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나는 공공의 적 ?
그동안 내게 더없이 다정했던 파블리나가 얼마전부터 나를 서먹서먹하게 대한다는 느낌을 가져왔기 때문에 그녀와 둘이서 시간을 보내며 얘기를 해보고 싶었다.
다른 여자 동료들로부터 받는 언어폭력과 적대적인 행동은 어렵게나마 이겨낼 수 있었으나 거의 친구처럼 지내왔던 파블리나와의 소원한 관계는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에게 퇴근 후 함께 식사를 하러 가자고 제의했다.
파블리나는 다행히도 내 제안에 별 망설임 없이 OK를 했다.
하루종일 거의 멍한 상태로 이런저런 업무 처리를 했다.
도무지 집중할 수 없었다.
파블리나와 약속한 저녁 8시만 되기를 기다리며 수도없이 시계를 쳐다 보았다.
드디어 7시 30분이 되어 나와 파블리나는 책상정리를 했다.
파블리나의 차를 타고 St. Michel (생 미셸)로 가 어렵게 주차를 시킨 후, 한 그리이스 식당을 골라 안으로 들어갔다.
배경음악이며, 음식을 써빙하는 사람들이 좀 큰소리로 떠든다는 점만 빼면 참으로 활기찬 분위기의 전통적인 그리이스 식 레스토랑이었다.
우리는 웨이터의 안내를 받아 약간 구석진 자리에 놓여있는 작은 원탁으로 가 앉았다.
파블리나는 운전하는 내내 별 말이 없었고 식당에 들어와서는 아직까지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나와 마주보고 앉은 그녀는 식당의 인테리어를 별 감동없이 휘휘 둘러 보았다.
내 시선을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는 메뉴를 읽으며 각자 먹을 것을 시켰다.
별 식욕이 없던 나는 여러가지 작은 접시에 담겨져 나오는 그리이스 식 샐러드를 주문했다.
양고기 구이를 시키려다가 그녀도 나와 같은 것을 시켰다.
아페리티프는 Kir Royal (키르 루와얄)로 하기로 하고 각자 한잔 씩 시켜놓고 서로의 눈을 그때서야 바라 보았다.
« 파블리나, 무슨 일인지 말해줘. 지난 번 파티이후로 왜 나를 서먹서먹하게 대하는 거지 ? »
« 아이…그럴리가. 은아가 괜히 예민하게 생각하는 거야. »
그녀는 키르 잔을 들고 건배하자고 했다.
우리의 잔에서 찡 하고 유리가 부딪히는 경쾌한 소리가 났다.
« 파티 후, 꺄따리나 와 레티씨아는 나를 지독할 정도로 대해.
더 심해졌어.
나를 바라보는 그 여자들의 눈에는 거의 살기까지 느껴질 정도로 섬뜩하다니까.
내게 아예 인사도 안해.
무슨 질문을 할라치면 무조건 이 메일로 보내라는 거야. 내 코 앞에들 앉아있으면서.
내가 키보드 두들기는 소리가 너무 커서 집중할 수 없으니 좀 덜 힘을 주고 건반을 두들겨 달라고 정식으로 이메일로 요청을 해 오지를 않나.
그리고......
중요한 미팅이 있으면 내게는 일언반구 없이 너희들끼리 싹 없어지지를 않나….
카페에 내가 커피를 마시러 들어가면 너희들이 갑자기 말을 끊는다거나 아예 카페 밖으로 나가 버리지를 않나….. »
내가 ‘너희들’ 이라고 말을 하는 순간 파블리나가 발끈하며 내게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가 그만둔다.
« 점심식사하러 갈때나 휴식시간을 가질 때 내게는 누구도 함께 가자는 말도 안하고.. »
내가 계속 말을 이었다.
« 그 말은 틀려. 너는 거의 언제나 남자 직원들이나 상사들과 함께 식사를 하쟎아 ? »
내 눈은 보지도 않고 파블리나가 차갑게 쏘아 붙였다.
« 사실이 아냐. 너희들끼리 식당에 가고나면 나만 혼자 남아있게 되니까, 다른 직원들이나 상사들이 내게 함께 점심식사하자는 제의를 하게되고, 아무 거절할 이유가없으니 나도 그들을 따르게 되는거야..
너희들이 내게 제의를 했으면 나는 너희들과 함께 갔을꺼야.
내가 너희들에게 식사 제안을 해도 대답은 언제나 노 쟎아 ?
내 말이 틀려 파블리나 ? »
내 말에 파블리나가 피식 웃었다.
불쾌했다.
« 분명히 내가 알지 못하는 일들이 있어. 부탁이야. 도대체 왜들 그러는 거야 ? »
파블리나가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갑자기 내 눈을 똑바로 들여다 보았다.
« 은아 ! 난 은아가 처음 입사해 적응 못하고 허둥댈 때 제일 많이 도와 주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어. »
나는 크게 머리를 위 아래로 흔들며 잘 알고 있다, 매우 고맙다는 생각을 하고있다 라는 것을 있는대로 보여 주려고 했다.
« 그런데…난 은아의 갖가지 행동들에 자꾸 은아가 도대체 어떤 사람인 지 자신이 없어지는 거야 . 이왕 이렇게 됐으니 아주 솔직하게 말할께. 은아, 부서장과는 어떤 관계이지 ? 그리고 니꼴라는 ? »
나는 그녀의 말에 그냥 멍해져 그녀의 동그란 입만 쳐다 보았다.
