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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스런 여자 [18]


BY 플레이 걸....ㅋㅋ 2010-10-12

며칠이 아무런 일이 없이 쉽게 잘 흘러갔다.그날 토요일 그렇게 만나고 우린 한동안 둘만의 시간을 가지지 못했다. 토요일 늦게 까지 함께 있었는데 아산 공장에서 갑자기 사고가 생겨 그날 저녁늦게 날 데려다 주고 아산공장으로 날아갔다. 월요일 부터 지금 수요일 까지 출장중이였다.간간히 문자만 주고 통화는 힘들었다. 권실장도 함께 동행이라 한동안 사무실엔 나와 수진이 뿐이였다.

 

권실장에게 한소리 들은후 부터 수진인 퇴근시간이 되면 서두르던 모습이 없어졌다. 오히려 내가 먼저 사무실을 나섰다. 내가 괜히 의식하지 말고 평소대로 하라고 했지만 수진인 더이상의 약점을 잡힐순 없다며 굳은 얼굴로 비워 있는 권실장의 책상을 한번 째렸다. 달라진 수진의 모습에 좀 얼떨떨 했지만 바람직한 것은 사실이여서 몇번 인사치레 정도의 말만 해주고 요즘은 그만 두었다.

 

서류상의 오타도 줄고.서류도 보기좋게 가지런히 부서별로 정리 해서 올렸고. 오늘일을 내일로 미루지 않는 점은 많이 좋았다. 성실하게 변해버린 수진이였다. 이렇게 잘 하면서 왜 그동안은 그러지 않았는지 좀 의문이 들정도로 일을 확실하게 딱 부러지게 잘하는 민수진 이였다.

 

"오늘 저녁 시간이 비지?"

 

내선 전화로 유미가 걸어온 전화 였다.

 

"응....왜...?"

 

내가 현석과 사귀고 있다는 말 후로 내게 전화가 뜸해진 유미였다. 그러지 말라고 했는데도 괜히 자기가 걸림돌이 되서 두사람 가까워 지는 시간을 뺏앗고 싶진 않다며 필요없는 의리 운운하는 유미였다.

 

"저녁이나 같이 먹자 ...할얘기도 좀 있고...."

 

"그래.....어디서 볼까?"

 

"천둥친구 번개에서 볼까? 난 정각에 나갈건데 넌....?"

 

"아직 아무런 연락이 없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정각은 힘들것 같으니까 먼저가서 주문해놔.많이 늦지는 않을거 같아."

 

"알았어.묵은지 시켜놓을까?"

 

".....그러던지..."

 

"알았어.그럼 1시간후에 보자..."

 

할얘기란게 뭐지? 그냥 아무일 없이 만나자고 하기가 뭐해서 핑계거릴 만드는 성격은 아닌데.궁굼했다.

수진이와의 일이후 권실장은 매번 퇴근시간 몇분을 남겨두고 연락을 해왔다. 내일 일정에 대해 얘길 해주고 퇴근시간 되면 가도 좋다는 말을 매일 해주고 있었다. 전화는 항상 내가 받았다. 수진이 의도적으로 권실장의 전화를 피한다는 느낌이 들어 내가 받았다.둘의 냉랭한 분위기에 괜히 나까지 신경이 바짝 서 있는 요즘이였다.

 

본격적인 가을이 시작 되었다.어제 까지만 해도 푸른빛을 띄고 있던 거리의 가로수가 점점 울긋불긋 물들어 가고 있었다. 봄이 왔다는 신호인 벗꽃을 제대로 만끽하지도 못하고 놓쳐 버리는 것처럼 가을도 그렇게 말없이 찾아 왔다가 빠르게 지나가 버리는것 같았다. 요번 가을엔 작년에 가지 못했던 산행을 한번 해봐야지 하는 다짐이 생각났다. 해마다 지켜지지 않고 있는 약속 이번엔 꼭 지키고 싶었다.

