 나 준이 아빠랑 필드 나가야 되는데…”
“또 한국에서 손님 오셨구나?”
“응, 중요한 바이어 부부야.”
둘은 골프화를 그 자리에서 챙겨 신고 골프 클럽을 각각 몇 개씩 손에 든 다음 레인지로 향했다.
곧 태식을 보게 되면 어떻게 인사해야 할지… “어머, 빌려 온 책 잘 보고 있어요.” 크게 아는 척을 하며 눈길을 보내야 하는 건지 아니면 평소처럼 조신하게 그냥 목례 정도에서 그쳐야 할지…
은하와 태식이 처음 만난 것은 한 달 전쯤 이 골프장 연습 레인지에서 그룹 레슨이 있던 날이었다. 레슨은 오픈 형식이라 구력에 상관 없이 각자의 타석에서 볼을 연습 하고 있는 동안 코치의 조언을 받는 형식이었다.
그날 따라 은하는 피터 코치에게 손목의 칵킹 자세에 대해 일장 연설을 듣고 난 후 클럽을 휘둘러 보았지만 연신 볼의 윗부분만을 쳐대고 있었다. 급기야는 쪼르르___ 눈앞에서 공이 굴러 가는 악성 구질이 발생했을 때 은하는 그날 연습을 기꺼이 포기하기로 하고 타석에서 조금 떨어진 벤치로 향했었다. 끼고 있던 흰 골프 장갑을 벗고 바로 앞 타석에 있던 혜리에게 “어, 오늘은 더 안되겠어, 혜리야.” 하며.
그때 등받이가 없는 나무 벤치에는 삼십대 후반이나 넘겼을까 싶은, 한국 사람으로 보이는 남자가 하나 앉아 있었는데 은하는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점잖아 보이고 느낌도 괜찮아 보이는 남자였지만.
“오늘 처음 나온 사람인가…”
은하는 한국말로 “옆에 앉아도 되죠?” 하려다가 혹시 한국 사람이 아니면 어쩌나 해서 조금 머뭇거리다 “May I sit here?(여기 앉아도 되요?)” 라고 했었다.
“…May I sit here?”
“…”
“…”
“… 아, 예, 앉으시죠.”
“어머, 한국 분이세요?”
“아, 네…”
“아이, 그럼 진작에 말씀해 주시지 한참 고민 했었잖아요. 영어로 말해야 할 지 한국말을 해야 할 지.”
“그쪽에서 말 할 기회를 안주셔서…”
“호호호, 그랬나요? 전 정 은하예요.”
은하가 그의 옆 빈 자리에 앉았다.
“한 태식 입니다.”
“오늘 처음 나오셨나 봐요? 그 동안 못 뵌 것 같아요.”
“아, 네… 조 교수님이 가자고 하셔서. 좋다구요.”
그는 연신 볼을 휘두르고 있는 조 진 교수 쪽을 눈으로 잠깐 가리켰다.
“네에… 전 초보인데 골프 오래 치셨어요?”
“한 십년?”
“네에…”
골프 연습장에서 만난 사람들 끼리 흔히 주고 받을 수 있는 얘기들을 주고 받다 타석을 바라 보고 나란히 앉은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흐른 후 은하가 다시 입을 열었었다. 약간 쑥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저어… 근데 물어 볼 게 있어요.”
그는 ‘뭐죠?’ 하는 얼굴로 은하를 쳐다 보았다.
“저… 여기 앉아서 저 망치는 거… 다 보셨죠? 그죠? ”
실수 연발을 날리던 자신의 모습을 이 남자가 여기에 앉아 다 지켜 보았을 거라 생각하니 은하는 괜히 겸연쩍어졌다. 창피한 일은 감추느니 오히려 말로 시원하게 표현해서 귀엽게라도 보이면 용서(?)가 될 것 같아 물어본 말이었다.
“허허허… 아뇨. 그만하면 잘 하시던데요 뭐.”