« 도대체 무슨 ….무슨 얘기야 ? »
« 부서장 파티 때 니꼴라와 은아가 함께있는 모습을 발견하고 큰 충격에 빠진 꺄따리나가 며칠 씩이나 결근했을 정도로 고통에 빠져 있었던 것을 알기나 해 ?
내가 은아한테 분명히 말했쟎아 ? 꺄따리나가 니꼴라를 사랑한다고…
은아는 오히려 나를 의심했어.
기억나 ?
니꼴라와 나와 비슷한 외모의 여자가 화장실에서 추잡한 행위를 하고 있는 것을 목격했었다고… 그런데…그 여자가 …바로 은아였다는 소문이 돌고 있어.
두사람을 봤다는 사람이 퍼뜨린 소문이기 때문에 아무도 그 말을 안 믿는 사람은 없어.
자신이 한 짓을 내게 누명씌우며 스스로 결박하다는 알리바이를 만들려고 한 것은 아니었어 ?
나는 그 소문을 듣던 순간 갑자기 그런 생각을 하게된 거야.
어떻게 자신이 한 일을 감추려고 내게 순진한 척 하며 그 여자가 내가 아니었나 생각했었다고 할 수 있나, 나는 거의 쇼크받을 지경이 되었지.
그때. 은아를 다시 보게 되더라고……
그리고, 그 뿐이 아니야 »
그녀가 제 앞에 놓여있는 키르를 한모금 마시고 나서 한숨을 쉬었다.
« ……그뿐이 아니야. 은아와 부서장을 아침 일찍, 저녁 늦게 지하 주차장에서 봤다는 사람들이 많아. 두 사람이 그렇고 그런 관계아니냐고.
부서장이 젊고 돈 많은 독신남이니 그를 유혹하려는 것 아니냐고.
게다가 은아는 외국인이쟎아 ?
외국인으로서 프랑스 국적을 취득하려면 프랑스인과 결혼해 애를 갖는 것이 제일 빠른 방법이쟎아 ?
그 목적으로 은아가 회사의 독신남성들에게 교묘히 접근하는 것이 아니냐고 ?
그런 소문까지 나고있어. »
얼굴색 하나 안 변하고 중세기 앵퀴지터(Inquisiteur : 종교재판소 판사)마냥 날이 시퍼런 칼로 생 심장을 후려파는 듯한 고통을 내게 주는 이 여자가 내가 알고있던 파블리나인가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너무나 기가 막혀서 숨이 목구멍에 막혀 빠져 나오지 못하는 것이 느껴졌다.
« 지금 내게 하고있는 그 말들을 파블리나는…파블리나 너는 믿고있는 거야 ? »
말을 더듬으며 겨우 그 말만 뱉어냈다.
그녀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내 얼굴에서 시선을 떼고, 자기의 손가락만 바라 보았다.
그리고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가 계속 말을 이었다.
« 다른 건 몰라도, 나는 은아가 로랭에게 위험할 정도로 접근한다는 생각은 줄곧 하고있어. 여자의 본능으로 알수 있지.
은아가 부서장이랑 자든, 니꼴라와 자든, 누구와 자든 나는 아무 관계도 없어.관심도 없다구.
단지, 내가 사랑하는 로랭마저 건드리려 한다는 데에 전율마저 느낄정도야. »
« 마...말.도 안돼… »
내 눈에서 눈물이 솟구쳐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내가 그렇게 좋아하는 여자친구의 입에서 이렇게 무서운 말들이 쏟아져 나올지 내가 어떻게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사람들이 무서워졌다.
아무 죄 없는 사람이 대번에 공공의 적이 되어 버리기란 이렇게 간단한 것이었다.
회사의 동료들이 페스트 피하듯 나를 피하거나 말도 건네지 않는 이유가 바로 내게 억지로 뒤집어 쒸워진 이 더러운 포장 때문이었던 것이다.
나를 미워하는 몇몇 사람들이 내뱉은 저주의 말들이 이 사람, 저 사람의 입을 거쳐,
그 천박하고 부정적인 나에 대한 이미지가 증오와 원한과 시기심에 부풀려질대로 부풀려져 나, 이은아는 바야흐로, 공공의 적, 더럽고 추잡하고 용서할 수없는 퓌탕( Putain : 더러운 매춘부)이 되어 버린 것이었다.
그날 저녁 파블리나와 나는 단 한 숟가락도 들지 못하고 그냥 그 식당을 나와 버리고 말았다.
그녀의 말에 너무도 충격을 받은 내가 단 한마디도 못하고 눈물만 질질 흘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 말도 없이 소리도 안내며 눈물을 흘리고 있는 나를 그녀가 일으켜 세울 때에 힘이 없는 다리가 꺾어져 바닥에 넘어질 뻔 했다.
파블리나가 나를 부추켜 세웠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파블리나와 나는 단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내 가슴은 그저 갈기갈기 찢어져 나가는 것만 같았다.
너무 마음이 아팠다.
너무나 억울하고 괴로왔다.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냥 침대에 쓰러져 다시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고 싶지 않다는 절망감까지 느꼈다.
차창 밖으로는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