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11.xx일. 잔뜩 찌푸린 흐린날.미소를 보여준 닥터k
나의 주치의 닥터k에 대해 쓰고 싶다. 그는 병원에서 처음 만난 사람이니까.그의 첫인상은 소박한 시골 아저씨 같았다.첫날 인터뷰를 기억해 보자.
-안녕하십니까? 제가 어자영씨의 주치의인 김민철 입니다.
나는 속으로 혼자 대답했다.(안녕하면 내가 여기에 와겠는가?)
김부장님께서 저를 오늘 아침에 레지던트실로 오셔서 어자영씨를 부탁 하셨는데 부장님과는 잘 아는 사이입니까?
-아,남편의 절친한 고등학교 동창이고 남편이 국회의원 선거에서 지난 4월 낙선하고 나서 제가 우울증에 걸렸다고 하니까 이 병원은 대기환자가 많은데 특별히 저를 오늘 하루만에 입원시켜 준 장본인이에요. 특혜라고나 할까요.빽이죠.
-네,부장님한테 자세한 병력을 들어 알고 있습니다. 어자영씨는 뵙기에도 총명한 분 같으니까 아시겠지만 이 병은 본인의 의지가 제일 중요하니까 약물치료를 병행하면서 저와 많은 대화의 시간을 가지도록 최선을 다했으면 합니다.
그는 미남도 아니며 귀티도 나지 않고 키도 그다지 크지 않은 우랄 알타이어족의 전형적인 동양인 모습 이었는데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는 덕목을 갖고 있었다. 정신과 레지던트 전공의를 택한게 그로서는 잘된일인것 같았다.
그는 아침 10시면 회진을 하는데 5인용 우리 입원실에 들어올 때는 언제나 5 환자를 향해 -오늘 기분은 어떻습니까-하는게 첫인사였다.
그 시간이 되면 알콜중독자B는 화장을 하면서 기다렸다. 조울증C와 하루도 빠짐없이 싸움을 시작하는 시간도 바로 그 시간이다.
-야,이것아 . 너 주치의 한테 잘보이려고 또 입술에 뻘건 칠했냐. 꼭 쥐 뜯어먹은 고양이 입술 같다.지랄하고 자빠졌네.
-뭐라고 x야. 남이야 전봇대로 이빨을 닦든 말든 네가 무슨 참견이냐.저러니 남편한테 토끼같은 자식 셋을 뺏끼고 이혼을 당했지.
조용히 옆에서 책을 읽고 있던 D가 참다 못해 -아줌마 고만들 하세요. 여기가 싸움터예요,뭐예요.함께 같은 병실을 쓰고 있는 사람들 입장도 생각해 주셔야 되는게 아니에요.-하면 의붓증 환자C가 약에 취해 잠자다가 일어나서-모두모두 이 방 사람들은 잘나서 탈이야. 이 방에서는 통 잠을 잘 수가 없어-하면서 베게를 들고 옆 병실로 옮기게 마련이다.
닥터K가 병실에 들어 서며 묻는다. 환자 한 분이 안보이네요. 화장실에 가셨나요?
B가 기다렸다는듯이 쥐뜯어먹은 입술로 대답한다.
-아뇨.옆방에 잠자러 같데요.
-왜, 오늘도 두 분이 싸우신 모양이군요. 어자영씨는 간호사가 그러는데 어제 수면제를 타 갔다는데 밤에 잠이 오지 않았나요.
내가 미처 대답을 하지도 않았는데 또 B가 말을 가로 막고 나선다.
-선생님 저 외박 좀 시켜 주세요.아랫도리가 가려워서 어제밤에 제대로 자지도 못했는데 아무래도 산부인과에 가 봐야 겠어요. 이병원에는 급한 환자를 위한 치과나 내과밖에 없잖아요. 네,선생님!!! 제발요.
나중에는 교태어린 음성으로 말한다.
-알았어요. 내일 바깥어른이 면회 오시면 같이 나가게끔 외박증 간호사에게 부탁해 놓겠습니다. 대신 지난번 외박때 처럼 숨어서 잔뜩 술마시고 들어오면 안됩니다.
가만히 듣고 있던 C가 나선다.
-네X이 술 안마시고 들어 오면 내 손에 장을 지지겠다. 선생님 내기 할까요?
닥터 K는 조용히 입가에 미소를 띠운 채 다른병실로 회진 하기 위해 나갔다. 흐린 날씨에 그의 미소는 청량한 가을 날씨같다. 그 점이 그의 매력이다.
B도 얼른 침대에서 일어나서 주치의 뒤를 따른다.
-저X년좀 봐.이제는 아예 선생님 꼬리 까지 따라 다닐려고 작정을 한 모양이야.지랄육갑 떠는 모습 안볼려면 빨리 퇴원해야해.
나와 D는 서로 눈짓으로 말한다. B도 여느 환자들 처럼 나가고 싶어서 안달이지만 나가면 다시 병실로 들어 오고 싶어서 안달일거라고. 만성환자들의 경우 퇴원하면 병원에서 처럼 약을 챙겨 주는 간호사가 없으니까 약을 제대로 먹지도 않을 뿐 더러 가정이나 사회에서 그들을 완전 또라이 취급을 하므로 병실이 편하니까 다시 이 세계로 돌아올 수 밖에 없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