그가 웃음 띠며 외교적 발언을 할 때쯤 조 교수가 치던 채를 든 채 벤치 쪽으로 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담한 키에 배둘레가 만만치 않은 그는 화통한 성격이라 걸걸한 농담도 곧 잘 하곤 했다.
“어이, 생과부 홀아비가 거기서 뭐하나?”
두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온 그는
“두 분이 서로 모르죠?” 했다.
“이쪽은 1년 교환 교수로 온 전자공학과의 윤 태식 교수고 여긴 내 후배 와이프 정 은하씨. “
두 사람을 다 아는 조 교수가 교통 정리를 해주자 은하와 태식은 서로 고개를 살짝 까닥하며 정식으로 인사를 나누었었다.
“윤 교수, 와이프는 여름 방학 때 왔다 갈건가요?”
“네, 아마 잠깐 들릴 수 있을 것 같다고 했어요.”
“한 교수 와이프가 우리 학교에서 잘 나가는 식품영양학과 교수인데 연구가 바빠 이번에 같이 못왔거든요. 아이들 학교 문제도 있고.” 조 교수는 은하에게 대충 태식에 대해 묻지 않은 것 까지 알려 주고 있었다.
“거, 교수질도 좋지만 서방님도 챙겨야 하는거 아닌가?”
조 교수는 태식에게 태식의 와이프에 관한 얘기를 하다 버클리대에서 함께 듣는 강의에 대해 얘기하더니 이내 은하 쪽으로 화살을 돌렸다.
“아니, 재수씨, 정훈이는 한 번 온다는 소식 있어요?”
“어쩌죠? 조 교수님, 절 잊었는지 소식 없네요.” 은하가 장난기 묻은 눈길로 조 교수를 보았다.
“하___ 그 친구, 참. 백합꽃 같은 마누라를 적지에 내 놓고 잠이 올까 몰라. 허허, 참.”
“백합꽃은요? 요즘은 할미꽃이 절 불러요.” 은하가 한 마디 거들자 세 사람은 큰 소리로 유쾌하게 웃었었다.
허허허…
“아니, 뭐가 그리 재밌어요? 같이 좀 웃읍시다.”
이번에는 미세스 조가 다가왔다. 그녀는 마른 체형을 커버하려는듯 약간 넉넉한 통이 느껴지는 하늘색 기지 바지에 반짝이가 들어간 연두색 상의를 입고 있었다.
“아니, 은하씨가 당신 꽃이라고 해서.”
조교수가 만면에 웃음을 띠고 농담을 했다.
“아니 그럼 또 한 송이의 백합?” 미세스 조의 재치있는 대답에 그들은 연거퍼 웃고 있었다. 저쪽 타석에서는 레슨 중인 피터 코치의 목소리가 상쾌하게 들려 오는 날이었고.
“Good shot, Helen.(멋진 샷이에요, 헬렌.) Keep it up.(계속 그렇게 해 봐요.)”
“That was the best swing I’ve seen you make, Helen.(지금 까지 내가 본 것 중 제일 멋진 스윙이었어요, 헬렌.)”
골프 연습장 레인지에는 왼편 끝에서 10 타석 까지 Lesson Only(레슨용) 라는 작은 팻말을 놓아 두어 그룹 레슨을 할 수 있게 했다. 90불을 내면 매주 1회씩 목요일 마다 10 주간 그룹 레슨에 조인할 수 있었다. 구력에 상관 없이 개개인의 실력에 따라 코치가 돌아 다니며 교정해 주는 원포인트 방식이라 한국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은하와 혜리는 각각 볼을 중간 크기의 바구니에 담아 들고 타석으로 오다 볼 연습 중인 조 교수를 보자 먼저 인사를 건냈다.
“조 교수님, 안녕하세요?”
“아, 재수씨, 혜리씨”
조 교수는 스탠스(자세)를 잡다 말고 두 여자를 보자 검은 뿔테 안경을 올리며 사람 좋게 웃어 보였다. 분재가 취미인 그는 미국에 와서 배우기 시작한 골프에 푹 빠져 있는 중인지 시간 날 때 마다 골프장으로 달려 가는 것이 새로운 일과가 되었다고 미세스 조가 말했었다.
