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벌써 새벽3시를 훌쩍 넘기고 있었지만 태환은 그만 둘 기세가 아니었다.
내일 중요한 약속이 있다며 스케줄을 오전 근무자와 바꾼 탓에 지금이라도 잠을 자야 아침에 일어 날 수 있을것 같은데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분위기는 더욱 아니었다.
그저 이불만 만지작 거리고 있는 민주의 눈에 수민이의 이불이 들썩이는 것이 보였다.
어느틈엔가 수민이는 잠이 깨서 둘의 대화를 이불 속에 숨어서 듣고 있었던 게다.
더 끌다가는 큰 소리가 날게 뻔한 상황...
민주는 문득 어릴적 엄마, 아빠가 언성을 높이며 싸우는 날은 가슴이 두근 거려서 잠을 자지 못했던 기억이 났다. 그리고 이불속에서 숨을 죽이고 있는 수민이도 그 시절 어릴적 자신과 별반 다른 기분이지 않을거라는 생각에 다시 가슴이 답답해 졌다.
"알았어.. 알겠으니까 그만해요. 수민이 깼어."
민주는 끝내 미안하다는 말은 삼켜버렸고 눈짓으로 수민이 쪽을 가리키며 자리에 누웠다. 태환도 아직 할 말이 남아 있는 눈치였지만 수민이가 뒤집어 쓴 이불이 들썩 거리는 걸 보고는 입을 닫았다. 방에 불이 꺼지고 수민이의 고른 숨소리가 들릴때까지 민주는 멍하게 어두운 방의 천장을 보고 있었다. 시간은 시계 초침의 소리에 맞춰 천천히 지나갔다.
할인 매장의 아침은 항상 활기로 가득 차 있다.
새벽길을 달려 그날 매장에서 판매될 수산물이나 농산물들이 입고장을 통해 들어오고, 그것들을 운반해서 진열하는 바쁜 손길에서도 활기를 찾을수 있다.
세수도 제대로 하지 않은 듯 부시시한 차림의 유류업자들이 새벽에 가공한 신선한 우유를 가지고 냉장코너를 채우는 모습에서도,
베이커리코너의 직원이 이른 아침에 출근을 해서 오늘 구울 빵의 반죽을 하고 오븐을 데우고..
매장에 빵 굽는 냄새가 퍼질 쯤에는 다들 피곤하지만 새로운 하루를 맞이하는 벅찬 얼굴로 직원들이 하나 둘 자신이 일하는 파트에서 분주히 하루를 맞이할 준비를 한다.
민주는 그런 매장의 아침 분위기를 즐겼다.
오랜 시간 동안 자신이 쌓은 벽에 갇혀 혼자 지내던 시간을 다 보상이라도 받은 것처럼 직장에서 맞는 아침 시간은 그녀를 설레게 했었다.
왜 여지껏 그렇게 움츠리고 살았는지 후회가 될만큼..
모든것이 에너지로 충만한.. 그래서 오늘 이 곳에서 일어나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신경쓰지 않아도 될 것 같은 그런 분위기가 좋았다.
어제 무슨일이 있었든 상관없이, 집에서 어떤 언짢은 일이 있었든 이곳에서 만큼은 다 잊고
자신이 살아 있다는걸 느낄 수 있는 그런 분위기가 좋았고,적어도 직장에선 자기가 맡아서 해야 할 일이 있고, 그 일을 다 끝내었을때는 아무리 하찮은 일이라도 그 결과가 보이는 것이 좋았다.
민주가 직장생활을 시작하기 전, 8년이라는 시간동안 태환은 할 일은 많지만 정작 힘들게 해도 티가 나지 않는 집안일을 하찮게 생각했었다.
그동안 설겆이 한 번을 도와 준 적이 없을 정도로 집안일을 등한시 했었던 태환이 민주가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자신도 가사일을 도와주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 되자 조금씩 집안일을 돕기 시작하며 짜증이 불만으로 발전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던 것도 가사노동이 갖는 특성 때문이었다.
일은 많고 아무리 잘 해도 티는 나지 않지만, 하루만 하지않아도 눈에 띄는 집 안 일들..
잠자리에 들기 전 까지는 끝이 없는 일이 그랬고,
한 두번만 하고나면 그것으로 끝 나는 일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 그랬으며,
정성을 들여 청소며 빨래를 한다고 해도 하루만 지나면 똑같은 일을 다시 해야 한다는 것이 그랬다.
