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살의 나. 고등학교1학년.
그다지 똑똑하다거나 많은걸 안다거나 이쁘다거나 하지도 않았던
특별할것 없는 잡념만 많았던 사춘기 소녀일 뿐이였다.
수업이 끝나면 지금은 갤러리아 백화점으로 이름이 바뀌었던
한양쇼핑센타지하 음식코너에 들러 친구들과 짜장면을 사먹는다거나
아니면 먼지날리는 버스정류장앞 포장마차에서 떡뽁기를 사먹거나.
처음으로 생긴 맥도날드에 들려 땀나도록 메뉴판을 올려본다음
어설프게도 치즈버거를 시키던 그당시 그나이 또래들과 비슷한 모습으로 살고 있는듯
보이기도 했다. 물론 남들에게 보이는 모습으로 말이다.
인기가 많은 편이여서 주위에 늘 대여섯명의 친구들과 함께였었고
반아이들모두 내가 속한 그 그룹을 선망하거나 어울리고 싶어했다.
늘 명랑하고 상냥하고 유쾌하고 유머러스하기까지 하던 나를 선생님들도
이뻐해주었다. 그래도 뭐 그런걸 시기한다던가 시비를 건다던가
딴지거는 친구들도 없었다.
내가 친구사이에서 인기가 많은 아이로 산다는것은 왠지 당연한
일인것처럼 반 아이들도 받아들였다.
공부도 늘 10위권안에 들어 잘하는 편인 아이에 속해있었다.
아마 행복한 모습으로 걱정없이 살아가는 17살 여자아이처럼 보였을것이다.
버스정류장과 학교운동장의 조회시간이나 체육시간은
사춘기를 넘어서고 있던 아이들에게는 늘 긴장되고 설레이는 공간이기도 했었다.
소근거리며 자신이 마음에 들어있는 학교내 이성을 상대방은
의식도 못하는데 흘긋거리고 부끄러워하기 까지 했다.
정작 이성친구를 사귀는 사람은 반에서 두세명정도였고 나머지는 말도없이
가슴에 품고만있는 어설픈 짝사랑이였다.하지만 아주 심각하기도 했다.
짝사랑일뿐인데 어떤아이는 하루하루 빼놓지 않고 그 남자애에대한 일기를 쓰기까지 했다.
물론 말한번 걸어본적 없던 사이였는데 말이다.
오늘 그애가 입은 옷, 복도를 지나치다 만났을때 그 느낌,
운동장에서 농구를 하던 그애의 모습...
그친구는 아마 소설가가 되었을것 같다.
누구라도 하나씩은 마음에 사랑을 품고있어야 당연한 나이인듯했다.
그때 했던 사랑들이 아마도 살면서 제일 진실되지 않을까 싶다.
넌 누굴좋아하는냐고 빨리털어놓으라는 친구들의 질문에
화장실 창문을 내다보며 분홍색 풍선껌을 불고있던 나는
손가락을 들어 한사람을 가리켰었다.
[털어나봐 누구야...?]
늘 그렇게 시달렸었다.이젠 더이상 귀찮게 굴지 않겠지.
흰색티에 청바지를 입고 등나무의자에 혼자앉아있던 한 남자애..
[에..정말? 왜? 누구야? ]
담배를 피던 한친구가 물었다.
우리 모두 담배를 폈었다.
나는 풍선껌을 불었다. 너무 많이 펴대서 금연하는 중이였다.
[몰라.. 그냥 맘에들어 분위기가 있잖아.]
별로 잘생기지도 옷발이 난다거나 공부도 잘할것 같지도
키도 크지도 않던 평범하게 생긴남자애였다.
반항적이지도 않고있었다.
나 저사람 알아. 고3이잖아... 재미없게 공부만하는 고3을 왜 좋아해???
망을보던 친구가 달려와 창밖을 내다보며 중얼거리곤 제자리로 돌아갔다.
나는 그때 고등학교1학년이였다.
왜 좋아하냐구..?
뭐 별다로 할말이 없긴했다.
나도 처음보는 사람이였으므로...
[사랑은 그런거야. 오블라디 오블라다.]
나는 최대한 크게 분 핑크풍선껌을 불었다.
딱 소리를 내며 터진 푸선조가리를이 입주위를 덮었다.
[하여간, 괴짜라니깐.]
사실은 나무그늘에 반짝이는 빛을 등지고 앉아있는 그 남자애의 모습이
너무 따스해 보였었다.
평화롭고 아늑하고 고요해보였었다.
