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나의 친구, 파블리나 트레뜨르 (Pavlina Traître ) ?
로랭이 휴게실을 나간 후 아무도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나는 그 자리에 남아 다른 사람들과 얘기를 나눌 생각이 없었다.
휴게실이 취조실로 변해 혼자 남겨진 내게 던져질 여러 사람들의 질문을 감당해 낼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모두에게 가볍게 미소를 지어 보인 후 나 역시 휴게실을 나와 사무실로 돌아왔다.
로랭은 내 근무석 맞은 편에서 한자리 떨어진 곳에 자리잡고 앉아 양미간을 찌푸린 채 나즈막한 목소리로 전화 통화를 하고 있었다.
통화내용에 골몰한 나머지 내가 자리로 돌아와 다시 서류를 뒤적일 때까지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근무석이 내 자리에서 가깝다는 사실에 공연한 안도감을 느꼈다.
서류를 읽으려다말고 전화통화를 하고 있는 로랭의 모습을 지켜 보았다.
그는 의자에 비스듬히 상체를 기대고 긴 다리를 자연스럽게 벌리고 앉아 있었다.
왼쪽 머리를 옆으로 살짝 숙여 어깨 위에 얹어놓은 수화기가 빠지지 않도록 고정 시킨 후 뭔가를 노트하고 있었다.
기다란 속눈썹이 내리깔고 있는 눈을 살짝 덮고 있고 그리이스 조각상에서 떼어 온 듯한 반듯한 코는 칼날같이 날이 서 있다.
엷은 윗 입술을 약간 도툼한 아랫 입술이 받치고 있다가 뭔가를 말할 때마다 굳게 닫혀져있던 양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가는 금방 닫히곤 했다.
그의 아름다운 옆 모습을 넋 놓고 바라보느라 누가 내 옆에 와 서있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사람의 기척을 느끼고 정신이 버쩍들어 그 쪽을 바라보니 한 여자가 재미있다는듯이 나를 내려다 보며 미소를 짓고 있다.
내가 로랭을 보며 넋 놓고 있었던 것을 눈치 챘을까 걱정이 되어 조금 당황했지만 바로 미소를 지어 보이는 것으로 그 낯선 여자를 맞았다.
그녀는 자기 이름이 파블리나 트레뜨르라고 했다.
새하얀 피부의 전형적인 북구 미인이었다.
나와 인사를 마친 후 바로 로랭 쪽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로랭도 눈을 들어 우리들에게 살짝 윙크를 하며 둘째, 세째 손가락에 볼펜이 끼어져 있는 오른손을 들어 맞인사를 했다.
파블리나가 내게 등을 보이며 로랭에게 손을 들어 인사할 때, 난데없이 아까 화장실에서 니꼴라에게 매달려 환희에 찬 신음소리를 내던 여자의 모습이 내 머릿 속에 떠올랐다.
파블리나의 허리까지 닿을듯한 빛나는 검은 머리와 전형적인 팔등신 미인의 완벽한 뒷모습이 아까 그 여자의 모습과 겹쳐져 보였기 때문이었다.
내가 자기를 뚫어져라 보고있는 것을 느꼈는 지 파블리나가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아무것도 아니라고 대답했다.
오늘 점심약속 없으면 함께 식사할까요 ? 서로를 좀 더 알겸…
파블리나의 제의에 순순히 동의했다.
오전 근무를 마친 후 파블리나와 사내식당으로 함께 갔다.
행복한 모습의 그녀는 복도를 지나는 거의 모든 남자 직원으로부터 집중적인 시선을 받았다.
그녀는 너무도 아름다운 외모에 모든 사람들을 홀려 버릴 듯한 미소를 가지고 있다.
그녀의 주의를 끌려고 남자들은 과장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복도에서 마주치는 1,2초 정도의 시간에 그녀의 마음에 들려고 갖은 애를 쓰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
안녕하세요, 당신은 너무나 아름답군요 ? 제가 마음에 드시나요 ?
수많은 남자들은 그런 메세지를 담고있는 은밀한 미소를 그녀에게 던지며 그녀를 뒤돌아 보았다.
파블리나는 군중들의 환호에 화답하는 다이애너 황태자비 마낭 우아한 미소로 모든 남자들의 미소에 답해 주었다.
그녀의 미소를 받은 남자들은 어쩔줄 몰라하며 즐거워 했다.
사내식당은 바깡스에서 돌아온 직원들로 자리가 빈틈없을 정도였다.
나는 닭다리 구이와 샐러드를 분배받아 네사람이 앉을 수 있는 테이블 하나를 발견해 겨우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몇분 지나지 않아 파블리나가 자기 쟁반을 들고 내가 앉아있는 곳으로 나타났다.