 

천둥과 번개는 한옥 집을 개조해서 만든 전통 한식요리 전문점 이였다.버스을 타기 전에 전화를 주어서 인지 들어가서 자리에 앉자 바로 음식이 나왔다. 굵게 먹음직스럽게 썰어져 있는 돼지 고기와 푹 익혔다는 모양을 보여주는 묵은지의 환상적인 조합에 말이 오고가지 않은체 먹는데에만 열중했더니 순식간에 밥 한공기가 금방 동이 났다.

 

매번 밥을 시키면 한공기 모두를 비우는 일이 별로 없는 우리인데 여기만 오면 이상하게 밥이 모자라는 느낌이 드는건 왜 인지.그만큼 음식이 모두 정갈하고 깔끔하게 맛있게 나와서이다. 구수한 숭늉까지 마시고 나니 정말 가득찬 포만감에 회사에서 받았던 스트레스가 말끔히 씻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좁은 통 골목에 있어서 사람들이 잘 모르고 지나치는 곳에 있지만 한번 와 본 사람들의 입소문으로 예약없이 오면 늘 몇시간씩 기다려야 하는 곳이였다. 3년전 첫 개업때 부터 단골이 된 우린 아저씨의 특별한 배려로 예약이 없어도 늘 자리가 있어 편하게 이용하고 있었다.

 

맑게 우려낸 녹차를 한모금 마시며 텁텁한 입안을 개운하게 하는데 유미가 물었다.

 

" 계속 출장이라 토요일 이후로 만나지 못해서 보고싶지.......?"

 

"무슨.아직 그정도는 아냐.통화는 매일 하고 있어."

 

"내일쯤 일이 해결될 거라고 하던데.사고가 좀 크게 났었나봐?"

 

"응.그런가봐.건설업자가 불량품을 쓴것도 이번에 알게 되었고.....안전수칙 제대로 지키지 않아서 생긴 사고라 관리자를 바꾸고 하니까 일이 쉽지가 않았나봐......"

 

"준공일을 갑자기 너무 빨리 당겨서 그런거 아냐?"

 

"계속되는 장마 탓에 공사가 지연되었잖아.......하청업자도 계속 바뀌었고 좀 힘들었지....운이 안따라 주는 것 같아..."

 

"위에선 일부러 아산청에서 계속 비협조적으로 나와서 그런거라고 하던데....낭설이야?"

 

"그렇진 않은가봐.우리 회사에서 파견되어서 내려가는게 맞는데 고용촉진 역활을 한다는 구실로 아산지역에서 새로운 직원을 모두 뽑으라는 말이 먹혀들 소리인지.너무 억지 스러운 소리잖아?비협조 적으로 나오면 자기네가 더 손핸데 그걸 생각못하는 사람들이 어리석은 거지뭐.야! 기껏 만나서 회사 얘기나 하는거야? 다른 얘기해.너 할얘기 있다고 했잖아...."

 

서로 다아는 회사얘기는 그만하고 싶었다. 나만큼이나 회사내의 모든 서류는 꼼꼼히 읽어보는 사람이 뭐가 더 궁굼하다고 재미없고 딱딱한 회사 얘길 해대는 건지.할 얘기 하라는 내 말에 괜히 테이블 모서리만 힐끗 거리는 유미였다.

 

"무슨 심각한 일 있어? 얼굴이 왜그래......?"

 

"......그건 아니고......"

 

"그럼.....혹시 혜리 때문에 그래....?"

 

요즘 혜리와 유미가 윤동진을 사이에 두고 삼각관계라는 얘기가 종종 들려 오고 있었다. 임원들이 있는 우리층 여직원들 사이에서만 돌고 있어 회사내에는 아니지만 우리층의 비서과 에서는 모두가 아는 얘기였다. 비서실 소속이 아닌 마켓팅 부의 혜리라서 우리층에선 고작 일반직 여직원이 우리 비서과에 정면 도전 한거라면서 유미을 두둔하고 있었다. 알수 없는 권위의식을 가지고 있는 게 우리 비서들 이였다. 나도 같은 식으로 매도 당하는게 입맛을 쓰게 했지만 할 수 없는 일이지 뭐 하는 생각으로 그냥 묻혀가고 있었다.

