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작가

이슈토론
시어머님이 하신 김치를 친정에 나눠주는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배너_03
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조회 : 868

하루를 1년 처럼..


BY bebestar 2004-09-03

 

 

민주는 아침에 일찍 눈을떴다.

그녀의 어깨를 감싸는 남편의 손길에 놀라 잠이 깬 것이다.

몸부림이 유난히 심해 잠을 자는 동안에도 여러 수십번씩 그녀의 몸을 스치는 남편의 손길로 인해 결코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지 못하는 그녀였지만, 숨소리조차 소음으로 들리는 새벽을 매일 이렇게 뒤척이며 잠이 깬 날은 새벽녘에 무심코 덮쳐오는 남편의 손길에 굉장히 예민해 질 수 밖에 없었다.

민주는 신경질적으로 자기의 어깨를 짓누르는 남편의 손을 떼어 놓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아니 투명한 색체가 너무 예뻐서 예전에 그녀로서는 큰 맘 먹고 쇼핑몰에서 구매한 크리스탈 와인잔에 더러운 먼지가 앉은 것을 털어낼때처럼 언짢은 마음으로 그의 손을 털어냈다.

그리고 한숨..

분명 어제 저녁에도 둘은 싸웠었다.

금방해서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도는 흰 쌀밥과 시어머님의 손맛 덕분에 아무것도 가미하지 않고 그저 잘 익은 김치 한 조각만으로 끓여놓은 김치찌게를 찬으로해서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이 저녁을 뚝딱 먹어치우고, 설겆이를 하고, 아들의 다 못한 공부를 봐주고....

아주 일상적인 하루의 마무리를 하고 있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그렇게 ...

여덟 살짜리 아들 녀석의 공부가 끝이 난 시간은 저녁 9시가 훨씬 넘어 10시가 가까운 시간이었다.

거의 9년을 가정이라는 작고 안전한 울타리에 살던 그녀가 두 어달 전부터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가장 큰 변화가 있었다면 그건 아이들에게 그녀가 투자 했던 시간과 노력이 예전의 1/10 만큼도 되지 않는다는 거였다.

사회를 모르던 그때..

아니 바깥 세상이 두렵기만 했던 그녀가 가정이라는 작은 둥지 속에 숨어 살며 그녀가 살아있다는걸 느끼게 하는 단 하나의 기분 좋은 스트레스가 있다면 그건 그녀가 아이들을 가르치며 느끼는 그런 감정들 이었다.

하지만 그녀를 살게 하던 그 스트레스가 겨우 두 달의 시간이 지난 지금은 그녀의 목을 조여오는 가장 큰 일상의 노동이 되어 있었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일을 시작하게 될 지 모르고 공부에 좀 더 욕심을 내느라 1년 전부터 가르치기 시작한 한자 공부를 겨우 마치고, 영어단어를 외우라고 막 다그치는 그녀를 보며 남편이 한마디 던진게 그날 언쟁의 화근이 되었다.

 

"지금 시간이 몇신데 여지껏 공부를 시킨다고 그러는 거야?

일찍 자야 일찍 일어날꺼고 그래야 학교 생활도 제대로 할 꺼 아닌가 말이야.."

 

누가 들어도 옳은 말이다.

하지만 그의 말에는 짜증이 잔뜩 묻어 있었고

그 짜증의 근원이  매일 밤 이렇게 공부가 늦어지는 아들 녀석으로 인해 잠자리에 드는 시간이 늦어지면 항상 '피곤하다'를 입에 달고 사는 그녀가 오늘도 어김없이 자기를 회피할 것이라는 ..그런 우려가 섞여서 나오는 어쩔수 없는 투정이라는걸 알고 있었기에 민주는 그 말을 못들은 척 할 수 밖에 없었다.

언짢은 말을 듣더라도 오늘 하루도 그냥 아무일 없이 넘길 수 있다면 이정도의 짜증은 달게 받아 들일 수  있었다.

다시 영어 공부가 시작되고 탐탁찮은 눈빛으로 아들과 민주를 내려다 보던 태환이 혼자 그림을 그리고 놀던 딸아이에게 버럭 소리를 지르기 전까진 눈치 빠른 아들녀석도 지금 엄마 아빠가 싸움을 하려고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때마침 애들 공부에 방해 된다며 민주가 TV마저 껐었던 터라 태환의 목소리는 그저 소음에 묻혀 들을때 보다 비정상적으로 크게 들렸고 그 소리에 깜짝 놀라 태환을 쳐다보는 민주도 언짢은 마음이 순간적으로 확 일어났다.

자신의 목소리가 컸다고 느낀 탓인지 약간 움찔하던 태환은 오히려 그런 상황이 못마땅한 듯

더 큰소리로 딸아이를 몰아새우기 시작했다.

"너 여기가 스케치북이냐??

바닥에 이게 뭐야. 온통 크레파스 칠을 해서 엉망이잖아. 니가 청소 할꺼야? 엉?"

신경질 적으로 딸아이의 손에서 크레파스를 뺏어 들고는 엉덩이를 한대 쎄개 때렸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노기 어린 눈으로 딸아이를 뚫어져라 쳐다 보며

걸레 들고와서 빨리 안 닦어?

하며 소리를 질러 댄다..

다섯 살 수아의 눈에도  아빠의 이런 갑작스런 행동이 당황스러웠는지 두눈에 눈물만 가득 담은채로 멍하니 자기를 노려보고 있는 아빠를 올려다 볼 뿐 그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다시 짜증스런 한 마디

"어 이놈 봐라.  아빠 말은 안 듣겠다는 거야 . 뭐야?"

"고함소리에 놀라서 그런 거잖아. 내가 닦을테니 놔둬요. 뭐 그림 그리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뭘 그래? 나도 깜짝 놀랐네.."

그 한마디로 상황이 그렇게 나빠지리라고는 상상도 못하고 있었는데, 아들의 영어 책으로 눈길을 돌리던 민주의 귀에 크레파스 통이 바닥에 떨어져 박살이 나는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다. 

결혼하고 두달만에 예물시계를 바닥에 던져 박살을 내 놓은 후 다시는 그러지 않겠노라고 자신을 책망해가며 무릎까지 꿇었던 그가 다시 민주 앞에서 물건를 던져  보란듯이 박살을 내놓고 있었다.

갑자기 왼쪽 가슴이 뻐근하게 아팠다. 손으로 쥐어 뜯는 느낌으로 머리칼이 쭈뼛거리고 섰지만 그녀는 고개를 들지 않고 두 눈을 감았다.

'괜찮아 질꺼야. 괜찮아. 조금만 .. 조금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