그녀의 쟁반에는 각종 야채들과, 과일들 그리고 후식으로 요거트가 놓어져 있었다.
아휴, 정말 사람이 많네..다음부터는 좀더 일찍 오던지 해야겠어요. 이런, 나를 기다리다가 닭고기가 벌써 다 식어 버렸겠네 ?
그녀는 작은 입술을 동그랗게 모았다가 뾰족 세웠다가 하며 새가 지저귀는 듯한 말소리로 내 귀를 즐겁게 해 주었다.
같은 여자가 봐도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운 그녀에게 나도 벌써 마음을 빼앗기는 느낌이었다.
게다가, 그녀는 항상 적대감만 보이는 꺄따리나나 레티씨아와는 달리 무척 친절하고 상냥하였으니 그동안 사람의 정이 그리웠던 내게는 아예 그녀에게 기대고 싶을 정도였다.
솔직하기 그지없는 그녀는 매우 명랑하고 쾌활한 성격이라 자기 자신에 대한 이런저런 얘기도 처음 만난 내게 털어 놓았고 회사생활에 대한 여러가지 재미있는 에피쏘드들을 말해주며 내 마음을 편하게 해 주었다.
처음 만난 그녀가 내게는 마치 몇년정도 사귄 친우처럼 느껴졌다.
사람에게 쉽게 정을 주고 사람들을 쉽게 믿어 버리는 편이라 내 앞에 앉아 나를 친절하게 대해주는 파블리나에게 그만 한없이 끌리는 마음을 어쩔 수가 없었다.
그녀에게 기대고 도와 달라고 부탁하고 싶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외국인으로서 이 프랑스 회사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제발 도와 달라고 매달리고 싶다는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파블리나는 내게 서로 말을 놓자고 했다.
나도 흔쾌히 동의했다.
입사한 후 내 생활이 어떤 지 그녀가 물었을 때 나는 그만 그녀에게 그동안 내가 느꼈던 모든 설움을 봇물처럼 쏟아놓고 말았다.
특히 꺄따리나와 레티씨아의 적대감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으며, 한달이 다 돼가는 지금도 내게 업무내용과 관계없는 이동통신업계 산업자료 같은 것만 잔뜩 읽게 하고, 둘이서만 몰려 다니며 나를 따돌리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이고, 내가 무슨 질문을 할 때면 못들은 척 하고 있다가 마지못해 고개를 들고 내가 도무지 알아 들을 수 없는 속도로 재빨리 말해 버리고는 못 알아들은 내가 재차 질문 할 때면 사납게 내게 호통치며 좀 집중해서 잘 들으라는 등의 말을 함부로 내뱉는 두 여자 동료가 거의 무례하게 느껴질 정도라는 등…..
파블리나는 식사하는 것도 잊고 정신없이 그동안의 고충을 늘어놓는 나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진지한 관심을 가지고 듣고 있다가, 네프킨으로 입가를 닦은 후 내게 다음의 말을 해 주었다.
사실, 꺄따리나와 레티씨아는 서로를 무척 적대시 하는 사이야. 그렇게 서로를 경계하면서도 자기네 이익에 맞는다 하면 둘이 딱 붙어 공동의 적을 인정사정 없이 공격하지.
은아씨가 입사하기 몇달 전까지만 해도 내가 그 여자들의 밥이었지. 얼마나 괴로운 생활을 보냈는 지 은아씨는 상상도 하지 못할꺼야.
나도 불가리아에서 프랑스로 온 지 아직 3년밖에 안돼 모르는 것이 많기 때문에 그녀들의 도움이 꼭 필요한 상태였지.
도움은 커녕……….
파블리나가 한숨을 쉬며 계속 말을 했다.
같은 외국인들로서 서로 의지하며 지지않고 잘해 나가자고.
그녀의 말에 눈물이 나올 것 같아 눈을 괜시리 깜빡대며 그녀에게,
어떤 식으로 꺄따리나와 레티씨아와의 관계개선을 해 나갔는 지 궁금해.
파블리나는 자신의 샐러드 그릇에 드레씽을 쏟아넣고 나이프와 포오크로 샐러드를 골고루 잘 섞으며 나를 보고 씨익 웃었다.
처음엔 나도 어찌할 줄 모르다가 내 고민을 로랭에게 털어놓게 되었어.
아까 로랭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봤는데…. 멋있지 ?
그녀의 단도직입적인 질문과 쏘는듯한 시선을 바로 보지 못하고 괜시리 살이 벌거져 나간 닭 뼈다귀를 포오크로 쿡쿡 찍으며 그녀의 시선을 피하려 애썼다.
로랭은 국제부서에서 벌써 3년 넘게 일하고 있어.
꺄따리나와 레티씨아를 아주 잘 알지.
