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Party 2
파블리나는 로랭을 끌고가듯 하며 우리 쪽을 가리키면서 로랭의 귀에 대고 무슨 말인가 속삭였다.
파블리나가 귓속말을 마치자마자 벽에 몸을 기대고 있는 나와 니꼴라 쪽을 로랭이 흘낏 쳐다 보았다.
니꼴라는 고개를 비스듬하게 옆으로 숙이면서 샴페인 잔이 들려있는 오른손을 살짝 들어 로랭에게 인사했다.
로랭도 가벼운 눈인사를 니꼴라에게 던지고 난 후 바로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으나 내 미소를 받는 그의 턱선이 굳어있었다.
그는 깊고 빛나는 눈길로 나를 바라 보았다.
질문을 던지는 듯한 그런 눈길, 피할 수 없고 벗어날 수도 없는 그런 광채나는 눈길로 아주 짧은 시간 동안 나를 바라보던 그가 곧바로 내게서 눈을 떼고는 파블리나와 함께 있던 그룹의 여자애 들에게 밝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그들 쪽으로 다가갔다.
여자들은 그를 둘러싸듯 반기며 저마다 그에게 비쥬를 했다.
나는 로랭이 다른 여자애들과 비쥬를 나누며 뭔가 말을 한 후 환하게 웃는 모습을 끝까지 눈으로 좇았다.
'은아, 혹시 로랭에게 마음이 있는 것 아냐 ?'
갑작스런 니꼴라의 질문에 화들짝 놀라 그를 올려다 보았다.
'나를 속일 수는 없어. 로랭을 바라보는 은아의 눈빛만 봐도 알수있지.'
니꼴라가 재미있다는 듯이 나를 내려다 보았다.
'나는 애인이 있는 남자에게는 관심이 없다구요.'
시치미를 떼며 니꼴라에게 말했다.
'현명한 생각이지.'
나는 그의 말에 대꾸없이 쌀롱안을 둘러보며 다른 동료들이 각기 원을 그리고 둘러서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있는 모습들을 보았다.
내가 대부분의 프랑스인 동료들에게서 느끼는 것은 이 나라 사람들이 상당히 위선적인 데가 있다는 것이다.
서로를 죽일듯이 헐뜻다가도 그런 일이 언제 있었냐는 듯 함께 식사를 하거나 커피를 마시며 세상에서 가장 친한 친구인 듯이 행동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오늘 밤도 여러 그룹들을 이루고 있는 사람들을 둘러보면 끔찍하게 서로를 싫어하면서도 마치 세상에서 제일 맘에 맞는 사람이라는 듯 다정하게 등을 치고 , 귀엣말을 나누고, 박장대소하며 서로의 농담에 맞장구 치는 사람들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싫어하는 사람들과는 가벼운 대화를 나누는 데에도 어려움을 느끼는 나로서는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잠시 나만의 생각에 빠져있던 나를 니꼴라가 팔을 잡아 이끌며 테라쓰 쪽으로 난 거실문을 열고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세느강이 내려다 보이는 깔끔한 테라쓰는 상당히 넓었다.
테라쓰 난간을 따라 길게 줄지어 놓여있는 각종 화초들이 살랑대는 초가을 바람에 이리저리 몸을 흔들어 대며 상큼한 초록빛 향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난간 밑쪽을 내려다 보니 아파트 밑으로 잔잔히 흐르고 있는 세느강이 수정같이 맑고 투명한 거울이 되어 밤하늘에 총총한 별들의 수선스런 모습을 그대로 반영해 주고 있었다.
위를 올려다 보아도, 아래를 내려다 보아도 수많은 보석들이 박혀있는 검정색 비로오드가 신비롭게 펼쳐져 있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이었다.
높은 지형위에 자리잡고 있는 아파트의 마지막 층이라 시야가 넓게 트여 가슴이 다 시원할 정도 였다.
세느강 건너편에 늘어서 있는 고느적한 아파트들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들은 저마다 비밀스런 제 얘기로 부산스레 수다를 떨고 있는 것 같았다.
9월의 빠리의 밤은 숨이 막힐 정도로 고혹적이다.
나는 촉촉한 밤공기를 가슴 깊숙히 들이 마셨다.
머릿 속이 다 맑아지는 느낌이었다.
부드럽고 매혹적인 밤 분위기에 은근한 기분이 되어 손에 들려있던 샴페인을 한모금 마셨다.
차가운 액체가 아직 식사를 하지않은 텅빈 몸 속을 천천히 미끄러져 내려가는 것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그때, 눈을 감고 기분좋은 빠리의 밤을 음미하던 나의 낮은 콧잔등을 니꼴라가 자신의 손가락으로 살짝 건드렸다.
나는 갑자기 불쾌해져 고개를 홱 돌려 그의 얼굴을 쳐다 보았다.
낮은 코에 항상 콤플렉스를 느끼고 있는 나로서는 그의 돌발적인 행위가 마치 나의 수치스런 부분을 강제로 들쳐내려는 행위로밖에는 설명이 되지를 않는 것이었다.
고유 영역을 침범당한 성주마냥 발끈 성을 내는 내 모습을 보더니 그가 쿡쿡 하며 나즈막히 웃는 것이 아닌가.
기가 막혀서 그의 장난끼 그득한 옆 모습을 한대 갈겨줄까 하는 충동심을 가라앉히랴 애를 써야했다.
