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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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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청 거리는 라스베가스 에서의 결혼.


BY 홍 영 옥 2004-07-05

 

“쨔샤!  다른 사람 같으면 네 시간이면 끝날 수 있는데 여태껏 칠하고

 

있으면 아웃사이드 스프레이는 내일도 해야 되잖아.

 

아직 롤링도 다 못했으니....  미안하지만 네 인건비는 계산해 줄 수가

 

없다.”고 경칠 이가 말했다.

 

새벽 7시에 나를 일터에 내려준 뒤 하루 종일 어디로 사라졌다가

 

오후 늦게 와서 내게 하는 소리였다.

 

 미국에 사는 한국 사람은 맨 처음에 공항에 내렸을 때 어떤 직업을

 

 가진 사람이 마중하러 나왔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하는 일이

 

정해진다고 한다. 나도 경칠이의 페인트 칠하는 일을 오던 다음날부터

 

따라다니기 시작하였다.

 

 일 한지 삼일쯤부터 캘리포니아의 뜨거운 햇볕에 그을린 피부는

 

벌겋게 달아올라 한 꺼풀씩 때처럼 밀리기 시작하였다.

 

마치 누에고치가 허물을 벗고 새로운 세계로 나가 살아가는 것처럼

 

 내 살갗은 세 번씩이나 두 팔뚝과 등, 얼굴의 피부가 공중목욕탕에서

 

퉁퉁 불은 때를 빡빡 밀어내는 것처럼 벗겨져 나갔다.

 

 “진국아, 이곳은 기술 없으면 살수가 없는 나라야.

 

너는 나한테 ‘뺑 끼’ 칠 배우는 것만 해도 고맙게 생각해야 돼.”

 

경칠 녀석은 툭 하면 기술타령 이었다.

 

 나는 후회하기 시작하였다.

 

언제쯤이나 선희 와 함께 예쁜 집에서 함께 밥 먹고 같이 잠자면서

 

지낼 수가 있는 건지 처음 와 보는 깜깜한 밤길을 무턱대고 한발씩

 

 내딛는 기분이었다. 그 후로도 경칠 은 이리저리 핑계를 대며

 

여섯 달 동안이나 일한 것을 단 한 푼 도 주지 않았다.

 

선희 와 함께 모아서 가져온 돈도 다 떨어져 도저히 지낼 수가 없게 되자

 

나는 페인트 가게에서 알게 된 김씨라는 사람과 함께 룸메이트를

 

하기로 하고 경칠 의 집 을 나왔다.


“진국씨도 이런 카드 받으려고 저와 결혼한거에요. 영주권 이라고도

 

 하고 그린카드라고 부르기도 해요.”

 

한국의 주민등록증 크기의 플라스틱에는 옆얼굴 의 명순 이

 

오른쪽 귀만 보이며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위에는  ‘퍼 머 넨 트 레지던트 카드’라고 씌어 있었다.

 

이 영주권이 없이 불법체류자로 미국 안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부모 잃은 고아신세나 다름없다고 한다.

 

한국의 명문학교 출신들도 취직을 할 수가 없어 청소나 잔디 깎는 일,

 

수영장청소, 또는 나처럼 페인트일 같은 막노동밖에는 할 일이 없다.

 

또한 그들의 자녀들은 아무리 똑똑해도 대학에서 받아주질 않아

 

변변한 직업의 길은 항상 멀리만 있었다.

 

그리고 한국과 미국에서 이산가족이 되어 생이별 하고 있는

 

 사람들의 수가 몇 십만 명이라는 통계는 신문지상에서 항상

 

 떠들고 있는 숫자였다.

 

 언제 추방당할지 모르는 불안감에 싸여 친한 사람에게조차도

 

 말 못하는 벙어리로 살아야만 되는 것이 바로 이 조그만 영주권의

 

 위대함인 것이다.

 

 나도 이민 알선업체에다 그동안 일년 치 월급을 둘이 모은 것과

 

 선희 가 언니한테 빌려온 돈을 합쳐 삼만 불 을 주고 ‘조 명순’ 이란

 

 여자와 위장결혼을 하게 된 것이었다.

 

미국에서는 시민권을 가진 사람과의 결혼이 가족초청 이민 순위 중

 

 가장 빠르게 영주권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명순 은 영주권자 였지만 이미 시민권신청 을 해서 시험까지 합격해놓은

 

 상태로 두어 달 뒤에 선서식을 앞두고 있어 이민 브로커 하는

 

그녀의 오빠가 한번 목돈이나 만져보자고 설득하는 바람에

 

나와의 인연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었다.

 

우리 의 위장결혼 으로 내가 영주권을 받게 되면, 6개월쯤 지난 뒤에

 

이혼하고 다시 선희와 결혼하여 가족초청 이민으로 미국에 데리고 오려는

 

 것이 나의작전이었다.

 

또 선희 가 가장 좋아하는 베이컨과 스테이크를 맘껏 먹일 수 있는

 

천사의 도시 엘에이가 너무 행복하게 보였고, 빨리 가서 둘이 같이

 

 살고 싶은 급한 마음이 명순 을 만나게 된 계기가 된 것 이었다.

 

명순이 시민권 증서를 받은 지 한달이 지나면 둘이는 결혼식을 하기로

 

하였다. 우리의 위장 결혼식은 하루 만에 모든 증명을 받을 수 있는

 

라스베가스에 가서 하기로 하였다.

