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밝아도 시어머니의 칼날같은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고 여우의 훌쩍거리는 소리도 더이상 들려오지 않았지만 왠지 맘이 편치를 않았다.
이상하다...
전화기가 고장났나........이렇게 조용할리가 없는데.......
결코 비켜갈수 없는 충격적인 장면이 여우의 더듬이에 걸려들었는데 뭔가 어긋나고 있다는 불안감 같은게 결국은 내가 먼저 시어머니에게 전화를 걸게 했다.
"별일 없으세요?"
"먼 일이 있을게 있냐?..."
예의 그 시큰둥한 대꾸를 들어보니 아직은 내 약점이 귀에 들어가지 않은 모양이지만 마음 놓고 있기엔 아직도 발밑에 깔린 지뢰가 캥겼다.
실오라기 같은 안도의 숨이 터져 나오는 순간에 시어머니의 화장실 얘기는 어김없이 끼어 들었다.
"야야...내가 그 장씨(공사쟁이)하고 입씨름 해 봤는데 50만원은 까 준다고 카더라"
대단한 흥정을 성사시킨 흥분으로 시어머니는 공사진행을 기정 사실화 시키셨다.
"예........그러셨어요......"
더 이상 나는 달아날 구멍도 빠져나갈 명분도 없음을 알았다.
350만원.
모레면 적금 타고 큰 시누이가 200만원 보태면 문제는 간단하게 해결 될것 같았다.
그런데 왜 이렇게 내키지 않는지 냉큼 '네'라고 대답을 하지 못했다.
손에 쥔어준 떡도 베어 먹을줄 모르는 한심한 주변머리는 남편도 모르는 400만원에 대한 해명도 준비가 안된 상태이고, 무엇 보다도 살같은 내돈 200만원을 이렇게 부셔버리기엔 아깝고 허무할것 같았다.
그게 어떻게 만들어진 돈인데.........
2년동안을 허리가 토막나도록 모은 내 살점같은 돈을 곱지않은 시어머니 밴소칸에다 쳐박긴 너무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정엄마에게 100만원 정도는 드릴려고 했는데 이것 마저도 물건너 간 송아지 꼴이 난것 같아서 가슴은 바작거리는 소리를 냈다.
이젠 여우가 알든 모르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이 나이에 깨지고 터지는거 겁나서 웅크리고 살아봐야 나만 쭉정이 되는 뻔한 결과를 두손 놓고 고스란히 두들겨 맞고 싶지 않은 핏기가 아직은 살아 있음이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아직 손에 쥐어 지지도 않은 돈 계산에 머리가 복잡한데 착 가라앉은 친정엄마의 예사롭지 않은 전화를 받고보니 신경이 송곳 끝 같이 날이 서 있었다.
"무슨 일 있어?"
엄마의 훌쩍거리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서 돈계산이 들어가 있는 머릿속은 텅 비어 버리는 느낌이었다.
"에구...나이 들면 죽어야제......먼 영화를 보겠다고......"
노인 특유의 시어머니 넋두리와 푸념을 귀따갑게 들어온 나 이지만 친정엄마의 넋두리는 그냥 넘길 일이 아닌것 같았다.
대뜸 내 뱉는 말이 누군가를 겨냥한 총구 같았다.
"누가 뭐래?...누가?..오빠가?...올케가??"
이럴땐 내 사정권 안에 들어와 있는 만만한 사람을 우선 떠 올리게 되는데 그 상대가 오빠와 올케라는 사실을 부정하고 싶은 맘이다.
차라리 동네 누구라든지 집안 사람 누구라면 편하게 엄마 편 들어서 같이 입을 맞출수도 있는데 달리 짚혀오는 사람이 있을턱이 없는, 그럴 상황이 아닌듯 했기에 더 역정이 솟았다.
당신 편이라고 생각한 딸의 입에서 역성드는 소리를 들은 엄마는 소리가 전화기 밖으로 새어 나오도록 꺽꺽 소리내어 운다.
'내팔자야'를 수없이 되 뇌인 엄마의 해울음에 나도 모르게 왈칵 소리를 질렀다.
"얘기를 해봐요.....울지만 말고...."
답답하고, 궁금하고, 속상해서 머릿속은 이미 오빠 내외를 향한 분노로 뜨거운 김을 뿜어내고 있었다.
"하도 다리가 아파서 뒷간 다니는데 시껍을 해 갖고..........."
엄마도 화장실 얘기를 하고 있었다.
친정 화장실은 우선 방하고 거리도 멀었고 무엇보다도 엄마를 힘들게 하는건 마루에서 마당으로 내려서는 턱이 너무 높았다.
다리가 부실한 엄마로서는 여간 고역이 아니라는거 가끔씩 친정에가면 느끼는 부분이었지만 수리해서 살기엔 현실적으로 어려웠다.
집 구조 자체가 주변보다도 더 낮아서 땅을 돋우워서 수리 하자면 새집 짓는 만큼 돈이 든다고 해서 무리하게 오빠를 닥달할 엄두도 못내고 포기한 상태다.
그 뻔한 상황을 아는데도 불구하고 엄마가 화장실 얘기를 꺼내는걸 보니 내가 모르는 다른 일이 생긴것 같았다.