'아아…..기분나빠 하지 말라고….작은 코가 너무 귀여워서 그래.'
'정말이지 당신은 예의가 없군요 ?
당신한테서 느꼈던 껄끄러운 첫인상을 자꾸만 확인해 가는 것 같아 유감스럽네요.
그리고 당신에 대한 소문도 그렇고..'
그가 갑자기 웃다말고 나를 어둡고 깊은 눈으로 바라 보았다.
그의 두눈이 열에 들뜬 듯 빛을 발하는 것을 바로 보고 있을 수가 없어 그에게서 몸을 돌려 세느강 쪽으로 눈길을 던졌다.
'은아는 나를 잘 몰라.
나는 은아가 잘못 알고 있는 그런 나쁜 놈이 아니라고.
그때 은아가 우연히 나와 어떤 여자의 정사장면을 목격하고 나를 오해하고 있다면 내 설명을 좀 들어줘.
나도 어쩔 수가 없는 상황이었어.
그 여자는 내게 미친 여자야.
회사에서나 밖에서나 나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는 여자라고.
어쩔 때는 두려울 정도야.
1년전에는 내 주소까지 알아내 내가 자기를 집안으로 들여 보내지 않는다면 제 머릿 속에 총알을 박아 넣어 버리겠다고 동네방네 떠나가랴 나를 위협하는 바람에 어쩌 수 없이 그녀를 집안으로 들여 보낸 적도 있어.
물론 곤드레 만드레 취한 그녀가 며칠동안 출근도 안하고 내 침대를 차지하고 있느라 나는 거실 쏘파 신세가 되어야 했지만 어쩔수가 없었지.
나 때문에 자살하겠다고 울고불고하는 여자를 은아라면 밖으로 내쫓아 버릴 수 있었겠어 ?'
그는 말을 마치고 잔에 남아 있던 샴페인을 쭈욱 들이켰다. 그리고는 세느강 건너편 쪽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내가 35살이 될 때까지도 아직 결혼을 안하고 있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어.
난 이날 이때까지도 아직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던거야.
그동안 수많은 여자들과 만나고 헤어지면서도 가슴이 아리는 듯한 진지한 사랑을 단 한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거야.
이제는 지겨워.
혼자 사는 데에 넌더리가 날 지경이야.
이젠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나누고 싶어.
사랑도, 시간도….내 영혼까지 이제 누군가와 나누고 살고 싶어.
내게 달라붙는 여자들도 내가 사랑에 빠졌다는 것을 알고 나를 자유롭게 풀어주게 되겠지.
나를 제 목숨보다 더 사랑한다며 자살하겠다는 그 여자도…결국.. 나를 풀어주게 될꺼야.'
긴 한숨을 내쉬고 난 후 니꼴라가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내려다 보았다.
'은아….
이런 말을 오늘 밤 해도 좋은 지 모르겠지만, 나는 은아를 처음 봤을 때부터 은아에게 정신없이 끌리는 내 맘을 어쩔 수가 없을 정도였어.
회사에서 무감정의 마스크를 쓰고 은아와 말을 하고, 함께 일을하고,..
내 속마음을 숨기느라…..'
그가 양팔로 내 몸을 잡고는 자기 쪽으로 향하도록 내 몸을 돌려 세웠다.
'나는 안되겠나 ?
내가 은아를 사랑해도 좋다고 내게 허락을 해주면 안되겠는가 ?
나는 이제 더이상 자제할 수 없을 정도로….'
나는 그의 팔에서 몸을 비틀고 빠져나왔다.
그러나 그가 갑자기 내 몸을 자기 쪽으로 억세게 끌어 안더니 놀라서 벌린 내 입 사이로 동물처럼 긴 혀를 집어넣고 거칠게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
나는 내 입속을 굶주린 듯 핥아대는 끈적한 혀를 밀어내려 있는 힘을 다해 그의 상체를 밀어 제꼈다.
그 바람에 내 손에 들려있던 샴페인 잔이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나 버리고 말았다.
갈기갈기 찢어진 크리스탈 조각들 사이로 샴페인 액체가 검은 그림자를 만들고 있었다.
니꼴라는 중심을 잃을까봐 난간을 잡고서도 내게서 눈을 떼지않고 있었다.
그때, 갑작스런 인기척을 느끼고는 우리 두사람이 소리가 난 쪽을 동시에 돌아 보았다.
꺄따리나였다.
그녀의 아랫입술이 파르르 떨리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니꼴라가 한숨을 쉬며 제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나는 꺄따리나에게, 아무 일도 아냐, 걱정하지 말라고,설명이라도 하려는 듯 그녀의 팔에 손을 댔으나, 그녀는 매몰차게 내 손을 밀쳐냈다.
'저녁식사가……저녁식사 준비가 다 되었으니 모두들 테이블로 모이라는군요..'
꺄따리나는 차갑고 메마른 목소리로 그 말만 간신히 내뱉고는 몸을 홱 돌려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잘못한 거에요, 니꼴라. 당신이 정말 잘못한 거라구요.'
나는 안으로 사라져 버린 꺄따리나가 남긴 빈 자리에 그대로 서서 니꼴라에게 등을 보인 채로 그렇게 중얼댔다.
'그렇다고 내 맘이 변하는 것은 아냐.
나는 아무것도 잘못한 것이 없어.'
그는 고개를 숙이고 있는 내곁을 지나며 내 귀에 대고 그렇게 속삭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