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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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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혼) 술


BY 동그라미 2004-10-20

제목 : 술

 

“오늘 무슨 날인지 알지? 나 할 말 있으니깐 일찍 들어와. 만약에...오늘도 외박하면 다시는 내 얼굴 볼 생각도 하지마!”
무슨 일이 있어도 일찍 들어오겠다고 했던 남편은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다. 갑자기 회식이 생겼다면서 빠질 수 없는 중요한 자리라고 전화가 왔다. 서운했지만 눈치봐서 일찍 들어오겠다는 남편의 거짓말을 나는 믿었다. 회식이 있는 날엔 언제나 그랬다. 술만 마시면 취할 때까지 마시려고 하는 남편의 술버릇 때문에 남편과 나는 부부싸움도 참 많이 했다. 남편이 퇴근하고 돌아오면 함께 먹으려고 차려 놓은 저녁 식사는 벌써 차갑게 식어 있었다.
시계 바늘이 11시를 가리키자 나는 갑자기 짜증이 났다. 전화도 없이 늦는 남편이 야속하게 느껴졌다. 오늘은 내 생일이었다. 선물까지는 바라지도 않았다. 그저 남편이 일찍 들어와서 나와 함께 저녁을 먹고 생일 축하한다고 그 한마디만 해주면 그만이었다. 남편은 핸드폰도 받지 않았다. 술자리에서는 늘 전화를 꺼 놓았다. 연예할 때는 나와 단 둘만의 시간을 방해받고 싶지 않아서 그러나 보다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혼을 하고 보니 남편의 술버릇이었다.
남편은 술을 참 좋아했다. 한번은 부부싸움을 한 후 남편의 술버릇을 고쳐 줄 생각으로 이혼 서류를 작성해서 술과 나 둘 중에서 하나만 선택하라고 했더니 남편은 망설이지도 않고 술을 선택했다. 나는 하도 어의가 없어서 웃고 그냥 넘어갔다. 그 정도로 남편은 술을 좋아했다. 술도 못 마시면서 말이다. 술 마신 다음날에는 하루 종일 숙취로 고생을 했다. 그런 남편이 나는 뭐가 예쁘다고 아침이면 꿀물을 타 줬는지... 술을 좋아하는 만큼 사람은 또 얼마나 좋아하는지 새벽에 전화도 없이 술에 절어서 들어온 남편은 직장 동료들을 불쑥 끌고 와서 술상을 차려 달라는 것이었다. 한 두 번은 나도 재밌었다. 하지만 그것이 몇 번 반복이 되자 차라리 밖에서 먹고 오라면서 나는 바가지를 긁었다. 그것이 화근이었다. 남편은 이제 술만 먹으면 외박을 했다. 회사에서 집까지 택시비만 3만원이었다. 남편은 늘 그 핑계를 댔다. 회사 근처에서 술을 마시다가 새벽 4시가 넘으면 근처 사우나에서 자고 가는 것이 더 괜찮다면서...
새벽 2시가 되자 나는 잠도 오지 않았다. 다른 날도 아니고 내 생일날인데... 결혼하고 남편은 내 생일을 한번도 기억하지 못했다. 그런 무심한 남편이었지만 직장 동료들 생일은 어찌나 잘 기억하는지 빠짐없이 챙겨주다 보니 회사에서 남편은 인기가 좋았다. 자칭 회사에서 분위기 메이커. 마스코트라나.
가끔 혼자서 남편을 기다리다 보면 나는 내가 왜 결혼을 했을까 하고 생각이 들 때가 있었다. 특히 오늘 같은 날 말이다. 하지만 결혼 전 남편은 참 자상한 남자였다.

내가 다니고 있던 직장에서 회식을 하다가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있던 남편을 발견했다. 술 먹기 게임을 하고 있었는데 게임의 벌칙이 마음에 드는 여자에게 술을 받아먹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게임에 걸린 남편은 내게 불쑥 다가왔다.
“술 한잔만 주시면 제가 아가씨의 인생을 평생 책임지겠습니다.”
옆에서 함께 술을 마시고 있던 직장 동료들은 신나서 빨리 술을 따라 주라고 난리고 남편과 함께 있던 친구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만 주시하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지금도 술에 많이 취하신 것 같은데... 저는 술을 따라 드릴수가 없네요.”
그날 남편은 인사불성이 되어서 집에 들어갔다고 했다. 그날 이후 어떡해 알아냈는지 남편은 매일같이 내게 전화를 걸었다. 밥은 먹고 일하는지, 내가 어떤 일을 하는지, 회사는 전망이 있는 곳인지, 일이 힘들지는 않은지, 무슨 색을 좋아하는지, 어떤 음악을 좋아하는지, 특별히 가고 싶은 곳이 있는지, 보고 싶은 영화가 있는지 이것저것을 물어보더니 한 달 후 남편은 불쑥 회사 앞에 나타나서 그 동안 내가 했던 말들을 꼼꼼하게 적은 수첩을 펼쳐 보이며 앞으로 우리가 할 데이트 스케줄이라고 했다. 그 스케줄에 따라서 우리는 바쁘고 즐겁게 그렇게 서로에게 정신없이 빠져들었다.

