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2.xx일. 공순이 생활
내 주위에 사람들이 퇴원 후의 생활을 모두 궁금해 한다. 그리고 내가 공공 근로자가 됐다는 사실에 모두 놀란다.퇴원 후, 첫 일요일날 나는 A에게 한통의 전화를 받았다.
-언니 나 안양에 있는오디오 만드는 공장에 다녀. 월급제가 아니고 시간제야.언니는 어떻게 지내?
-그러니 남편은 이제는 안때리고 잘해주니?
-언니,우리방 식구들 어떻게 됐어?
-C는 나 퇴원 하는 날 같이 퇴원 했고 D는 여전히 보름은 병원에 보름은 집으로 왔다리 갔다리 하면서 지내.B만 남았지.약이 워낙 독하니까 지금도 정신 못차리고 지낼꺼야.
-우리 옆방 이빨 몽땅 빠진 할머니 같은 게으른 그 언니는 퇴원했어? 호호. 연락해서 우리 셋이 한번 만나자,언니야.
사실 정신병동 환자는 퇴원 후 만나는것을 금기시 하고 있다. 만나면 좋을 것은 하나도 없으니까.대부분 술 마시거나 담배 피우거나 욕지거리 하면서 지내게 될 것이므로. 그러나 나는 딱 한번만 E가 보고 싶었다.
2월 하순경,우리는 E가 잘 다니는 신촌의 카바레 앞에서 만났다.빨간스카프를 머리에 매고 빨간 반코트에 다리에 착 붙는 쫄쫄이 바지 차림으로 나와서 단번에 눈에 띄였다.그야말로 카바레 옷차림새였다.
-언니,여기 복잡하니까 삼계탕 먹으러 가자.언니가 나 병원에서 간식 잘 챙겨 줬다고 하니까 신랑이 언니 맛있는거 사주라고 2만원 줬어. 그리고 나 내년에 틀니 해준다고 했어.내년부터 틀니가 의료보험이 된대.
E는 이제는 카바레에 다니지 않고 대신 약기운에 낮잠을 많이 잔다고 했다.잠의 노예. 어쩌면 참으로 편한 팔자인 지도 모른다. 신생아 처럼 먹고 자고 먹고 놀고.E에게 살아 있는것은 식욕과 성욕 뿐이니까.
40대 여자가 취직 하려면 세일이나 단순 노동직 밖에는 없다는 현실을 나는 알고 있기에 A가 다니는 공장에 나도 취업했다. A는 오디오 만드는 공장이라고 했는데 가 보니 삐삐 만드는 공장이었다. 오디오 만드는 곳에서 짤렸다고 했다.갖고 온 이력서를 이사에게 주었는데 이사가 혀를 끌끌 차면서 -명문 대학 출신이네요. 아주머니는-하고 말했을때 나는 아차했다. 위장취업을 해야 했는데.나는 그공장에 한달 밖에 있지 못했다. 야근을 밥먹듯이 해야 하는데 마침 작은 딸이 고3이어서 뒷바라지가 필요했다. 버젓이 전문직에 종사하는 인테리 여성 취업자도 자식이 고3이 되면 직장에 사표를 쓰는 것이 대한민국의 현실이므로.
나는 야근을 피할 수 있는 공장에 다시 취업하려고 안양에 있는 공장이란 공장은 발품을 팔아서 다 알아보았다. 딱 한 곳 혈압계 만드는 공장이 있었다.기껏 해봐야 50만원도 안되는 월급이지만 나는 일이 필요했습니다. 바쁜 꿀벌은 슬퍼할 틈이 없고 전쟁중에는 우울증이 없다고 한다.먼저 손으로 LCD(혈압수치가 나타나는 곳)를 맞추고 혈압계속의 먼지를 스프레이로 털어 주고 드라이버로 뚜껑을 조이는 순서로 작업이 진행됐다.LCD맞추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어서 맞지 않고 이물질이 끼면 완성반에서 되돌아오는 경우가 있었지만 일이 손이 익을 무렵 일주일쯤인가 사장이 나를 불렀다.
-아주머니 그만 두셔야겠습니다. 커피 타임을 10분 넘기면 작업에 방해가 됩니다.아주머니는 위장 취업자 이시죠? 대개 위장 취업자들의 특징은 커피 타임을 이용해서 직공들을 교화 시키더군요. 저는 한눈에 착 알아봅니다.
나는 위장취업자가 아니라고 무작정 매달렸습니다.
-귀신의 눈은 속여도 내 눈은 못속입니다. 미스리, 이 아주머니 일주일치 일당과 점심값,교통비 계산해 드려. 그리고 의료보험용으로 띤 주민등록등본도 내 드려.
냉정하게 또박또박한 말투로 가위를 자르듯이 사장은 말했다.
밖으로 나오니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나는 문득 헤밍웨이의 (무기여 잘있거라)의 마지막 부분인 주인공 남자의 비오는 날의 딋모습이 떠올랐다. 헤밍웨이는 이 부분을 10여번이나 고쳐 썼다고 했다.서울로 가기 위해 안양 지하철역으로 가는 나의 뒷모습이 그러하리라.그러나 마음은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하고 싶지 않은 일을 때려 치워서 그런가보다고 나는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