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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키우며


BY 애니 2005-07-28

-꿈을 키우며

 

아이 셋을 기르며 파트 타임으로 성악 레슨을 하는 혜리의 집은 은하의 아파트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대학생들과 대학원생들 위주의 버클리 주변은 지은지 오래된 집이 많고 학교 다니는 아이를 데리고 살기에는 적합하지 않아 사람들은 학군이 좋고 주거지로 편리한 동쪽 내륙인 월넛 크릭을 선호했다.
혜리는 성악과 출신으로 이태리에서 성악 지도 법을 공부하다 재미 교포 사업가를 만나   결혼했고 남편을 따라 미국에 왔다고 했다.  작년 1월에 남편 정훈과 정아와 함께 미국에 온 은하가 그녀를 만난 곳은 버클리 근방에 있는 한인 슈퍼에서 였고. 
“은하 아니니?”
“혜리, 노 혜리 맞지?”
“이게 얼마만이니?  십 몇 년은 넘었겠다, 얘.”
“너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있다는 얘기는 들었어도 여기서 만날 줄은 몰랐어.  어쩜 옛날 그대로니.”
“살아 있으니 보는구나,정말.”
“반갑다,얘,”
둘은 이렇게 식품점이 떠나갈 새라 호들갑을 떨다 근처의 한식집으로 가 점심을 먹었었다.
혜리는 보통 키에 성악가들이 흔히 그렇듯 가슴을 포함한 상체 부분이 볼륨감 있어 뵈는 학교 때의 옛 모습 그대로 였고 크게 상꺼풀 진 눈에 서구적인 시원한 마스크도 변함 없었다.  그녀의 남편은 고등학교 때 부모님을 따라 이민을 온 한인 1.5 세대로 지금은 벤처 사업을 하고 있고 딸, 아들 아래로 늦둥이 아들을 하나 더 두고 있다고 했다.

“이 동네는 언제 다 정리가 되지?”
규모가 큰 새집들이 들어서면서 새로 개발되는 지역이라 여기 저기서 집을 짓는 공사가 한창인 어수선한 주변을 운전해 가며 은하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사 온 지 얼마 안되는 혜리네 집은 오렌지색 지붕이 돋보이는 스페니쉬 풍의 집이었다.  아직 정원을 꾸미지 않아  잔디만 조금 자라나 있는데다 버팀목으로 밑동을 받치고 있는 야자수 묘목 몇 그루만 눈에 띠는. 
바람에 하늘거리는 어린 야자수 잎을 보며 차를 세운 은하가 벨을 눌렀다.
“들어와.  문 열렸어.” 
주방 쯤에서 소리를 지르는 혜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 왔어.  혜리야.”
  문을 열고 들어가 굽이 납작한 샌들을 벗어 한 켠에 치워 놓자 혜리네 애견 미미가 먼저 쫄랑 거리며 이 층 계단에서 뛰어 나왔다. 
“미미야, 잘 있었니?” 
은하만 보면 좋아 어쩔 줄 모르는 요크셔테리어 미미를 들어 안고 쓰다듬어 진정 시켜야 하는 것은 매주 수요일 레슨 때 마다 통과해야 하는 의례였다.
“뭐 만들었니?  맛있는 냄새 난다.”
주방 쪽에서 스웨터의 소매를 ?어 내리며 나타난 혜리를 보며 은하가 물었다.
“응, 별것 아니야.  거 냄새만 요란하네.  이따가 저녘에 세희 오라고 했거든.  왜 우리 서울 있는 사촌 언니 딸이 샌프란시스코에 어학 연수 와 있잖아.  저녘이나 같이 먹자고 했어.”
“으응, 그 식품 영양학과 박사 과정에 있다는 조카?”
“그래, 세희 걔가 기숙사에 들어 간 지 벌써 여러 달 되었는데 내가 이사 하느라 바빠서 집에 한 번 도 오라고 못했거든.  언니가 국제 전화 할 때 마다 얼마나 미안한지… 드디어 오늘 저녁에 오라고 했어.”