그 배경에 속한 그애모습이 너무도 사랑스러워
그 남자애가 그 등나무위에서 날 원한다고 해도
기꺼이 나의 처녀를 줄수도 있을것 같았다.
나는 16살때부터 처녀딱지를 뗄 궁리를 하고있었다.
아마도 이중간첩 생활을 하고있는 듯했다.
간첩도 나처럼 자연스럽게 모두를 속이고 있지는 못했을것 같았다.
사실 누구를 속인다거나 한적도 없었다.나의 이면을 아무도 보려하지 않았다.
이쪽에선 저쪽에살고 있는 나의 모습을
저쪽에선 이쪽에 살고잇는 나의 모습을.
나는 다른두모습으로 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다.
나는 다른아이들처럼 빨간색 폴로티셔츠에 리바이스 청바지를 즐겨입고
나이키 운동화를 신고있긴 했었다.
그때는 교복을 입지 않던때였다.그래서 같은 교실에서 한달쯤을 살고 나면
그애의 가정환경이 드러났다.
한참 멋을 부리고 싶어할 그나이의 여자애들에겐 그 편차가 심했다.
게다가 잘사는 사람들이 몰려있는 동네여서 몇안되는 가난한 집아이들은
무척 묵묵한 모습으로 변함없는 차림으로 지루한 고등학교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내 친구들은 수업이 끝나면 자신들이 살고있는
압구정동의 최고 60평에서 최저 25평의 아파트로
뿔뿔이 들어가 엄마가 만들어주는 간식을 먹고
강아지랑 놀다가 학원을 간다던가.
아니면 여름 세일을 핑계로 다음날 입을 옷을 사러 엄마와 함께 쇼핑을 나가곤 했다.
자신의 외모에 무지 신경쓰는 나이였던 데다가
다음날 다른친구가 어떤 옷을 입고왔는지도
신경쓰이던 나이였으니까...
나의 친구들은 풍요로움에 넘쳐있었다.
물직적으로나 사랑받는것에나.....뭐 당연한듯 익숙해져있는 아이들이였다.
일부러 그런 친구들을 사귄건 아니였다.
그애들이 나를 좋아해 먼저 같이 다니길 원했었다.
나와는 무척 달랐다.
우리집은 아파트촌과는 반대방향인 더 부자들이사는 담높은 주택가였다.
친구들이 높은 담사이로 사라지는 날 그렇게 오해했었다.
한번도 친구를 집에 부르지 않았던 나.
친구들 사이에선 내가 무슨 재벌집 딸인데 그 사실을 다른사람들이 아는걸
싫어한다거나 그래서 절대 친구들을 집에 부르지 않는다.뭐, 그런 소문이 돌고있었다.
물론 난 아무대답도 하지않았다.나에게 직접 그런걸 묻는 친구가 없었으니까.
나는 그중제일 높은 담을 가지고있는 집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정문이 아니라 뒤에난 쪽문이다.
문이 확실히 닫혔는지 확인하고 뒤뜰을 한참을 걸어가 보일러 실 옆의 집으로 들어갔다.
빛이 잘 들지않는 반지하.
곰팡이 냄새가 스며있고 한여름에도 축축하고 서늘했다.
맞아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늘 그렇다.
두개의 방, 작은 화장실, 싱크대달린 작은 거실.
약간 큰방은 엄마방이고 침대가 들어가 있는 방이 내방이였다.
살림도 없긴 했지만 여자둘이 사는 살림이라 무척 깔끔해보였다.
엄마방엔 텔레비젼, 서랍장, 서랍장위에 몇개안되는 화장품
어렸을대부터 보아오던 6자 학그림이 그려진 갈색 장농
내방엔 침대. 책상, 서랍이 6개있는 서랍장, 긴 옷걸이
거실엔 늘 펴져있는 나무 테이블 , 그테이블위엔 빨간색 밥통이 늘얹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때 유행하기 시작하던 정수기.
흰돌 검은돌이 잔뜩들어있는 꼭 커다란 모래시계 모양처럼 생긴 유리병..
그안에 수돗물을 받아놓으면 정수가 된다고 했다.
주인집에서 버리려던걸 엄마가 가져다 놓았는데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며 닦고 아끼던 엄마였다.
부잣집에서 쓰던 물건이니 비싸고 좋은것이라고 했다.
버릴것이 아니였는데 더 좋은 정수기를 사는바람에
우리를 준것이라고 했다.
내가보기엔 빨간 금붕어를 거기엔 키우면 안성맞춤일듯했다.
엄마는 가끔 낮동안 주인집의 집청소를 해주곤 했었다.
