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에게 있어 결혼 후 처음으로 직장생활을 시작한 그 해 6월은 유난히도 힘든 시간들이었다.
애초에 사람들과 섞이는 걸 거부했던 그녀의 성격때문에 분명히 사람을 상대하는 그런 직장에서 오래 버티지 못 할 꺼라는 우려와는 달리, 민주를 힘들게 했던 진짜 이유들은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불쑥 불쑥 고개를 들이밀었다.
집안에 아픈 어른이 계시다는 것과
아직 혼자 힘으로 제 일을 척척 해 내지 못하는 어린 자식들이 있다는 것도 그녀를 힘들게 하는 상황들이었지만,
이미 언니에게 들어서 예상하고 있던 그런 일상 생활의 고단함과는 비교도 안 될 난제가 있었으니 조금의 변화도 용납하지 않는 태환의 사고방식이 그것이었다.
거기엔 다른 사람이 비집고 들어갈 입구도..
그리고 그가 빠져나올 수 있는 출구도 없었다.
집 밖의 일은 남자가.. 집 안의 일은 여자가..라는 그의 고정 관념은 결혼을 하기 전 부터 그가 항상 강조했던 말이었다.
처음 태환을 알게되었던 그때부터 남자라는 이유로 모든 일에서 우위를 주장하는 일이 많았던 터라, 저렇게 고리타분한 사고방식을 갖고있는 사람이 여자들의 사회생활에 대해서 만큼은 어쩜 저렇게 개방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지 민주로서는 도저히 이해 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맞서서 그를 변화 시켜야 겠다는 생각도, 그럴 필요도 느끼지 못했었기에 그냥 그대로 보낸 시간이 벌써 11년을 훌쩍 넘어서고 있었다.
하지만 분명 그들의 생활엔 변화가 있어야 하는 순간이 찾아 왔고, 시간이 갈수록 조금도 변하려고 들지 않는 그의 극단적인 양면성으로 인해 그들의 신경전도 점점 그 선을 넘어서고 있었다.
요즘 민주는 거울 앞에서 웃는 연습을 한다.
처음 이 생활을 시작하면서 출근까지 10여분의 여유가 있는 날은 커피를 한 잔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많았었는데 요즘 들어선 커피보다는 거울앞에서 이런 싱거운 작업을 하느라 그 시간을 다 보내고 있었다.
웃는 것 쯤이야..
라고 가볍게 생각했었다.
그런데 사람을 상대하다보면 어느 틈엔가 굳어져 있는 자신의 얼굴을 보게 되는 날이 많아지면서 극단의 조치로 이렇게 억지 웃음을 연습하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얼굴 표정까지 관리해야 하는 직업덕분에 주위에서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죽을때가 가까웠다는 징표 라던데..'라는 싱거운 소리를 들을 정도로 민주의 성격은 얼굴에 띠는 미소 만큼이나 밝아져 있었다..
사람의 왕래가 많은 할인점에서 일을 한다는 건 우려했던 것 보다 재미있는 일이 많았다.
기질이 재각기인 사람들을 모두 친절하게 대해야 하는 직업.
처음 한 달동안 가끔은 뭣하러 이런 직업을 선택 했나하는 후회를 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민주의 주위에는 자신과 같은 업무를 보는 직장 동료들이 있었고, 말 한마디를 오해해서 황당한 일을 당하거나 할때면 자신의 일처럼 흥분하고 위로해 주는 그들을 보며
서른 두 해를 사는 동안 내내 사람과의 거리를 두고 살았던 그녀의 생활이 새삼 후회스럽기도 했다.
처음 일을 시작할때만 해도 언니에게 맏겨둔 아이들이 걱정스러워 일을 마치기가 무섭게 집으로 가기가 바빴던 그녀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가끔은 힘든 일상을 마치고 갖는 동료들간의 술자리도 참석하면서 나름대로 생활의 재미를 찾아 가던 어느 날, 서로가 애써 모른척 하고 있어 별일 없을꺼라고 믿었던 문제가 마침내 그 모습을 드러내고 말았다.
그 날도 민주는 마감근무를 마치고 집까지 걸어서 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밤 12시가 넘은 시간이었지만 큰 도로를 따라 늘어선 술집들의 불빛 덕분에 거리는 아직 대낮처럼 훤하기만 했다.
또 같은 동네에 7년을 넘게 살면서 사귄 친구가 저녁 귀가길의 동행이 되어준 덕분에, 새로 시작한 일에대한 수다도 떨고, 애기들 키우는 얘기도 하면서 걷기에는 좀 멀다 싶은 그 길을 걸어 다니는 날이 많았다.
"요즘 아저씨랑은 좀 어때?"
"뭐 달라질게 있나.."
"왜 자기가 소원 이뤄줬는데 고맙다고 안해?"
"고맙다는 말 안해도 좋으니까 제발 애들이나 좀 잘 챙겼으면 좋겠네.."