로랭이 내게 그애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 지, 일일이 코치해 주었어.
그가 날 많이 도와준다는 것을 안 여자애들이 날 괴롭히는 것을 그만두게 되었고..
어쨌든 처음이 문제지, 일을 알기 시작하고 남들의 도움이 필요없게 되면 아무도 어쩔 수 없는 것 아니겠어 ?
로랭이 그 시험기간을 지혜롭게 잘 넘길 수 있도록 정말 많이 도와주었어.
그후로….로랭과 나는 ….
그녀의 마지막 말을 더 잘 듣기위해 먹기좋게 썬 닭고기를 입으로 가져 가려다 말고 그녀의 얼굴을 바라 보았다.
로랭과 같이 있는 시간이 많아지다 보니 서로를 알게되는 시간이 많아지고,
그래서,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게 되어 연인사이로 발전하게 된거야.
사내에서는 아무도 모르니까 은아씨 혼자만 알고 있어줘.
내가 왜 이러지 ? 은아씨를 처음 만났는데 이런 얘기까지 주절주절 털어놓게 되고.
은아씨는 사람을 참 편하게 해 주는 데가 있는 것 같애.
로랭과 연인사이 ?
나는 로랭과 연인사이라고 내게 고백하는 파블리나가 어떻게 니꼴라와도 그렇게 뜨거운 관계를 가지고 있는 지 알고싶었다.
파블리나가 당황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이 사실만은 꼭 집고 지나가야 한다는 생각을 나도 어쩔수가 없었다.
그럼 니꼴라는 ?
파블리나가 깜짝 놀라며, 니꼴라 ? 라며 되레 내게 묻는다.
이런 말을 해도 좋은 지 모르겠지만, 아까 니꼴라와 피블리나가 함께 있는 것을 봤어.
미안해, 보려고 했던 것이 아니고..걱정하지마,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테니까.
파블리나가 무슨 얘기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봐 오히려 내가 더 당황해 버리고 말았다.
그녀가 자세히 얘기해 달라고 조르는 바람에 나는 할수없이 아까 화장실에서 목격한 일을 그대로 전달해 주었다.
내 얘기를 다 듣고 난 파블리나는 목젖이 다 보이도록 호탕하게 웃더니,
은아, 내가 아무리 정열적인 여자라 해도 그렇게 여자 화장실에서 급하게 해야할 정도로 색정은 아니라고.
니꼴라한테 미친 사내 여자들이 그에게 달라 붙는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그정도 인지는 몰랐네 ?
그녀가 너무나 크게 웃는 바람에 옆자리의 사람들이 흘끗흘끗 우리를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은아, 나는 사랑에 빠져있는 여자라고. 나한테는 로랭밖에 없어.
그리고 우리는 회사 화장실에서 사랑을 나누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고.
파블리나, 내가 전한 얘기는 그냥 못들은 것으로 해줘. 나는 그저, ….니꼴라와 함께 있던 그 여자의 뒷 모습이 너무나 파블리나와 닯았다고 착각한 바람에.
오해해서 정말 미안해.
내가 미안해서 어쩔줄을 몰라하자 파블리나는 내게 활짝 웃으며, 걱정마라 고 말하며 나를 안심시켜 주었다.
앞으로 우리 친구처럼 지내. 직장에서 만난 동료들끼리도 우정을 나눌 수 있다고 나는 믿어.
게다가 우리는 같은 외국인 처지쟎아 ?
서로 도우면서 지내.
나는 은아씨가 참 좋은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어.
나는 처음 만난 불가리아 여자, 파블리나에게 커다란 신뢰감을 느끼면서도
그녀가 로랭과 연인사이라는 사실에 복잡한 마음을 느꼈다.
휴게실에 있던 프랑스 사람들이 샹젤리제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자화자찬 할 때 세계 모든 곳에 널려있는 에버뉴들을 다 다녀보았냐고 그들을 차가운 시선으로 둘러보며 되묻던 그의 모습이 떠 올랐다.
한국의 보신탕 문화를 가지고 말 못하고 쭈뼛하던 나를 은근히 건드리던 동료들에게 내대신 대답을 해주며 나를 도와주던 그의 당당한 모습이 떠 올랐다.
그런 자상한 그가 파블리나의 연인이라는 사실을 알고난 후 , 저토록 아름다운 여자를 그가 사랑한다는 것이 어쩌면 당연하다는 인정을 하면서도, ….그러면서도
이상하게도 웬지 쓸쓸한 느낌이 드는 것이었다.
내 앞에 앉아 끊임없이 뭔가 말을 하며 미소짓는 파브리나를 바라 보았다.
샐러드를 한입 가득히 넣고 오물대며 나를 보며 웃는 그녀는 눈 부실 정도로 아름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