청소도 열심히 했지만 이집에서 뭐 필요없는건 없나 에 관심을
많이 가지던 엄마였다.
대학 1학년인 주인집딸이 스타일에 맞지않거나 질려서 안입는옷들을
잔뜩 가져다가 빨고 다려서 나에게 주는 엄마였다.
[엄마. 싫어. 안입어.]
[아니야 ,괞찮아 윤주야. 엄마가 봤는데 그애 이거 한번도 안입었어.
아이고, 이건 엄마가 입어야겠다. 너입기엔 너무 어른스러워~
빨리입어봐. 엄마가 죄다 삶고 빨았어. 새옷같아.]
그래서 난 최고급 상표가 달린 옷을 늘 입고다녔다.
매일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을수 있었고 부잣집 멋쟁이 딸래미가 입던 옷이라
항상 유행을 따라가고 있었다.
계절이 바뀌면 또 새로운 옷들이 여러벌 생기곤 했다.
냉장고 붙여진 엄마가 써놓고 나간 쪽지를 보았다.
'윤주야. 엄마가 너 좋아하는 장조림 해놨어.
까먹지 말고 꺼내먹어. 냉장고에 쵸코케익도 있어.
엄마친구가 낮에 사온건데 엄마랑 친구가 다먹고 반만 남겼다.
엄마는 내일 아침에 올께. 내일은 꼭 도시락 싸줄께.
독서실 꼭 가고. 문잘 잠구고 자.'
엄마는 늘 소녀처럼 나에게 쪽지를 남겼다.
엄마는 소녀같다. 말소리도 웃음도 모양새도...
그 소녀같은 엄마는 밤새도록 장사하는 음식점에서 서빙을 보고
새벽에는 해장국 까지 팔고 온다. 엄마의 퇴근시간은 아침 7시였다.
냉장고를 열었다.
랩으로 정성스럽게도 덮인 쵸코렛 케이크...
아마 주인집딸의 생일이였나보다.
식구마다 케익을사다날라 처지곤란했겠지.
주인집 딸은 대학교1학년이란다. 나는 얼굴한번 못봤었는데
엄마랑은 꽤 친하다.
나를 스무살에 낳았던 엄마는 서른 일곱살이였다.
하지만 서른 초반도 안되어보이기 외모 때문에
나만큼 큰 딸이 있다고하면 모두들 입을 벌리고 놀랐다.
엄마는 무척 예뻤다.
엄마의 사진첩에 담긴 흑백사진엔 엄마가 얼마나 예뻤는지
새삼 알려주곤 한다.
그당시 잘나가던 어느영화배우보다 확실히 더 예뻤다.
엄마에겐 쵸코렛케익을 사오는 친구따윈없었다.
우리가 이렇게 살고나서부터는 절대친구를 만난적이 없으니까.
우리 두모녀는 이 반지하 셋집에 친구를 들인적이 절대없었다.
나는 냉장고 문을 닫았다.
내방에 들어가서 가방을 내려놓고
LP를 꺼내 오디오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침대에 누웠다.
Desmond has a barrow in the market place,
데스먼드는 시장에서 손수레를 끌지.
Molly is the singer in a band
몰리는 밴드에서 노래하는 가수였다네.
Desmond says to Molly-girl I like your face,
데스먼드는 "아가씨는 얼굴이 예쁘네요"라고 몰리에게 말했고,
And Molly says this as she takes him by the hand.
몰리는 그의 손을 잡으며 이렇게 말했지.
Ob-la-di Ob-la-da life goes on bra,
오브라디 오브라다, 인생은 흘러가는 것.
La-la how the life goes on
라라, 인생은 흘러가는 것
Ob-la-di Ob-la-da life goes on bra,
오브라디 오브라다, 인생은 흘러가는 것.
La-la how the life goes on.
라라, 인생은 흘러가는 것
역시 비틀즈다.
내 주위에 아무도 이런음악을 듣는 아이들이 없었다.
아니면 나처럼 숨어서 듣는건가.
아닐것이다.
나의 친구들은 이런음악을 듣지 않아도 충분히 즐겁게 살고있다.
천장에 곰팡이가 더 야릇한 색을 뿜어내고 있었다.
꼭 내가 쫗아하는 보라색 으로 보였다.
긁은 붓과 진한 보라색 먹으로 커다란 연꽃을 그리려다
망친것 처럼 보이기도 했다.
오브라디 오브라다 인생은 흘러가는것.
인생은 그렇게 흘러가는것.
폴매카트니가 그렇게 계속 노래를 불러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