조 교수 뒤로 중국인 부부 같아 보이는 두 사람을 지나 몇 타석 뒤로 태식이 연습 볼을 치고 있었다. 그 뒤에는 남편을 먼저 한국에 보내고 어린 남매를 데리고 사는 미세스 양이보였고. 그녀는 한국에서 치과 의사라고 했다. 그녀는 가끔씩 코드가 맞지 않는 말을 해서 혜리가 한 번은 은하에게 “미세스 양 정말 치과의사 맞아?” 한 적이 있을 정도로.
태식의 옆을 지나 가다 그와 눈이 마주쳤을 때 은하는 작은 미소만 띤 채 가벼운 목례 정도만 했을 뿐 소리 내어 말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그도 마찬가지 였고.
조금은 어색한 듯한 기분을 느낄 새도 없이 은하와 혜리를 본 미세스 양은 여느 때와 다름 없이 밉지 않은 수다를 늘어 놓기 시작했다.
“어머, 그 연한 녹색 선글라스 멋지다. 어디서 샀어요?”
“나도 같이 다닐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
“그 곤색 프라다풍 바지 한국 거죠?”
“요즘 그 머리 모양 많이 하더라.”
과감하게 튀는 스타일을 감각적으로 소화해 내는 혜리와 심플한 도회적인 고급스러움을 선호하는 은하를 보면 그녀는 말이 많아졌다. 특히 화려한 느낌의 혜리에 대해서.
은하는 미세스 양 뒤에 타석을 잡고 7번 아이언을 어깨에 얹어 몸을 좌우로 돌리며 준비 운동을 시작했다.
“Good shot.(굿 샷)”
피터 코치의 유쾌한 목소리가 앞 쪽에서 들려 올 때
앞 쪽에서는 드라이버 샷을 하고 있는 태식의 볼이 선을 그리며 멀리 날아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Eun (은), Keep your eyes on the ball.(공을 끝까지 봐요.) Do not lift head up.(머리를 들지 말고.) Whoosh the ball. (공을 힘껏 치도록 해요.) Do not be afraid of hitting the ball.(공 때리기를 두려워 하지 말고.)”
“That a girl.(바로 그거예요.)”
“Helen, use your body not your arms when you swing.(헬렌, 팔이 아닌 몸통으로 스윙해요.)”
“Good shot.(굿 샷.)”
티칭 프로에서 은퇴한 할아버지인 피터 코치는 은하를 간단히 줄여 ‘은’이라 불렀고 혜리는 그녀의 미국 이름인 ‘핼렌’으로 불렀다.
아직은 싸늘하게 느껴지는 캘리포니아의 봄바람 사이로 피터 코치의 목소리가 계속해서들려 오고 있었다.
“Nice shot, Jin.(나이스 샷, 진.) ”
“That’s OK, Eun.(괜찮아요, 은.) Try again.(다시 해 봐요.)”
.
.
.
피터 코치가 설렁설렁 왔다갔다 하며 봐주는 골프 렛슨은 꼬박 한 시간 동안 계속되었다. 타석 옆에 마련된 벤치에서 가끔씩 쉬어가며 연습을 하면 꽤 근사한 운동이 되는 시간이었다.
“아, 힘들다. 그것도 운동이라고 힘드네.” 검은색 뿔테 안경을 벗아 들고 이마의 땀을 닦아내던 조교수가 미세스 조에게 말했다.
“거봐. 운동 시작하길 잘 했지. 내 말만 들으면 틀림없다니까 그러네. 지금 집에 앉아 있어봐. 뭐 도움될게 있나.”
그녀는 꽤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간혹 여자들이 남편에게 이 만큼 사는 것도 다 내 덕인줄 알라며 은근히 남편의 기를 죽이는 것과 비슷했다.
