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민의 차는 천천히 아파트 주차장을 빠져나가고 있다.
봄비인데도 굵은 장대비가 쏟아지고있다.
지난 힘들었던 시간들이 차창에 부딪쳐 흩어지는 빗방울과 함께 사라져버리는것 같았다.
경민은 건축과 4학년때 대기업 건설회사에 입사해서 순조로운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언제나 자신감 넘치고, 밝은 성격인 경민은 회사에서는 분위기 메이커로 통했고,운동을 좋아하고,자동차 매니아인 그는 레이싱 자격증을 포함해서 정비 자격증도 갖고있었다. 시간이 날때면 언제나 자동차에 관한 공부를 했고, 레이싱연습을 할만큼 자동차에 빠져있었다.
그런 그에게는 3년째 사귀고있는 여자친구인 현주가 있었다.
현주는 불어를 전공하는 학생으로, 경민은 한살 아래인 그녀가 졸업하면 곧 결혼하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자상하고, 상대방을 먼저 배려해주는 경민인데 반해 현주는 소위 말하는 공주병 환자였다. 그것도 중증에 가까운....
그런 그들을, 친구들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은 경민이 아깝다고 말들을 했지만 경민은 전혀 개의치않았다.
그는 현주를 사랑했고, 주말이면 그녀와 여행을 다니며 그녀와의 결혼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여름휴가를 한달정도 앞둔 어느날이었다.
경민은 현주와의 여행을 생각하며 들떠있었다.둘이 여행을 자주 다니긴했지만, 사회인이 되어서 맞는 첫휴가라는 생각에 괜히 설레여하며, 한통의 전화를 받았다.
현주였다.
그녀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작으면서도 통통 튀는듯 했지만, 이번엔 어딘지모르게 분위기가 다르다고 생각했다.
그날, 퇴근후 경민은 친구 우석과 소주를 마셨다. 아무리 술을 마셔도 취하지 않았다. 계속해서 소주를 마셔댔지만 그럴수록 가슴만 답답해졌다.우석도 그런 경민을 말리지않았다.
현주는 낮에 전화로 헤어지자는 말을했다. 다른 사람이 생겼다고. 학교를 졸업하면 봄에 결혼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머리속이 텅 빈것처럼 아무생각도 할 수 없었다. 뭐라고 말을 해야할것 같았지만 결국 아무말도 못하고 휴대폰을 내려놓아야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는데, 결혼하겠다는데 그런 여자에게 대체 무슨 말을 할수있을까....
'현주 걔가 지 복을 찬거지! 임마, 차라리 잘된거야.
그래, 뭐랬냐? 걔는 아니라고 그랬지?
니가 저한테 어떻게 했는데, 그런식으로 사람 뒷통수를 치냐! 나쁜년!'
우석이 오히려 더 화를내며 말했다.
그날 이후 경민은 한동안 술에 의지하며 하루 하루를 버티어갔다.
그의 첫 휴가는 혼자 낚시를 하며, 현주를 마음에서 지우는 것으로 보내야 했다.
아침 저녁으로 선선해지는가 싶더니 어느새 가을이 깊어가고 있었다.
진초록의 나뭇잎들도 색깔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경민도 다시 예전의 밝은 모습이되어 편안한 일상을 살아가고 있었다.
가끔씩 현주가 생각나지 않는것은 아니지만, 이미 떠난 사랑을 못잊어 미련을 갖는 성격도 아니었다.
첫서리가 내린 다음날 다시 경민의 발목을 잡는 일이 생겼다.
현주와의 헤어짐보다도 더욱 견디기 힘든.
아버지의 폐암 선고가 그것이었다.
불행은 왜 이렇듯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건지...
부모님은 언제나 그곳에 같은 모습으로 계실꺼라 생각했는데, 누구나 그렇듯이 경민도 역시.
그런데, 갑자기 폐암이라니!
그때부터 경민은 아버지를 모시고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정확한 암의 종류, 수술 가능성, 완치여부, 생존 가능기간 등등.
모든것을 확실히 알 수 있을때까지 병원을 드나들었다.
그러는사이 겨울도 지나고 봄이 되었다.
다행히도 아버지는 쉽게 전이 되지 않으며,완치율도 높은편인 종양이었다.
좀 이르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전부터 생각한 일이므로 경민은 회사에 사표를 냈다. 당연히 부모님은 반대를 하셨지만, 아버지는 앞으로도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며 꾸준히 치료를 해야했고, 그 기간이 얼마나될지는 아무도 알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니 회사에 다니면서 시간을 낸다는건 좀 무리였다. 그런건 경민의 성격에 맞지도 않는 일이었다.
차라리 안한다면 모를까 할꺼면 제대로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더구나 경민은 처음부터 회사를 계속 다닐 생각도 없었다.
자동차를 너무 좋아했기 때문에, 자동차 튜닝과 정비를 하는 샵을 운영하며 레이싱에도 참가하고 싶었다.자동차에 관한한 이미 자타가 공인하는 실력도 갖추고 있었으므로.
할일이 많을수록 에너지가 넘치는 경민은 바쁘게 움직였다.
아버지를 모시고 정기적으로 병원에 다녔고, 튜닝샵도 오픈을 했다.
여름의 문턱에 들어설 즈음엔 샵도 자리를 잡아서, 직원을 셋이나 둘 정도가 되었다.
모든것이 순조로왔다.
문제가 있다면, 독한 약물 치료와 스트레스로 아버지가 가끔 어머니와 여동생에게 신경질적이고 우울증 증세를 보이는 것이었지만 심각한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게 시간은 흐르고 다시 해를 넘기며, 경민과 가족들은 안정을 찾았다.
정말이지 지난 2년간은 되풀이하고 싶지않은 힘든 시간들이었다.
긴 터널의 끝에 빛이 보이듯 힘든 일들을 모두 뒤로하고,경민은 편안한 마음으로 오랜만에 스포츠센타로 향하고 있다.
창밖엔 아직도 굵은 빗줄기가 쏟아지고있다.
안내데스크에 있던 헬스코치가 놀라며 경민을 반긴다.
"경민이형, 이게 얼마만야! 그동안 왜 운동안했어?"
"한동안 바빴거든. 반갑다! 사장님은?"
"골프 회원들이랑 필드에 나가셨어. 가끔 사장님이랑 형 얘기 했었는데, 운동하고 싶어서 몸이 근질 근질 할꺼라구"
그때였다.
코치옆에 있던 여직원이 경민의 뒤를 보고 웃으며 인사를 했다.
"나오셨어요! 어머 근데 그렇게 젖으셨어요?'
경민도 뒤돌아봤다.
"안녕하세요! 주차장에서 걸어오는 동안 금방 젖어버렸네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그녀는 경민의 옆을 지나쳐간다.
어깨 아래까지 내려오는 굵은 웨이브 머리는 촉촉히 젖어있었고,하늘거리는 쉬폰 스커트에도 빗방울이 묻어있었다.
"와- 이쁘다.딱 내 스타일인데!"
"신경꺼 형! 잘못짚었어, 아줌마야"
"아무튼, 이쁜 여자는 남아있질 않는다니까!"
말하면서도 경민은, 그녀의 뒷모습에서 눈을 뗄수가 없었다.
그때, 뒤에서 또 한여자가 뛰어들어오며 큰소리로 인사를 하더니 락커룸으로 막 들어서려는 그녀를 불렀다.
"민서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