거기에 아직 제 앞가림을 할 수 없는 애기들의 양육문제까지 더해 진다면..
사람들과 어울려 조화롭게 살아가는 일..
민주는 그것이 두려워서 집안 일에만, 애기들을 보살피는 일에만 더욱 전념했었다.
태환이 집안 일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게끔 자신이 잘 하면 태환도 언젠가는 그녀를 인정해 줄 것이라는 기대 심리가 더욱 민주를 그 일에 매달리게 만들었다.
세상의 길은 하나 밖에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하지만 태환이 민주에게 보여 주고자 했던 다른 세상은 두려워했었던 것 보다는 훨씬 매력적인 곳이었다.
적어도 태환 이외의 대화상대가 생겼다는 것만으로도 민주는 감사하게 생각했다.
어제 저녁도 그렇게 실갱이를 하느라 4시간도 잘 수 없었다.
머리가 무거웠지만 아침 청소를 해야했기에 민주는 걸레를 가지러 사무실에 갔다.
사무실에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여직원들이 삼삼 오오 모여 애기를 하느라 술렁거리고 있었다. 딱히 눈을 마주치고 인사하는 직원들이 없었던 탓에 민주는 사무실 옆에 화장실에서 걸레를 빨고 있었다.
그때 화장실에 여직원 두명이 들어오며 민주에게 아는 채를 했다.
"언니,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그런데 아침에 무슨일 있었어요?
사무실 분위기가 왜 저렇게 술렁거린데?"
민주는 다시 걸레를 빨기 위해 세면대로 고개를 돌렸다.
"어머 .. 언니 모르셨어요?
아침에 매장에 난리 났었어요. 심야조에 현미 언니 남편이 매장에 와서 확 뒤집어 엎고 갔다구요."
현미언니라..
민주는 누구를 얘기하는지 잘 알 수가 없었다.
이름은 귀에 익었지만 같은 부서라도 하는 일이 달랐던 탓에 그리 얼굴을 마주칠 일이 많지 않아서인지 금방 얼굴이 떠오르지가 않았다.
"근데.. 현미언니 아저씨가 왜 매장을 엎어 놓고 갔다는 건데?"
"언니,정말 몰라요? "
오히려 여직원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민주에게 되 묻는 거였다.
"뭘? 무슨 얘긴데?"
결국 민주는 자기가 일하는 부서로 돌아와서야 그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 언니가 영업쪽 직원과 바람이 났다는 얘기..
그것도 그 언니는 서른 중반의 나이에 유부녀이고, 그 상대는 아직 20대 초반의 젊은 총각이라는 애기..
"이야!! 능력있네. 대단해."
우스겟 소리로 자신과는 상관이 없다는 듯 말을 하는 직원들이 있는 반면..
"미쳤어. 제정신이 아니라니까.
내가 그 언니 보니까 많이 밝히게 생겼더라. 그럴 줄 알았어.
아저씨가 얼마나 황당했을까?"
나라면..이라고 시작해서 결국 험한 말까지 해가며 비난을 하는 직원들도 있었다.
사람들이 살아 가다 보면 분명 이해라는 걸 해 줄 필요가 없는 상황도 있기는 하겠지만, 경우에 따라서 본인이 직접 당하지 않은 일에 대해 타인의 이해를 구한다는 것은 낙타가 바늘 귀를 통과하는 것 만큼이나 어렵고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 얘기를 들은 민주 조차도
"그 언니 대단하네.. 난 집에 있는 남자 하나 만해도 어떻게 정리가 안되는데 어떻게 둘씩이나 .."
며 우스겟소리를 해버렸다.
남의 일.. 나랑은 상관없는 일..
그렇게 쉽게 말을 해버리는 자신에게 놀라며 민주는 언젠가 시댁의 가족모임이 있는 날 큰 형님댁에 다 모여 저녁을 먹으면서 TV에서 방송되는 연예프로를 보며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그때 당시 아주 잘나가는 남자 연예인의 부인이 젊은 남자와 바람이 나서 간통죄로 고소 당한 일이 있었는데 그 방송을 보며 무섭게 쏟아내던 시댁 식구들의 비난에 질려버렸던 기억.. 어떤 이유도 용납되지 않는 순간이었다.
사람이니까 그럴 수도 있다는 걸.. 사람이니까 돈이 다가 아니고, 명예가 다가 아니고.. 그저 외로워서 잠깐 실수를 했을수 도 있다는 걸..