 

 “그곳에서 결혼식 끝나면 하루 자고 오는 거지?”

 

 경칠 이가 부러워서 못 견디겠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거기서 마지막 비행기로 밤 열시에 오려고 하는데....”

 

나는 어설프게 응답하였다.

 

그는 너무 어이없어 한심하다는 뜻의 눈으로 한참을 쳐다보더니

 

충고해 주듯이 이런 말 을 하는 것 이었다.

 

“진국아! 미국은 여자 만나기가 쉽지 않은 나라야.

 

그래서 왕년엔 여자들한테 인기있던 남자들도 사십 넘도록 장가못가는

 

 노총각들이 너무 많고 또 홀 애비들도 엄청 넘치는 곳이야.

 

기회는 항상 있는 게 아니라구.. 공짜나 마찬가진데 잘해봐라.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글쎄....” 

 

사실 가짜결혼임이 탄로 날 경우 둘 다 무거운 죄인으로 분류되어

 

다시 한국으로 추방당하는 것은 물론이고 우리가 평생 만져보지도

 

못할 금액의 벌금과 함께 다시는 미국에 들어 올수가 없는 것이라 하니

 

은근히 겁도 나고, 다시는 선희 를 만나지도 못하고 먼 이국에서

 

철창에라도 가게 되면 어쩌나 하는 마음의 갈등으로 며칠을방황하기도

 

 하였다.

 

 그런 사연의 조 명순 이 와 내가 결혼하기로 되어 있는 날은

 

시월의 마지막 토요일 이었다.

 

 아침 일찍 그녀의 집에 도착하여 빼놓은 서류가 없는지 확인한 후

 

 함께 출발하였다.

 

이따금씩 옆에 있는 이 여자가 선희 라면 얼마나 좋을까?

 

참 오늘 같은 날은 결혼식 하기에 알맞은 날씨로군 하고 생각했다.

 

 인디안 썸머 의 따가운 가을 햇볕은 이마에 송글송글 땀을 맺히게 하였다. 

 

 스물 세 살의 명순 은 복숭아 빛 뺨과 도톰한 입술에 칠한 엷은

 

살색 립스틱이 정말 신부같이 우아해 보였다.

 

긴 생머리는 한 갈래로 묶어 밝은 적갈색의 헝겊을 리본으로 만들어

 

감아올리고 손톱엔 진홍빛 메니 큐어 를 바르고 있었다.

 

 끈 없는 높은 분홍 슬리퍼를 신고 하얀 줄무늬가 있는 바다색깔의 원피스

 

를 입고 네바다 주에 있는 휘황찬란한 라스베가스로 박하사탕 같은

 

냄새를 풍기면서 우리는 같이 떠났다.

 

그곳의  알선책인 ‘에 릭’ 이라는 한국남자가 데리고 간 우중충한 건물의

 

 웨딩채플에서 선희 가 아닌 명순 과의 결혼식은 미국인 목사의 싸인 으로

 

 10분 만에 끝 이 났다.

 

평소 입던 옷 그대로의 결혼사진도 몇 장 찍어 두었다.

 

나중에 이민국 인터뷰 할 때 제출용 이라고 하였다.

 

“이곳 네바다 주는 카지노 수입 다음으로 웨딩 채플과 결혼라이선스

 

발행 수수료로 유지된답니다.” 하고 그가 설명해주었다.

 

결혼식 후 같이 간곳은 시청이었는데 세계 곳곳에서 각종 증명을

 

신청하러 온 사람들이 요즈음 들어 너무 많아져 오늘 접수시키면

 

일주일 쯤 뒤에야 서류가 나온다고 하였다.

 

나도 아까의 그 미국인 목사가 싸인 하고‘ 에 릭’ 이 우리 결혼식의

 

증인이 되어주었던 “결혼증명서” 와 함께  “결혼라이센스” 를 신청하였다.

 

라스베가스에서의 결혼서류를 도와주는 맡은 일이 끝난 ‘에 릭’이란

 

사람이 가 버리고 나자 비행기시간이 다섯 시간 정도 남아 있었다.

 

“그래도 결혼 한 날인데 근사한 저녁이라도 해야 되겠지요?”

 

 내가 어색한 분위기를 염려해 던진 말이었다.

 

 “ 그냥 우리도 슬롯머신 한번 하고 가요.”그녀가 대답하였다.

 

그녀는 휘청거리는 그곳의 분위기를 즐기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사방에서 ‘딩-딩 딩딩’하고 동전 떨어지는 소리, 옆 자리에 있던

 

백인할아버지의 잭팟 터지는 환호성 ,핫 미니스커트 아가씨의 음료 써비스,

 

 화려한 오색네온 조명들...라스베가스의 밤은 우리도 일순간에 큰돈을

 

 가질 수 있다는 황홀한 유혹의 흥분으로 저녁도 굶은 채 도박세계로

 

빠져 들어갔다.

 

그러나 알맹이 없는 껍데기뿐인 결혼식을 치른 뒤 불과 서너 시간 만에

 

 나는 한 달 동안 페인트 일해서 번 일당을 몽땅 기계에 쳐 박아놓고

 

 씁쓸히 공항으로 되돌아 와야만 했다.

 

그녀 의 지갑에도 99센트짜리 맥도널드햄버거 하나 사먹을 여유조차

 

남아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