“더운데 우리 저기 파라솔 밑에 가서 시원한 거나 한 잔 씩 하고 갑시다.”
연습을 끝내고 벤치 옆으로 모여든 일행에게 조 교수는 클럽 하우스 쪽을 손으로 가리켰다. 그들은 각자 골프 클럽과 백 등을 챙겨 들고 노랑과 초록이 가지런히 섞인 줄무늬 파라솔 밑에 자리를 잡았다. 플라스틱 의자가 네 개 밖에 없는 파라솔 밑은 여섯 사람이 앉기에는 다소 협소했지만 대충 자리를 좁히면 앉을만 했다. 태식이 옆의 파라솔에서 의자를 두개 더 빼와 여섯 자리를 만들자 조 교수가 여자들에게 물어 왔다.
“뭐 드실래요? 난 페미니스트니까 숙녀분들에게 봉사 할게요.”
“난 그냥 물이 좋더라.”
미세스 조가 먼저 남편에게 말했다.
“전 스프라잇 사다 주세요.”
가무잡잡한 얼굴에 귀엽게 생긴 미세스 양의 평소와 같은 약간 느린 말투였다.
“저희도 그냥 물이 좋아요.” 혜리가 은하의 얼굴을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보며 말했다.
“한 교수는?”
“제가 들어가서 사오죠.”
하며 태식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조 교수는
“아냐, 아냐, 앉아 있어요. 오늘 물은 내가 쏜다. 콜라 좋죠?”
하며 클럽 하우스로 들어 갔다.
파라솔 옆의 화단에는 꽃잔치가 한창이었다. 사계절 모두 언제나 예쁜 꽃을 볼 수 있는 캘리포니아 였지만 맑은 하늘 아래 따사로운 햇살을 받고 있는 작은 화단은 둘러 쳐놓은 흰 자갈 돌 때문에 더욱 정겨워 보였다. 은하가 바지 주머니에 넣어둔 작은 손거울을 살그머니 꺼내 테이블 밑으로 들고 뭐 묻은 것은 없는지 살짝 얼굴 매무새를 한 번 확인해 보자 옆에 앉아 있던 혜리도 슬쩍 거울을 빌려 한 번 보고 은하에게 돌려 주었다.
“아니 저이는 도끼질 하러 왔나 골프가 아니라 장작 패는 줄 알았다니까.”
잠깐 화장실에 다녀 오던 미세스 조가 배운지 얼마 안되는 남편의 폼에 대해 평하기 시작했다. 조 교수는 미세스 조의 말대로 장작 패듯 내리 찍는 스윙을 했다. 탑스윙에서 밑으로 볼을 향해 내리 찍을 때는 이까지 악물고 용을 쓰는 폼이 영낙없는 머슴 스타일이라 주변 사람들을 웃겼다.
“아주 ‘마님’ 하면 딱이라니까. 골프채가 도끼야 저이는.”
미세스 조가 ‘마님’에 힘주어 말하자 미세스 양이 거들기 시작했다.
“사모님, 골프는 머리 안드는데 3년 공 보는데 3년 걸린다던데 머슴도 3년 걸리겠네요. 호호호.”
약간 느린 말투의 그녀가 나름대로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한 말에 모두 웃고 있을 때 흰 쟁반에 물병과 캔을 받쳐든 조 교수가 나타났다.
“이제 당신은 3년간 머슴이예요.”
“하하하” 모두들 조 교수를 바라보며 웃자 이게 뭔 소리인가 싶어 어리둥절 하던 조 교수는 들고 있던 쟁반을 테이블에 내려 놓고 의자에 앉다 말고 “마님”하며 머슴 흉내를 냈다.
“하하하”
“조 교수님, 연속극에 마님을 유혹하는 삼돌이로 나오셔도 되겠어요.”
미세스 양이 또 거들었다.