“오늘도 외박만 해봐라. 더 이상은 나도 못 참아.”
이미 꺼져 있는 핸드폰 번호를 나는 생각 날 때마다 눌러 보았다. 여전히 신호는 없었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있는데 갑자기 남편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무슨 일인지 남편은 받지 않던 핸드폰을 받았다. 나는 너무 화가 말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지금 어디야? 나랑 약속 한 거 잊었어? 지금이 도대체 몇 시야? 오늘도 외박이야? 어?”
“.....미안. 지금 막 가려고 했어. 다 끝났어. 미안, 미안. 내 금방 갈게.”
여자 목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고 시끄러운 음악 소리도 들리는 것 같았다. 직장 생활을 해봐서 나도 안다. 남자들이 술에 취하면 2차나 3차로 단란주점 같은 곳에 간다는 것을. 하지만 내 남편이 다른 여자를 품에 안고 술을 마시는 상상을 하니 기분이 나빴다. 아니 더러웠다. 더 이상 통화도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수화기를 퍽 하는 소리가 날 정도로 내려놓았다. 다른 날도 아니고 오늘만큼은 남편이 무슨 일이 있어도 무슨 유혹이 있어도 정말 일찍 들어 올 것이라고 믿었던 내가 바보였다.
새벽 4시. 나는 다시 전화가 올 줄 알았다. 하지만 남편의 전화는 없었다. 내가 화가 났던 말던 상관없다는 행동에 남편을 그만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알고 있는 상식으로는 단란주점이 아무리 늦게까지 영업을 한다해도 새벽 4시가 넘으면 영업을 하는 곳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아무리 의심을 하지 않으려고 해도 이상한 상상이 자꾸만 머리 속을 떠나지 않았다. 내일이면 남편은 택시비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사우나에서 자고 곧바로 출근했다고 핑계를 댈 것이다. 그리고 피곤하다며 잔소리는 1절만 하라고 말 할 것이다.
이제 더 이상은 남편의 외박을 방치 해 둘 수 없었다.
그때 전화벨이 다급하게 울렸다.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 이게 아닌데... 내가 결혼했던 남편은 이미 없었다. 전화벨은 계속해서 울렸지만 나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수돗물을 틀어 놓은 것처럼 흘러나오는 눈물을 닦으며 나는 생각했다. 남편이 술과 나를 놓고 갈등을 하던 그때 어쩌면 떠났어야 할지도 모른다고.
나는 남편을 믿었다. 다시는 술도 마시지 않고 외박도 하지 않겠다던 남편의 거짓말을...
“외박을 하던지...말던지.. 마음 대로해!!”
나는 요란하게 울어대는 전화벨 소리가 듣기 싫어서 수화기를 들고 그만 소리를 질렀다. 그때 낯선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기...”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
“누구시죠?”
“당신 남편이 죽어가요....”
“네? 무슨 말이죠? 죽어 간다니 누가요? 그리고 당신은 누구세요?”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도대체 갑자기 무슨 소리인지...
“당신 남편 간암 말기래요. 나도 오늘 당신 남편이 취해서 하는 말을 들었어요. 그리고 처음엔 농담인 줄 알았죠. 저희 같은 여자들 그런 말 들으면 마음이 약해지잖아요. 그런데 지금 당신을 애타게 찾고 있어요. 당신한테 너무 미안해서 그 동안 말을 할 수가 없었다고 했어요. 당신을 너무 사랑해서 혼자 남겨 놓고 가는 것이 너무 미안해서 말 할 수가 없었다고....”
“남편 좀 바꿔 줘요. 어서 빨리!!”

딩동~~~~~

“자기야!! 문 열어! 미안해...내가 너무 늦었지? 미안, 정말 미안해. 내가 오늘은 꼭 일찍 빠져 나오려고 했는데...”
꿈이었다. 상상이 지나치면 현실처럼 느껴진다고 하더니 내가 깜박 잠이 들었던 것이다. 술에 절어서 대 문 밖에 혼자 쓰러져 있는 남편을 보자 왈칵 울음이 쏟아져 나왔다.
“왜 이렇게 술을 많이 마셨어. 몸도 좋지 않은 사람이...”
“어? 우리 마누라 안 자고 있었네? 자....자기야 생일 축하해. 그리고 사랑해..꺼~억.”
남편은 그 말 한마디만 남기고 그대로 잠이 들었다. 축 늘어진 남편은 검은 비닐 봉지를 꼭 쥐고 있었다. 나는 쓰러진 남편을 겨우 침대 방으로 옮겨와 양말을 벗기고 옷을 벗긴 후 그 검은 비닐 봉지를 열어 보았다. 그 속에는 남편이 내 생일 선물로 사온 노란 귤이 가득 들어 있었다. 그럼 그렇지 우리 남편이 어떤 사람인데...
“자기야...나...자기한테 줄 선물이 있어. 있잖아. 나...임신했다. 5년 동안 생기지 않던 아기가 생겼어. 오늘 산부인과에 갖다 왔는데 확실하데...그토록 갖고 싶던 아기가 정말 생겼다고... 자기 일찍 들어오라고 한 이유도 바로 이거야....자기 깜짝 놀라게 해 주고 싶었거든.....아무튼 외박하지 않고 약속 지켜 줘서 고마워.”
술에 취해 자고 있던 남편은 알아들었다는 듯이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