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드디어 고용되다.
내가 처음 브라보 텔레콤으로 출근한 날은2002년 8월7일이다.
프랑스인들과 그들의 언어를 쓰며, 같이 일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도 두렵게 여겨져 첫 출근하기 며칠 전부터 잠도 이루지 못할 정도로 걱정이 많던 중이었다.
프랑스회화 책을 슬슬 들쳐보며 이런저런 문장들을 암기하거나, Excel 이나 Word, Powerpoint등의 컴퓨터 사용법이 적혀진 책들을 여기저기 들여다 보며 한숨을 내쉬기도 했다.
그동안 알고있는 기본적인 지식들만 가지고서도 앞으로 근무하는 데에 전혀 불편한 점이 없을지 무척이나 걱정되었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어떻게해서든지 프랑스회사에 취직을 해 이 나라 사람들과 일해보고싶다는 꿈을 이루어보고 싶었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상상할 수도 없는 노력을 했기 때문에 이제와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
앞으로 근무하면서 다른 동료들을 따라가기 어렵다고 느껴지면 세배 네배 더 일하며 쨟은 시간내에 모든 것을 배워버리고야 말겠다는 굳은 다짐을 하고 또 하며 출근하기 하루 전날 밤을 하얗게 지새웠다.
15구에 있는 내 아파트를 8시 20분쯤 떠나30분정도 전철을 타고 9시가 되기 조금전에 블로뉴 비앙쿠르에 있는 브라보 텔레콤 본사에 도착했다.
세련되고 현대적인 건물3층에 있는 국제부 사무실 문 앞에 도착해서는 심호흡을 한번 크게 한 후 환한 얼굴로 사무실 문을 힘차게 밀어 젖혔다.
그때 문 건너편에서 들려온 소리…..으아아아악 !!
내가 문을 너무 활짝 연 바람에 반대편에서 동시에 밖으로 나오려던 사람이 어딘가를 다친게 분명했다.
무척 당황한 나는 우리나라 말로, 어디 다쳤나요 ? 라고 물으며 문 안쪽을 얼른 들여다 보았다.
바닥에 한 커다란 여자가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여보세요, 괜챦아요 ?
웅크린 채 고개를 숙이고 있던 그 여자는 자신의 어깨에 가볍게 올려진 내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그저 멀뚱거리며 그녀를 지켜 볼 수밖에 없었다.
그때 거대한 몸집의 한 여자사원이 안쪽에서 뛰어 나온다.
무슨 일이야, 레티씨아 ?
눈부신 금발머리의 그 여자는, 쭈그리고 앉아있는 여자와 바보처럼 얼굴을 붉힌 채 안절부절 못하는 나를 번갈아 바라 보다가 내게, 봉쥬르 (Bonjour!)라고 가볍게 인사를했다.
그리고나서 바닥에 무릎 한쪽을 꿇고 앉으며 레티씨아라는 여자를 몹시 걱정스럽다는 듯이 들여다보았다.
괜챦아 레티씨아 ?
정말 짜증나게 ! 아침부터 무슨 재수가 이래 !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레티씨아라는 여자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나를 무서운 눈으로 노려 보았다.
일어선 그녀의 커다란 체구에 완전히 압도당한 채 잠시동안 입도 벌리지 못하다가 가까스로 미안하다는 말을 했다.
문을 그렇게 여는 사람이 어디있어요 ? 항상 조심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
게다가 오늘 처음 이 회사에 출근하는 사람이….
정말 미..미안해요..
나는 레티씨아와 캬따리나와의 첫 만남을 그렇게 황당하게 치뤄야 했다.
첫인상을 좋게, 예의바르게 잘 행동해야지 그렇게도 마음먹었건만 첫인상이고뭐고 동료직원의 코를 박살낼뻔했다 !
레티씨아는 하루종일 기분나빠해 하고 있었고 몸집이 거대한 캬따리나라는 여직원은
가끔씩 이걸 읽어라, 저걸 읽어라 하며 이런저런 서류뭉치를 내 책상위에 올려 놓아 주었다. 물론 서류에 관한 설명은 하지 않은채..
저기압으로 씩씩대고 있는 레티씨아보다는 몸은 뚱뚱하나 매력적인 미소를 지어 보이는 캬따리나가 더 편해 질문이 있을 때마다 그녀에게 다가가 물어보곤 했다.
그런 나의 모습을 힐끔힐끔 쳐다보던 레티씨아가 갑자기 내게,
저 알고 있는 지 모르겠지만 , 이 은아씨 교육은 내가 담당하고 있으니 다른 일로 바쁜 캬따리나를 자꾸 귀챦게 하지 말아 주었으면 좋겠어요, 응 ? 캬따리나 ?
레티씨아는 바로 옆자리에서 근무하는 캬따리나를 쳐다 보았다.