세희라면 은하도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어학원이 마련해준 호텔식 기숙사에 들어 가기 전 까지 혜리네 일주일 간 머물렀을 때 은하, 혜리 ,세희 셋이 함께 샌드위치 샵에서 점심을 먹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때 쇼트 커트가 잘 어울리는 세희의 발랄한 모습을 보고 은하는 말했었다.
“요즘 학생들은 어학 연수가 필수 과목 인가 봐요.  우리 때는 여자 혼잔 부모님들이 잘 안 보내 주셨는데.”
“어머, 그랬어요?”
“은하 너의 어머니가 엄청 유별 나셨지 뭐.  딸 둘 과잉 보호 하시느라 얼마나 애를 쓰셨니?  조건 빵빵한 신랑 까지 직접 골라 주시고…”
“호호호”
“근데, 세희씨 결혼은 안해요?”
“저요?  일단은 마땅한 남자가 없구요…  그 다음은 결혼이 주는 구속이 아직은 자신이 없어요.”
“그래도 다 남들이 하는 대로 하고 사는 게 중간은 하는 거야, 세희야.” 
“가끔 씩은 편리한, 아름다운 구속일 수도 있다는거 알아요, 후후.”
그녀들은 샌드위치를 베어 먹으며 이런 이야기들을 나누었었다.
 

“응… 오늘 무슨 노래 부를 차례더라…” 
혜리가 피아노 앞에 앉아 바로 옆의 책장에서 꺼낸, 오래 되어 빛 바랜 명가곡집을 뒤적이며 물었다. 
“울게 하소서야.”
뮤직 스탠드를 펴 악보책을 올려 놓으며 은하가 대답했다.  피아노 레슨을 포함해 레슨 하는 학생들이 많다 보니 혜리는 일일이 진도를 못 외우고 있는 형편이었다.
“맞아, 그렇지…  근데 가사는 다 외우셨는지?”
혜리가 아닐걸하는 눈빛으로 은하를 올려다 보자 은하가 애교 섞인 변명을 했다.
“그게 좀… 협조가 안되서… 나이도 있고 하니 좀 봐주라… 응?”
“하긴 뭐 악보란 보라고 있는 거니까… 맘껏 봐줘라 뭐.”
“이번 만이다.” 하며 너그럽게 넘어 간 혜리가 이내 피아노를 치기 시작하며 “자아, 발성하자” 했다.
“자아, 엿가락 처럼 쫄깃쫄깃하게 이어지는 느낌으로.”

     “티  이  이_____  한다.” 
    
“우아하게 슬픈 기본 표정 짓고 시선은 멀리
허리는 펴고
오줌을 참을 때 처럼 아래 하체에 힘을 주고.”

    “티  이  이_____ ,  시작”

    “티  이  이_____
     티  이  이_____
     티  이  이_____
     티  이  이_____
     티  이  이_____
            .
            .
            .       

“입 천장 면적을 늘쿼 가며 풍성하게, 머리를 울리라고 했지.”
혜리는 음을 점점 높여 가며 피아노를 쳐 주었다.

“자아, 이번에는

     티 이  이  이  이  이_____로 한다.”

    “티  이  이 이  이  이_____
     티  이  이  이  이  이_____
     티  이  이  이  이  이_____
     티  이  이  이  이  이_____”

“자, 고음이 머리 위에 있는게 아니라고 했지.  다 내 눈 아래에 있는거야.  고음에서 자지러지는 소리 내지 말고.  입속을 늘쿼가며 그 안에서 소리를 굴리고.  동굴 속 처럼.  큰 파도 처럼 감싸 덮으면서.”


     “티  이  이  이  이  이_____
      티  이  이  이  이  이_____”
 
“티.이.이.이.이. 같이 소리가 끊어지지 않게 죽-- 이어서 다시 해본다.  시작.”
 