 

"윤동진.그 인간말야.정말 ...."

 

"혜리가 아니고 윤동진씨.......?"

 

"응....."

"아직도 그 말도 안되는 여자들 떼어 달라는 부탁을 하고 있는거야? 너 딱부러지게 거절했다며......?"

 

"그랬지.근데 그 사람좀 이상해.이해 할수 없는 구석이 종종 보여..."

"이해할 수 없는 구석.....?"

 

"응......."

 

"어떤점이...?"

 

굉장히 궁굼했다.

 

"평소 날 보면 그냥 훝듯이 지나치더니 그날 이후로 괜히 우리 부서에 전무님 뵈러 온거라면서 하루에 한번씩 방문하는 것도 이상하고 날 보면 괜히 어색하게 눈돌리는 것도 그렇고 암튼....좀 이상해.."

 

쉽게 이해가 안되었다. 윤동진이 하루에 한번씩 전무님 에게 방문을 할 일이 있는것도 그렇고 .이틀에 한번 꼴로 있는 간부회의때 어차피 만나는 사람들인데 굳이 방으로 찾아 다니며 만나지 않아도 되는데, 볼일이 있어도 비서들 통해서 일처릴 하면 될텐데 그편이 더 일을 효율적으로 하는게 될터인데 왜 기획실장이 직접 찾아온다는 건가? 것도 같은 층도 아니면서?정말 유미 말대로 이해가 안갔다.

 

 "요즘 날 둘러싸고 도는 소문 알지......?"

 

".....응.....휴게실이나 여직원들 모여 있으면 늘 한번씩 나오는 얘기잖아...."

 

"어떻게 된게 난 아무말도 안하고 있는데 소문이 점점 더 부풀려져서 커지고 있어.우리부서 경진인 내가 입단속을 시키는데 어떻게 소문이 그렇게 점점 불려져서 도는지 정말 돌지경이야......"

 

"너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생전 안하던 액땜을 나이들어서 한다.맘 고생 좀 되겠다."

 

며칠 전 보다 얼굴이 많이 까칠해진 유미였다. 풀죽어 있는 모습을 보니 맘이 좋지 않았다.물을 한모듬 마시고 내려 놓으며 유미가 착잡한 어조로 말했다.

 

"남자 생각나면 다른 엉뚱한 생각말고 자기에게 바로 전화 하라는데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게 무슨소리야? 전에 했던 얘기 아냐?"

".....아냐.난 장난으로 그렇게 말한거라고 생각했는데.오늘 점심때 잠깐 복도에서 마주쳤는데 욕구을 너무 참으면 감각이 무뎌져서 나중에 결혼하면 고통스러워 진다면서 자기가 바쁘지만 기꺼이 시간 낼테니 감이 오면 전화 하래.한밤중이나 한 새벽이라도 괜찮다고..."

 

정말 웃겼다. 미친거 아냐?무슨 생각으로 유미에게 그런 소릴 한건지.뇌구조 어떻게 생겼는지 열어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아산 공장일 때문에 기획실에서도 지금 한창 바쁠텐데 어떻게 저런 말도 안되는 얘길 여직원에게 한다는 건지 .성희롱 죄로 고소받을 수도 있는 상황인데 생각이 없는 건가.....?

 

"멀쩡하게 생긴 남자가 왜 요즘엔 사이코처럼 생각되어 지는지 모르겠다 정말.정말 저사람이 내가 알고 있는 윤동진이 맞는지 요즘엔 의문이 들 정도라니까?"

 

"좀 그렇다.명석한 두뇌와 서늘하다는 평까지 받는 쿨가이 윤동진이 그런 사이코 기질이 있다는게 좀 이해가 안된다.너 한테 왜 그런거래....?"