엄마는 아들 얘기 입에 담는게 부담스러운지 아니면 딸의 옹골찬 성깔로 인해서 불거질수도 있는 후환이 겁이 나는지 한참을 망설이다가 긴 한숨과 섞어낸 건 이젠 넋두리가 아닌 자식들에 대한 서운함이었다.
"그래서?"
대답을 재촉하는 내 입주위가 묘하게 뒤틀렸다.
"그래서 니 오래비 한테 방에서 누는 뒷간이 있다고 해서 사달라고 했더니..."
이 부분에서는 더이상 말을 못하고 한숨만 들이쉬고 내 쉬고를 연거푸 하는 거였다.
말을 토막 냄으로서 극적 효과를 노린 듯한 엄마의 풀기 빠진 소리에 머리 끝이 곤두서는 느낌을 받았다.
"니 오래비는 그래도 사 줄라고 하는것 같은데............"
뒷말을 희미하게 흘리는 그 나머지 얘기가 뭔지 알것 같았다.
기어 오르는 울화를 꿀떡꿀떡 삼키며 난 이성적으로 물었다.
"그 화장실이 얼마래?"
내가 이렇게 물을 땐 이미 울화의 수위가 가장 자리를 넘나들고 있음이었다.
"잘은 모르지만..한 10만원 정도는 안할라??"
10만원.........
그 10만원 때문에 엄마는 울고 불고 팔자 타령을 한다.
난 400만원 공사를 가지고도 'NO'자 소리 아직도 못하고 있는데 올케는 드러내놓고 'No'자를 붙혀서 엄마를 서럽게 만들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엄마에게 소리를 질렀다.
"그 정도 금액이면 나 한테 얘기하지 왜 생고생을 해요?"
엄마를 생고생 안 시킬 자신도 없으면서 오빠 내외에게 쏘아댈 화살을 짐짓 엄마에게 퍼 붓고 있었다.
"내가 무신 염치로 너한테 돈 달라 소리하냐?.....아이구 이 웬수 같은 영감탱이 때문에....."
엄마는 이미 25년전에 세상 버린 아버지를 새삼 난도질 하고 있었다.
뺑덕어미 떡값 걸리듯 여기저기 걸려있는 아버지의 빚 때문에 그 동안 고생하면서 산 게 억울한지 엄마의 레파토리 역시 우리 시어머니의 넋두리와 별 반 다를게 없었다.
엄마의 가슴팍을 후벼파는 건 역시 나의 반동가리 학력이었다.
졸업만 시켜 주었어도 대핵교 나온 신랑 만나서 남부럽잖게 살낀데 못 갈킨게 한이다라는 소리뒤에 따라붙는 단골 레파토리는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자조섞인 신세한탄이었다.
엄마는 사위에 대한 살가운 정도 사랑도 없다.
남편을 처음 소개했을때 엄마는 완강히 반대 했다.
가난한집 맏이에다가 첫인상이 멀겋게 흰죽 쑤어놓은것 같이 힘이 없어보인다고 싫어했다.
그때는 이미 남편에게 맘이 쏠려 있던 나는 세무공무원은 돈 방석에 앉는 자리니까 돈 걱정은 하지 마라고, 자신도 없고 확신도 없는 사탕으로 엄마의 허락을 받아 냈었다.
남편도 엄마가 반대했다는 걸 알고는 장모에 대한 감정이 결코 부드럽지도 애틋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그냥 데리고 사는 여자의 엄마라는거 외에는 더 이상의 의미도 갖고 있지 않았다.
친정 얘기만 나오면 떨떠름한 표정 짓는것 알지만 타박을 할수 없는 내 입장이 곤혹스러웠다.
내가 시집식구들에게 날을 세우고 있는 이유중의 하나가 남편의 처가에 대한 곱지않은 시선이 한몫을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바로 손위 처남인 오빠에게 지금까지 '형님'이라는 칭호를 한번도 쓰지 않았고 그냥 '수민이(딸) 외삼촌'이라고 맞대놓고 부르기 일쑤였다.
아무리 처가 촌수는 촌수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엄연한 손윗 처남인데 남편은 처가식구 알기를 장기판 졸(卒)로 밖에는 보지 않는 것 같았다.
나를 더 절망하게 만드는 건 이러한 남편의 뒤틀린 처사에 한 마디 쐐기라도 박지 못하는 친정식구들의 물렁하고도 미지근한 태도였다.
어쩌면 하고 싶은 섭섬한 말이 있어도 행여나 나에게 화살 돌아갈까봐 염려가 되어서 그럴거라는 짐작은 아예 하지 않았다.
엄마의 무능과 나에 대한 애정이 식어질대로 식어버린 오빠의 무관심은 이미 나에게 점수를 잃어 버렸기 때문이다.
어느 날 난 참다못해 남편에게 퍼부었다.
"나도 당신 가족에게 똑같이 되돌려 줄거다"
그러나 남편은 그에 대한 이렇다 할 반응도 보이지 않았고 그렇다고 내가 받은 수모 시집식구들에게 되돌려 줄 만큼 용감하지도 못했다.
친정 식구들과 시집 식구들 사이에서 어떤 '턱'을 보았다.
결코 수평을 맞출수 없는 고정된 '턱'을.......
난 혹하나를 더 턱에다가 달고 있는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