은하는 맞은편에 앉아 별 말 없이 가만히 웃고 있는 태식의 햇빛에 그을은 얼굴을 그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가끔씩 살짝 보았다. 옅은 코발트빛 폴로 면 셔츠의 가슴 부분에는 한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친숙한 브랜드의 상표가 그려져 있었다. 콜라 캔을 앞에 놓고 있는 그는 애써 은하를 외면하는 것인지 은하 쪽을 보지는 않았다. 태식의 얼굴을 대하자 은하는 지난 주의 일들을 머릿 속에 맴돌았다.
지난 주에 비행기가 낮게 뜨고 내리던 샌리안드로 골프장에서 우연히 만나 트와일라잇 나인 홀을 함께 티오프 했던 것이며 끝나고 나서 캘리포니아롤을 하는 일식집에서 간단한 저녁을 먹던 일, 그리고 골프에 관한 책이 있는데 보겠느냐고 하던 것, 그를 따라와 언덕에 올라 차를 세울 때 “괜찮으시면 들어왔다 가시죠.” 하며 청하던 것, 야경이 황홀하도록 예쁘던 그의 원룸 스튜디오… 자판기에서 뽑아온 듯 하던 익숙한 커피맛…
은하가 태식을 따라 그의 스튜디오에 들어 갈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선한 사람이라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고 혼자 지내는 그에 대한 은근한 궁금증이 있었던 것 또한 사실이었다. “태식도 나와의 한 나절을 생각하고 있을까?’ 은하는 마음 속으로 “아마 그럴지도 몰라.” 하다가 “아니야, 아닐거야.” 했다.
일부러 숨기려고 한 것은 아니었지만 은하는 태식과의 일을 아직 친한 친구인 혜리에게 말하지 못했다. 우연히 만나 함께 라운딩하고 마침 저녘 시간이라 간단한 식사를 나눈 것과 책을 가지러 잠깐 그의 집에 들렀던 것 뿐인데 왜 쉽게 말할 수 없는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혜주에게는 시시콜콜한 일상사를 스스럼 없이 이야기 하고 있지만 그에 대해 말해본 적은 없는 것 같았다..
“우리 메모리얼 데이 주말에 공원으로 다 같이 바베큐 나가죠.”
조 교수는 흰색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여자들을 두루 바라 보며 어때요 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좋죠, 조 교수님.” 말은 느리지만 이야기 하기를 좋아하는 미세스 신이 하던 말을 중단하고 먼저 환호하자 다들 “그럴까요?” 하는 분위기로 되었다. 그녀는 먼저 말한 김에 나서서 교통정리 까지 하고 있었다.
“그럼 각자 반찬 한 가지씩 하고 양념 갈비값으로 10불씩 내세요. 밥은 두 집에서 밥통에 해오고요. 그리고 물, 과일은 알아서들 들고와 주세요.”
“미세스 양, 윤 교수는 홀아비니까 그냥 오라고 봐줘요. 아, 이 동네에 나 홀로 생과부는 많아도 홀아비는 귀하잖아요. 안그래요?”
조 교수가 태식 쪽을 보며 너스레를 떨자 태식이 “허허허” 웃다 “조 교수님, 감사합니다.” 하며 변죽을 맞추자 미세스 양이 태식을 보았다. “어머, 그런 말씀도 곧잘 하시네요, 전 말 안하시는 분인 줄 알았어요.” 하며.
“이 친구 지금 여자분들이 많아서 더 말을 못하나봐요.”
쑥스러운 듯 한 손을 목덜미 쪽에 올리고 웃음 띤 태식에게 조 교수는 농담을 하며 선한 장난기 묻은 눈길을 보내다 곧 골프에 관한 화제로 돌아섰다. 두 남자가 탑 스윙, 스윙 템포 등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여자들은 으레 그렇듯 아이들 얘기, 음식 레서피, 어디서 뭘 샀더니 괜찮더라 등의 이야기를 나누다 한 시가 지나서야 헤어졌다. 파라솔 옆 화단의 꽃들이 햇볕 아래 더욱 선명한 색상을 드러내고 있는 이른 오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