 

" 모르지.내가 노처녀 이고 하니까 만만하게 보고 그런 수작을 부리는건지도 모르지..매번 농담을 던져도 딱딱 받아서 대꾸를 해주니까 너무 편하게 보고 있는 건지도 모르고.암튼 한번 진짜로 덤비면 정면으로 받아 줄꺼야.벼루고 있거든...."

 

갑자기 입술을 쫑긋거리며 눈동자를 굴려 야무진 표정을 만들어 내는 유밀 보며 웃음이 나왔다. 서부의 총잡이 같은 표정.정말 윤동진이 된통 한번 걸리게 될까? 이성적이며 논리적인 한유미의 말총에 당해낼 수 있을까? 어쩐지 걱정이 되었다.윤동진에 대해서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는 유밀 보며 현석이 떠올랐다. 둘이 이종사촌 이라는걸 유미에게 얘길 해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직은 비밀로 해달라는 청이 있었기에 입이 간지러운걸 겨우 참았다.

 

목요일 점심 시간 후 였다.밖에서 유미와 다른 직원둘과 함께 점심을 먹고 들어가니 권실장이 와 있었다. 아산공장일이 어느정도 마무리 되었다는 얘길 들었는데 일이 잘 정리 되었나 보다.

 

"언니.사장님이 따뜻한 차 부탁하셨어.들어가봐..차는 내가 준비해 두었어...."

 

"그냥 네가 들어가지 그랬어?언제 오신거야...?"

 

탕비실로 따라 들어온 수진이였다. 간단하게 양치질을 하고 있는데 사장이 차를 부탁했다는 말을 한거였다.

 

" 언니에게 브리핑 받을 것도 있다면서 들어오면 보자고 했어.오신지 몇분 안돼.어서 들어가봐."

 

말린 과일  몇개를 도자기 접시에 담고 맑게 우려낸 민트차를 투명 유리컵에 담았다. 점심을 먹고 들어왔다는 권실장의 말을 수진이 전해 주었다.

 

보고할 서류을 수진이에게 건네받고 사무실 문을 노크했다.

 

"네 들어오세요...."

 

저음의 허스키 보이스.전화소리가 아닌 생생한 목소리였다. 왜이리 가슴이 떨려오는건지.주체할 수 없이 뛰는 심장이 신경이 쓰였다.푸른색에 간간히 금사와 은사가 섞여있는 넥타이가 없는 와이셔츠 차림의 현석이 보였다. 출장중엔 이메일이나 팩스로 중요한 서류을 모두 보냈지만 직접보고 결제를 해야 하는 서류도 만만치 않아 책상 가득 쌓여져 있는 서류를 보자 힘들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피곤해 보이는 얼굴.좀 마른것 같았다. 입맛이 까다로와 입맛에 맞는 음식이 아니면 잘 먹지를 못한다고 했는데 5일이나 되는 출장중에 제대로 된 식사을 못해서 마른것만 같아 마음이 쓰였다.

 

"뭐해 ? 들어왔으면 가까이 오지 않고....?"

 

어정쩡하게 서있던 난 갑자기 들려오는 소리에 깜짝 놀랐다. 이렇게 어색하고 민망스러울 수가,들고 왔던 쟁반을  방문 손님용 테이블위에 내려 놓고 데스크 쪽으로 가서 들고온 서류을 올려 놓았다.결제하던 서류을  덮으며 현석이 날 봤다. 날 보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눈 맞추기가 쉽지 않아 난 들고온 서류을 펼쳐 보였다.

 

 "2시 이후 부터의 스케쥴은 ."

 

"먼저 장신영하고 눈맞추고 입맞추고 난 뒤로 모두 미뤄버려......"

 

".......네......?"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들 브리핑 하지 않고 서류로 봐도 돼.자 이젠 눈을 들어 날 봐"

 

'정말 어쩌라구.그냥 자연스럽게 맞추면 안되는 거야? 왜 저런 민망한 소릴 해 대는 건지,어쩔줄 모르겠잖아.'