아니나다를까, 뭔가 바쁘다는 듯이 이런저런 서류를 뒤적이고 있던 캬따리나가 아주 난처하다는듯한 미소를 내게 지어 보이며,
사실, 부서장이 레티씨아를 지명해 이은아씨의 교육을 맡으라고 하셨어요.
모르고 있었나요 ? 부서장은 분명히 이은아씨에게 알려 주었다고 하던데…. 교육스케줄도 함께…..
교육 책임자 ? 교육 스케쥴 ?
그런 말은 들은 적도 없었다.
내게 전화를 해 온 부서장의 비서라던 사람은 그저 입사하게 된 것을 축하드린다며 8월7일 오전부터 출근해 달라고 했다.
그 말을 전하자, 두 여자가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며 피식 웃었다.
말이 안되네요. 그럼 부서장님께서 우리들에게 거짓을 말했다는 말인가요 ?
은아씨가 잘못 알아들으신 것일 수도 있지 않겠어요 ?
그때 레티씨아는 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캬따리나에게 커피를 마시러 가자고 했고 캬따리나는, 좋지 ! 라고 대답하며 그녀를 따라 나섰다.
물론, 내게 함께 가자는 말은 하지 않았다. 휴게실로 사라지는 두 여자들을 그저 멍하니 바라봤다.
처음 본 두 프랑스 여자의 쌀쌀맞기 그지없는 행동, 메마른 언동, 차가운 시선 등에서 명백한 적의감을 느꼈으며 도대체 내가 잘못한 것이 뭔지, 사무실 문을 너무 활짝 연 것이 그렇게도 큰 잘못이었는 지..
정말 심각하게 고민 해야만 했다.
결국 이런저런 복잡한 전문 용어들이 가득한 서류들을 오전내내 혼자 읽으며, 내 교육 담당자라는 레티씨아를 슬쩍슬쩍 쳐다보며 질문할 기회를 노렸으나 그녀의 일그러진 얼굴표정을 발견할 때마다 그냥 질문을 포기하고 말았다.
이해못할 서류들만 철저한 고독속에서 읽어나가야하는 극한 상황에서 고통을 느끼던 나는 레티씨아와 캬따리나가 자리에서 일어나 점심식사를 하러 간다며 일어서는 것을 보며 그저 기가 찰 뿐이었다.
레티씨아는 바람을 일으키며 휑하니 나가 버리고 그녀가 완전히 나가는 것을 확인 한 후 뒤를 따라 나가려던 캬따리나가 나를 돌아보며 상냥한 미소를 짓는다.
몸은 상당히 뚱뚱하나 거의 완벽한 미인형에 모든 사람들에게 어필하는 아름다운 미소를 가지고 있다.
첫 날인데 점심식사를 같이 할 수가 없어 섭섭하네. 오늘 이미 약속된 점심약속이 있어서……..
바깡스 철이라 사무실이 비워있지만 옆 사무실에 가면 부서원들이 몇명 있을꺼에요.
그때 그녀의 핸드폰에 전화 한통이 걸려왔다.
응응….금방 내려갈께…
전화통화를 마친 캬따리나가 다시 나를 돌아보며,
다른 부서원들을 소개 시켜줄까 요?
너무도 감사하는 뭉클한 마음에 고개를 끊임없이 위 아래로 흔들며 그녀에게 미소지어 보였다.
옆 사무실에는 서너명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잡담을 나누고 있다가 캬따리나와 함께 나타난 나를 모두가 호기심어린 눈으로 쳐다 보았다.
Bonjour ! 이 은아라고 해요. 오늘부터 출근 시작했어요.
여러분 중에 회사식당에서 점심식사하는 분이 있으면 이 은아씨와 함께 가 주면 좋겠는데, 레티씨아와 나는 오늘 다른 약속이 있어서.
캬따리나가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다른 사람들을 둘러본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사내식당에 간다는 사람들이 단 한사람도 없었다.
캬따리나가 미안하다는 듯이 나를 내려다 보았다.
나는 그녀를 올려다보며 걱정말라, 도와주려고 해서 고맙다 라고 명랑하게 말해 주었다.
캬따리나는 다시 나를 내려다보며, 자 그럼 이따보지요. 하고 상냥하게 말한 후 자리를 떴다.
난데없이 내일부터는 좀 높은 구두를 신고 와야지 안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사람들을 자꾸 올려다 봐야 하는 일이 신경쓰여서였다.
불쌍한 거지를 발견할 때나 짓는 표정을 내게 해 보이며 점심을 하러 떠나간 캬따리나나 신경질이 보통이 아닌 것 같은 레티씨아나 캬따리나가 나가자마자 네게 더이상 관심없다는 듯 하던 얘기를 계속하고 있는 이름모를 동료들 모두가 그저 쌀쌀맞고 매정하게만 느껴졌다.
그날 그냥 점심을 거르고 말았다.
같이 먹을 사람도 없었거니와 어디로 가야 점심식사를 해야 하는지도 몰랐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