민주는 '외로워서'라는 그녀의 말이 머리에서 맴돌며 '그럴 수도 있지.. 표면에 보이는 화려한 생활이 다는 아니지..'라는 생각을 하던 차였다.
민주의 생각을 깨며 태환이 먼저 그녀에게 비난의 칼을 들이댔다..
"저런 정신나간 X같으니라고.. 저렇게 정신이 썩어서 .. 남자들이 나가서 얼마나 힘들게 돈을 벌어다 주는지 저런것들이 알긴 알겠어?
그저 집에서 밥이나 축내고 하나도 힘들이지 않고 호강시켜 주니까 지가 무슨 대단한 X 쯤 되는 줄 알고 저렇게 미친 짓을 하고 다닌다고..
외로워? 저것도 정신병자네. 참 남자 불쌍하다. 여자 하나 잘못 만나서 남자 인생이 그냥 똥창에 확 처박히는 거라고.. 저런 X은 그냥 사회에서 매장을 시켜 버려야 해."
"맞아요, 삼촌. 정말 속 편한 소리만 하고 있네. 남편이 돈 잘 벌어 주겠다. 사회적으로 인지도도 있겠다. 도대체 뭐가 아쉬워서 저런 짓을 하냐고..
난 큰 형님이 저 정도만 되면 왕으로 떠 받들고 살겠다. 저렇게 제 복도 챙길 줄 모르고 하는 것들은 그냥 확 교도소에 집어 넣어서 평생 콩 밥을 먹여야 되요. "
태환의 말에 40대에 들어선 큰 형님이 거들고 나섰다.
"저런 여자들 때문에 다른 우리같은 선의의 피해자가 생기는 거야.
왜 저렇게 자신의 본분을 잊어 버리는 여자들이 많은지 나는 이해가 안돼.
세상에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바람을 피우느라 정력을 소모해?
난 절대로 저런 여자들 용서하면 안된다고 봐. 저 여자는 남편이 책도 내고, 학교 강의도 나가고, 방송도 하고 하는거 보면서 뭐 느끼는 것도 없었을까?
자기 개발을 한다든가. 공부를 한다든가. 뭐 그렇게 건설적인 방향으로 살 생각은 안하고 저런 추잡한 짓이나 하고.. 불결해.
엄마, 엄마도 저런 여자들 보면 정말 한심 하지?"
시누가 돌연 민주의 시어머니께로 질문을 던졌다. 상식적으로 가장 먼저 TV속의 그녀를 질책할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의외로 어머니는 말씀이 없으셨다.
시누는 어머니의 동의를 구하는 말을 던지고선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저 여자도 어지간히 사는게 힘들었는가 보지.."
일순 가족들의 시선이 민주의 시어머니에게로 쏠렸다.
생각지도 못했던 대답..
"엄마 , 지금 무슨 소리하는 거예요. 저 여자가 어디 사는게 힘들어 보여?
먹을게 없어서 걱정을 하겠어. 남자가 못나서 그 걱정을 하겠어. 자식이 없어서 걱정이겠어..
어디 한 군데 흠잡을데 없이 사는 여자가 뭐가 부족해서 저런 짓을 하냐고..
그러니까 뭐야.. 만약에 저 여자처럼 편한 팔자가 되면 엄마도 바람을 필 수 있다는 거야 뭐야. "
민주가 보기에 시누의 그런 언행은 부모님께 하기에는 너무 불손한 것이었다.
"요즘 애들은 어른을 공경할 줄 도 모르고 너무 버릇이 없다"며 혀를 차는 시누였다.
자신이 졸업한 고등학교에 계약직 교사 생활을 하는 시누의 말투는 항상 상대에게 명령을 하거나 아니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려고 들었다. 가난한 집안의 맏이로 한참 살기 힘든 시대에 태어나서 동생들 건사하느라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어머니를 대할때면 민주의 시누는 어김없이 어머니를 가르치는 선생 노릇을 할려고 들었다.
말로는 항상 엄마가 불쌍하다고 하면서도 그녀의 행동은 시어머니를 얕보고 함부로 대하는 적이 많았다. 민주의 시어머니도 앞에서야 아무말 못하고 계시다가 아가씨가 자리를 비우면
"지가 나 아니었으면 학교는 제대로 다니고, 밥은 세끼 제대로 먹었을줄 아냐"며
"내가 배아파 낳았지만 참 못됬다"며 그녀를 흉보는 적이 많았다.