 

내가 그러고 망설이는 동안 내 두손을 끌어다가 가슴부근에 올려 놓는 현석이였다. 손이 끌려감과 동시에 떨어져 있던 내 몸도 현석의 벌려진 다리 사이로 들어갔다. 그 놀라운 상황에 눈을 크게 뜨며 경악스러운 표정을 짓는 날 보며 현석이 큭큭 거렸다.서있는 나와 의자에 앉아 있는 현석.날 감싸안고 내 복근 부분에 얼굴을 댔다. 갑자기 커지는 심장 박동 소리가 제발 제자릴 찾아 뛰었으면 하는 바램이 강하게 들었다.

 

밀려있는 서류가 너무 많아 정시 퇴근이 어렵다는 말에 내가 남아 있겠다고 하자 수진이 자기도 남겠다고 했다. 권실장이 그런 수진을 보며 눈을 찌뿌렸다. 왜 인지 모르겠지만 권실장과 수진의 사이에 한랭기온이 아직 퍼져 있었다. 언듯 보면 수진이 그러는게 당연한 일인것 같은데 권실장은 수진이 자기에게 반발심리로 계속 고집을 피운다고 생각하는것 같았다. 둘사이의 팽팽한 자존심 싸움에 불편한건 나였다.

 

"오늘은 내가 있을께.수진씨 전에 불어 배운다고 하지 않았어?오늘 학원 가는날 아냐?"

 

"모두 새벽 시간으로 옮겼어.언니가 계속 야근했는데 이젠 내가 할 차례니까 먼저 들어가."

 

우리가 그러고 있는사이 어느틈에 자기 방으로 들어갔는지 현석이 옷을 챙겨입고 가방을 들고 나왔다.

 

"나 때문 이라면 그러지 않아도 됩니다.잠깐 들러볼 때가 있어 서류 가지고 갑니다.다들 퇴근하세요.그럼..."

 

이게뭐야?닭 쫒던 개 꼴이 된거잖아?아까 까진 퇴근준비 전혀 않고 있더니.우리에게 고갤 까닥여 보이고 나서는 현석을 보며 남아 있던 우리셋은 갑자기 할말을 잊고 살았다. 차현석이 나간뒤 권실장도 우리에게 퇴근하라며 따라 금방 나섰다.

 

"정말 왜저래?적응 하기 힘들어 진짜...."

 

짜증 치수가 꽤 높게 까지 올랐는지 탈의실로 들어와 옷을 갈아 입으며 갑자기 수진이 소릴 버럭 질렀다.

 

"네가 먼저 그만둬.  이렇게 힘들어서 날을 세울거면 그만두라구....."

 

"내가 뭘?"

 

"정말 몰라? 너 권실장에게 한소리 들은 후로 바짝 달아올라 칼 세우고 있는거 정말 몰라?"

 

"기분이 나빴지만 .오기로 그러는거 아냐 .내가 생각해도 그동안 내 행동이 비서로서는 너무 맞지 않아서 나름 반성하고 고쳐가는 중이야......."

 

"....근데 내눈엔 내가 권실장에게 반발하는것 처럼 보여.둘이 함께면 난 숨 쉬기가 무척 힘들어.너보다 직급이 한참 위인 상관이야.기분이 나쁘고 더러워도 참아야 한다구.깨지는 건 너니까...."

 

"알아.하지만......"

 

".........?"

 

"아냐.알았어.괜히 내 기분에 언니까지 끌여 들여 미안해.어차피 싸움이 되지 않는 일인걸 뭐.그만둘께."

 

"그래 그만큼 했음 됐어.그만하자.다치는건 너야...알지...?"

 

"응..."

 

풀죽은 수진을 보며 난 희미하게 웃어 줬다. 상관에게 대들어봤자 깨지고 멍드는 쪽은 늘 아래사람이다.그게 힘들어서 사회생활을 접는 사람이 부지기 수인데 수진이 자기 연배인 권실장이 어려보여 만만하게 봤나 보다. 나도 잘 몰랐는데 권실장은 나와 동갑이였다. 서울에서 대학을 졸업하기도 전에 독일로 유학을 가서 졸업을 한 유능한 재원 이였다. 비서실장을 하기엔 좀 아까운 사람인데 무슨 연유인지 차현석과 함께 발령 받아 왔다.낙하산 인사라고 첨엔 말들이 많았지만 한동안 돌더니 이젠 잠잠하다. 8개 국어를 능통하게 하는게 비서실장을 거머쥐게 된 거라는 이야기만 설득력 있게 들리고 있다.