    “ 티  이  이  이  이  이_____
               .
               .
               .                  ”

충분한 발성 연습이 되었을 때 혜리는 가극 ‘리나르드’ 중의 아리아 ‘울게 하소서’의 전주를 시작했다.  배신한 애인에의 분노와 현실의 비애를 노래하고 있는 것으로 유명한 곡인. 

라샤 끼오 삐안가
라 두라 쏘르떼
에께 소오오 스피리
라리이이 베르타
에께소 스피이리
에께소 스피이리
라리이이 베르타
       .
       .
       .

혜리는 곡 중간 중간에 “그렇지.”  “그 부분은 입 천장 늘쿼라.”  “소리를 굴려야지.”
“이 부분 다시” 하면서 필요할 때 마다 지적해 주곤 했다. 
‘울게 하소서’를 여러 번 연습한 외에 두 가지 가벼운 노래들을 더 부르고 은하가 좋아하는, 그리이스의 슬픈 민요 ‘기차는 8시에 떠나네’를 불러 본 후 혜리는 레슨을 마쳤다.  그리고 난 후 은하는 혜리에게 무대용인 우아한 절을 한 번 했다.  이 다음 언젠가 작은 무대에 섰을 때 관중을 향한 자연스런 매너를 익히기 위함이랄까.  아무튼 은하가 감격어린 미소와 함께 천천히 허리를 굽히면서 우아하게 인사하면 혜리는 늘 답례용 절을 하는 것으로 두 사람은 레슨을 마치곤 했다.  그리고 둘은 서로를 바라 보며 “깔깔깔” 웃었고.
 

“너 내일 골프 연습장에 레슨 나올거지?”
은하가 혜리네 집 드라이브 웨이에 세워 둔 흰색 어코드 자동차 문을 열고 운전석에 앉을 때 문 밖으로 따라 나온 혜리가 물었다.
“응, 너도?”
은하의 물음에 혜리는 대답 대신 세련된 스윙 폼을 한 번 상쾌하게 잡아 보였다.
“내일 같이 가자.  나 픽업(태워 주는 것)해 주면 안되겠니?  내 차가 거라지(정비소)에 들어가는 날이야.”
“그래, 알았어.  10시에 여기로 올게.  피터 코치가 늦게 오지 말라고 한 거 기억나지?”
“응”

그녀들은 대화 중에 ‘안되겠니’ ‘안될까요’ 라는 말을 자주 썼다.  그것은 고등학교 때 개그맨 저리 가라 웃기던 키 큰 수학 선생님이 한 분 계셨는데 학생들에게 앞에 나와 문제 풀이를 시킬 때 마다 “12번 학생 나와서 풀면 안되겠니?  60번 학생 나와서 풀면 안될까요?” 라고 한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 선생님의 별명은 당연히 ‘안되겠니’ 였고.
 
운전석의 은하는 시동을 걸었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차를 뒤로 빼낸 후 “안녕, 내일 봐.” 하며 손을 한 번 흔들어 보이고 이내 혜리의 시야에서 사라져 새로 깔아 놓아 맨들 맨들한 진회색 아스팔트 길을 달려 나갔다.

“내일 골프 연습장에는 그도 나올텐데… ”
은하는 운전하며 태식의 얼굴을 한 번 떠올려 보았다.

며칠 전 우연히 마주쳤던 골프장에서 은하가 13번 홀 드라이브 샷에서 슬라이스가 나 페어 웨이 가의 나무 사이로 날아가 버린 볼을 찾아 헤맬 때 “여기 그쪽 볼 찾았어요.” 하며 저 만큼 떨어진 곳에서 은하의 볼을 주워 들어 보이던 그…

은하는 볼을 주워 흔들어 보이던 그를 생각하다 입가에 작은 미소를 지었다.
차창 밖 길 가에 예쁘게 피어난 캘리포니아의 봄 꽃들도 그녀를 따라 함께 웃고 있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