어머니께 들어서 알게된 얘기지만 젊어서 사업이라는 걸 한다면서 집에 빛만 잔뜩 지워두고 시아버지는 단 한번도 돈을 벌어 가족을 봉양한 적이 없었다고 한다.
어머니께서 새벽시장에서 물건을 해다가 동네를 돌아다니며 팔아서 생계를 유지해야 했고,
네명이나 되는 어린 자식에 남편까지.. 어머니의 어깨에 지워진 가족이라는 굴레가 너무 무거워 세상을 포기하고 싶었을때 행인지 불행인지 조상신이 어머니께 내려 지금 하는 무당일을 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냥 한탄으로 듣고 넘기기엔 어머니의 삶 또한 그리 순탄치 않았다는 걸 알수 있었다.
충분히 세상을 비난할수도, 자신보다 더 나은 삶을 사는 그런 여자들을 보며 자신의 삶이 그렇지 못했음을 한탄하며 그녀들의 행동거지를 더 비난하고 나올 수도 있는 그런 시간들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머니께선 지금 단지 외로워서 가정을 버렸다는 그녀를 동정하고 있었다.
기본 교육을 받지 못해 한글도 모르는 어머니께서..
죽기 보다 싫었지만 먹고 살기가 힘들어 신내림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는 어머니께서 ..
고등교육을 받고, 사회적으로 지위와 명예와 조금의 부까지도 갖고 있는, 그래서 남 부러울것 없이 사는 그녀를 동정하고 계셨다.
그럴 수도 있다.. 사는게 힘들었는가 보다..
자신에게는 용납되지 않는 일이지만 다른 사람은 정말 힘이 들어서 그렇게 했을 수도 있다고 이해를 하고 있는게다.
민주는 시어머님의 무덤덤한 말투에서 인생의 무게가 느껴지며 맘이 아팠다.
다른 사람의 삶을 저렇게 초연한 눈으로 바라보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을 어머니께선 힘들어 하셨을지 그 시간만큼의 아픔이 속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날 저녁 가족들의 모임이 끝날때 까지 TV 속 그녀는 가족들 사이에서 천하에 둘도 없는 나쁜 X 이 되어 그냥 듣기에도 참 흉한 욕을 많이 들어야했다.
자업자득..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민주의 생각은 앞뒤 가리지 않고 퍼부어 대는 가족들의 비난과는 조금 달랐지만 단 한마디도 피력할 수가 없었다. 그저 자리만 차지하고 목석처럼 앉아 있을 수 밖에..
그렇게 그 일이 잊혀져가고 있었는데 오늘 민주가 들은 얘기는 도통 믿을 수가 없는 얘기들 뿐이다. 무슨 소설이나 드라마를 보는 것도 아닌데 바람이라니..
매장을 엎어놓고 갔다는 소문은 쉬쉬 거리는 입들을 통해 더욱 빠르게 퍼져갔고, 한 사람의 입을 건널때 마다 그 내용이 조금씩 첨삭이 되면서 영 엉터리인 얘기들도 아류작으로 매장을 떠다고 있었다.
"심야 직원을 다시 모집한대요. 언니 할 생각 없어요?"
같은 부서에 근무하는 동생이 민주에게 의사 타진을 해왔다.
"이번엔 내가 지원해볼까?"
민주는 욕심이 났다. 조금만 있으면 큰애와 작은애의 겨울방학이 시작 될 시기였다.
직장생활을 접고 전업주부로 생활하던 민정이 민주의 애들을 거의 맡아서 돌봐주고 있었지만 뒤늦게 둘째가 생겨서 달이 찰 수록 민정도 많이 힘들어 하고 있었다.
자신이 자청해서 동생의 사회생활을 권했었지만, 일반 회사처럼 근무 시간이 일정치 않은 관계로 거의 모든 시간을 별난 두 조카와 자신의 아들을 같이 돌봐야 하는건 말처럼 그렇게 만만치가 않았는데, 설상가상으로 뱃속에 둘째까지 갖게 되니 몸이 불편해질수록 그렇게 날카로워지지 않아도 되는 일들에 짜증이 늘어가고 있던 차였다.
민주가 사회생활을 시작한 지도 벌써 9개월이 다 되어가고 있었지만 그때까지도 태환은 민정이 자신의 애들을 봐주는게 고맙다기 보다는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민주도 그런 언니에게 늘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었는데 뾰족한 수가 없으니 그녀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우연찮게 찾아온 기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