 

엘리베이터 앞에 서있는데 문자가 왔다는 알람소리가 들렸다. 기다렸던 문자였다. 회사앞의 몇미터 앞에 있는 테이크 아웃에서 기다린다는 메세지 였다. 함께 내려올 수진일 염두해서 보낸 메세지 였다.

 

"정말 학원 새벽반으로 옮겼어?"

 

"응.얼마 안있음 다시 수강해야해.새벽에 하니까 저녁에 시간이 많이 생겨 여유는 있는데 새벽에 일어나서 나오기가 좀 힘들어..."

 

"몇시 타임인데....?"

 

"6시지뭐.50분쯤 끝나면 간단하게 아침 떼우고 회사로 오는거야...덕분에 요즘은 언니보다 내가 빠르잖아..."

 

"난 좋아.네가 내려 놓은 차와 커핀 정말 맛이 끝내주거든...."

 

"...칫.....그럼 미뤄놓았던 영화나 보여주던가...."

 

"...아 맞다.오늘은 약속이 있어서 안되겠구.내일 어때?"

 

"내일.좋아 .내일은 무슨일이 있어도 약속 꼭 지키는 거지..?"

 

"그럼....저녁까지 내가 쏠께.인터넷으로 너 보고 싶은거 예약해봐.난 집에 좀 늦게 들어갈것 같으니까..."

 

"알았어.장르는 아무거라도 괜찮아?"

 

"너무 무서운 공포물만 아니라면 괜찮아..."

 

"끈적거리는 에로물은 ?"

 

"내가 노처녀라는걸 노리고 하는거라면 기꺼이 당해 주지.별로 겁안다..."

 

"ㅋㅋㅋㅋㅋ 알았어 그럼 내일 봐...."

 

다행히 나와 가는 방향이 달라 어색하지 않게 헤어질수가 있었다. 수진인 회사 근처 가까운 거리에 원룸이 있었다. 본가가 춘천에 있어서 나와 마찬가지로 나와서 혼자 살고 있었다. 전에 한두번 가본적이 있는데 성격 만큼이나 깔끔한 모던한 분위기의 원룸이였다.

 

테이크 아웃 커피 전문점 뒤로 차가 보였다. 회사와 두정거장 떨어져 있는 외진 골목길 이여서 인지 사람들 눈을 타기가 쉽지 않아 보였다.그리로 걸어갔다. 짙게 선팅 되어져 있는 창이라 현석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차문을 노크했다. 창문이 열리면서 서류을 무릎에 올려놓고 있는 현석이 날 건너다 봤다. 문을 열어 앞자리에 올랐다.서류을 챙겨 다시 가방에 넣고 시동을 걸었다.

 

"꽤 오래 걸렸네.수진씨 무슨 일 있어...?"

 

".....아뇨....그냥 좀..."

 

"권실장이랑 좀 않좋은 거지?"

 

"....글쎄요.좀  그랬는데 이젠 나아질거예요......"

 

".........?"

 

"....수진이 그만하기로 했거든요.두사람 사이에서 내가  너무 힘든다고 했더니 꼬리를 내리겠데요...."

"그래.생각보다 착하네...."

 

"네 착해요."

 

긍정한다며 끄덕이는 날 보며 현석이 쿡 웃었다.

 

"어디로 갈까?저녁을 먹고 들어 갈까?"

 

"입맛에 맞지 않아 고생많이 한것 같은데.가고 싶은곳으로 가요.."

