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터k! 당신은 내게 병원일지를 쓰는 것이 상처받은 경험을 의미화 하고 객관화 함으로써 경험과 자신 사이에 일정한 거리를 가지게 되므로 정신적 외상인 우울증의 심리적 치료의 출발점 이라고 권유 했더랬습니다. 그리고 아주 조심스러운 눈빛으로 그 일지를 주치의인 자신에게 보여줄 수 있느냐고 그 방법이 면담 치료 보다 효과적 이라고 말했습니다.
병원일지의 반을 쓴 시점에서 나는 당신께 위의 일지를 보여 주었는데 당신은 기억하실런지요?
1996.11.x일.남편과의 갈등이 더욱 불거짐
시간적으로 따지면 나의 입원은 남편의 국회의원 낙선후의 우울증 쇼크로 입원한 것 이라고 할 수 있지만 실상 나와 그의 결혼생활 20년은 서서히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나는 남편의 꿈인 정치가를 싫어했다. 그와는 나는 대학 졸업반 학교 개교 기념 5월의 축제때 만나서 2년의 열애끝에 결혼을 했다. 1973년 5월에 그는 나의 과 친구 소개로 내 축제 파트너가 되었고 나는 졸업반 9월에 kbs공사 아나운서 1기로 취업이 확정 되었다. 그는 군제대 후 대학 복학생이어서 나보다 1년 늦게 졸업했고 1974년 2월에 굴지의 대기업 전자회사에 취업이 되었다. 그는 명문 S대 물리학 전공의 순수과학을 배웠고 나는 사립명문인 Y대 국문학 전공의 순수 인문 과학을 배웠다. 그와 나의 연애 사건은 두 대학을 들썽거리게 할 정도로 소문이 자자했었고 어느 누가 보더라도 축복받은 한 쌍이었다.
정치가는 상황이 바뀌면 적끼리도 작당을 하고 행동 보다 말로 떠드는 족속들이라 예술지상주의자인 나와는 거리가 멀었다. 물론 정치가 바로 잡혀야 교육,사회,문화,경제가 옳게 돌아가는 것이라고 나는 인정한다. 그러나 작가가 꿈인 나는 우리나라 정치가들을 혐오했다.
예술은 한 시대의 정신적 증명이다.예술은 자연의 아름다움과 인간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도록 해 준다. 부부의 꿈이 다르기에 우리의 결혼생활은 남들이 보기에는 2녀1남의 화목한 부부로 보여졌지만 실상은 서서히 부패하기 시작했다.
남편이 가장 좋아하는 4자 성어가( 십시일반)이다.열 사람이 모아서 한사람을 도와준다는 뜻인데 자신은 열명의 입장에 서지는 않고 항상 한 사람의 입장에만 설려고 한다. 우리나라 절치가의 대부분이 그런 작태를 보여 주었기에 정치 후진국이라는 말을 세계인 들에게 듣는 것이 현실이 아닌가.
그는 정치학 전공도 아니고 자연과학 전공이었기에 정치가의 꿈은 접으라고 나는 수수히 말렸지만 그는 나 몰래 사표를 썼고 민주당 공천을 받고 서울 지구에 국회의원으로 입후보하게 된 것이다. 내가 반대한 가장 큰 이유는 정치가는 앞에서는 여우 노릇을 하지만 뒤에서는 호랑이보다 더 음흉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 적성인데 남편은 고지식한 성격이라 맞지 않았고 무엇보다도 우리 가정은 돈이 없었다.집 한 채와 삼남매가 재산 뿐인 상황에서 낙선 하면 그야말로 노숙자가 될 형편이었다.
급기야 그의 낙선후 집은 전세로 주저 앉았고 삼남매의 학비는 다행히 시댁과 친정에서 대 주었다. 그러나 그의 낙선 보다 나를 실망 시킨일은 그의 음주 습관 이었다. 그는 술을 안 먹으면 예민한 성격이고 술이 들어 가면 너그러워지고 말수도 활달해지곤 했다.낙선 후 그의 음주 습관은 알콜중독자 수준이었고 나의 우울은 깊어져 가고 있었다.
내가 입원한 후로는 부부갈등은 악화일로로 치닫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