"내가 볼 땐 좀 힘들다고 본다. 그때가 언제였지?
우리가 일 다니기 전에 취직 축하 한다고 아저씨들이랑 같이 저녁먹고 한 날 있잖아.
그날 우리 애들 아빠가 집에와서 뭐라고 하는지 알아?"
무슨 말이 나올지 민주는 알고 있다. 또 사람이 꽉 막혔다는 얘기를 하고 싶은 거겠지..
"뭐라고 하던가요?"
별로 듣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물어 주는게 예의인것 같아 한마디를 던졌다.
벌써 새벽 한 시가 가까워오는 시간인지라 거리에는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취객들이 많았다. 나이는 어려 보이는데 나름대로 나이가 들어보이게 하느라 짙게 한 화장이 더 어색해 보이는 학생들도 있었고,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상스런 욕짓거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해대는 40대 아저씨도 있었다.
큰 길이라 괜찮겠거니 생각했던 민주와 친구는 술이 많이 취해 자기 몸도 잘 못가누는 두명의 40대 아저씨들이 술이나 한잔 더 하자며 팔을 잡아 채는 바람에 기겁을하고 도망을 치느라 무슨 얘기를 하고 있었는지도 까맣게 잊어버렸다.
한참을 달려 간신히 그 자리를 벗어나서야 겨우 숨을 돌리며 친구가 한마디했다.
"미친놈들, 술을 마실꺼면 곱게 마실 것이지.. 에잇 재수 없어."
그러고는 그들이 잡았던 팔뚝부위를 기분 나쁜듯 털어댔다.
놀라기는 민주도 마찬가지였지만 친구가 하는 걸 보고는 그냥 웃어버렸다.
"다음부턴 택시 타고 다녀야 겠다."
6월의 밤 공기는 아직 싸늘한데 집 안에 들어서니 온기가 느껴졌다.
열려있는 방 문으로 수아의 손이 삐죽이 나와있는게 보였다.
그 손을 보고 민주는 기분이 좋아져서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 조금전 집에 오는 길에 있었던 불쾌한 일은 까맣게 잊어 버렸다.
방 안에서는 TV소리가 요란했다.
'잘꺼면 TV를 끄고 자지..' 이렇게 생각하며 방으로 들어서는데 아직 태환이 자지 않고 있었다. 문소리가 났는데도 방 안에선 인기척이 없어서 그녀는 태환이 잘꺼라고 생각을 했었는데 그가 그녀쪽은 처다 보지도 않고 TV에만 눈을 박고 있다.
하루 종일 까맣게 잊고 있었다.
어제 저녁에도 다가오는 그를 '피곤하니까 내일..'이라며 밀어냈던 기억이 났다.
그러기를 벌써 5일째 ..
자신이 화가났다는 걸 간접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거였다.
"아직 안자고 있었어? 근데 왜 인기척도 안해.. 난 자는 줄 알았네."
"자고있기를 바랬던 거겠지. 어디서 뭘하다 이제 오는거야?"
그는 이미 날카롭다. 자칫하다가는 오늘도 베일 각오를 해야 할 지도 모른다.
"오늘 마감이 좀 늦었어. 또 경희 엄마랑 같이 걸어온다고 시간이 좀 더 걸렸네.."
"이젠 시간을 끌다끌다 안되니까 주위에 사람들까지 이용하냐?"
그게 아니라는 말이 지금 상황에선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민주는 이미 알고 있다.
베개도 베지않고 누워있는 수민이를 고쳐 눕히고 거울앞에 앉았다.
화장을 지울 생각이었다. 그래야 씻고 잠을 잘 수 있으니까..
천천히 화장을 지웠다. 태환은 여전히 TV만 보고 앉았다.
..후..
오늘은 더 이상 빠져 나갈 곳이 없을것 같은 생각에 한숨이 났다. 태환은 벽에 기대 앉은채 한번쯤은 '빨리 하라'고 다그칠 만도 한데 한마디도 하지않고 조각처럼 앉아있다.
자리에 눕기까지 그 지루한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알수가 없었지만 그녀는 지금 베개에 머리를 붙이고 자리에 누워있었다.
아무말도 하지 않는 그가 더욱 부담 스러웠다.
불꺼진 방에 퍼지는 TV소리는 유난히 더 크게 들렸지만 다가서지도 물러서지도 않는 그에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민주는 팽팽하게 당겨진 신경을 놓는 순간, 순간적으로 모든 소음이 사라지며 깜빡 잠이 들고 말았다.
정말 몇 초 동안의 일이었다.
누군가 그녀를 신경질적으로 흔들어 깨운다.
눈을 떠야 하는데 쉽지가 않다. 그게 의식적이건 아니건 더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 시간이 다가오고있다는걸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러고 잠깐 .. 다시 조금 전 보다 더 세게 그녀를 흔들어 깨운다.
" 너 끝까지 이럴꺼야??"
그 한마디에 무엇에 얻어 맞은듯 자리에서 벌떡일어나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