"그럴까? "

 

알게 모르게 눈을 찡긋거리며 웃음짓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그동안 얼마나 고생 했는지 한눈에 다 보였다. 편식은 안하는것 같은데 은근히 입맛이 까다로운가 보다.얼마전에 그렇게 입맛이 까다로운데 어떻게 일본이나 미국엔 몇년씩 가 있었냐고 물었더니 집에서 요릴 해주시는 분과 함께 가 있었다고 했다. 잠자리 바뀌는건 괜찮은데 입맛은 쉽게 바꾸기가 힘들다고 했다.

 

앞으로 같이 살면 꽤 많이 힘들것 같다는 말에 요리만 빼놓고 나머지만 해달라고 했다. 음식은 따로 해주는 사람이 있다고 했다. 좀 이해가 안갔다. 얼마나 까다로운 입맛이기에 사람까지 두면서 해먹는다는 걸까?은근히 신경이 쓰였다.

 

한강변을 끼고 있는 호텔에서의 야경은 정말 예뻤다. 색색의 불빛이 켜져 있는 밖의 풍경을 배경삼아 느긋하게 먹는 저녁은 기분까지 업이 되게 했다. 풍부한 해산물이 가득한 요리는 시원한 국물이 일품이였다. 해산물 전골이여서 인지 바다 냄새가 나는 듯한 착각마저 일게 했다. 저녁을 물리고 차를 준비했다.

 

간편하게 갈아입고 쇼파위에 앉아 쇼파 등받이에 길게 팔을 뻗고 앉아 있는 모습이 은근히 섹시했다. 식사전에 샤워하고 나와서 인지 얇은 면티에 흰색 면바지를 입고 살짝 젖어 물기가 있는 머리카락.회사에서와 달리 자연스럽게 내려와 있는 머리카락.살짝 이마을 덮고 있어 나이보다 훨씬 어려 보인다 언듯 보면 내가 좋아하는 유일한 일본 배우 오다기리 조와 닮았다.그래서 내가 처음 봤을때 부터 마음에 품었는지도 모른다.

 

시원한 해물을 먹었으니 따듯한 원두가 낫지 않을까 싶어 원두를 내렸다. 연하게 내려온 커피의 색깔은 언제 봐도 예뻤다. 향조차 감미로왔다. 사실 커핀 맛이 없다. 설탕과 프림이 없다면 그저 쓰다는 느낌 뿐인데 커피라는 이름과 향과 색깔 삼박자가 모두 세련됨을 보여주어서 끌리는 건지도 모른다. 커피 애호가들이 들으면 뭐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내가 느끼는 커피는 그랬다.

 

예쁜 도자기 컵에 담았다.사실은 투명한 컵에 담아내고 싶었지만 커핀 웬지 도자기 컵에 담아야 어울릴것 같아 투명함의 유혹을 물리치고 도자기 컵에 담았다. 실내에 흐르는 음악은 케니지 였다.

 

"어땠어?나 없는 동안 보고 싶지 않았어....?"

 

차을 내려 놓고 앞에와 앉는 날 보며 현석이 물었다. 뭐라고 대답해줘야 좋아할까?괜히 웃음이 나왔다.

 

"이리와서 앉지 그래? 연인들은 옆에 앉는 거라며....?전에 그랬잖아...?"

 

"......아직은.....좀 ....어색한 사이잖아요..."

 

"정말?키스까지 했는데....?"

 

놀리듯 묻는 말에 얼굴이 붉어 졌으리라.10대 청소년 남자 아이처럼 순진한 얼굴을 하고 있는데 왜 이리 가슴이 뜨거워지며 떨려오는건지.정말 내가 노처녀들이 겪고 있는 욕구불만 이라는 고질병에 걸려버린건지.자꾸 음탕한 맘만 생겨나고 있었다.

 

내가 그렇게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현석이 내 옆자리로 왔다. 가지런히 무릅에 올려져 있는 내 두손을 잡아 손안에 가두었다

 

"손이 진짜 가늘고 길어.아무것도 바르지 않은 분홍빛의 손톱도 예쁘고.가끔 브리핑 하러 들어와서 서류철 넘길때 마다  훔쳐 보면서 얼마나 날  다독거렸는지 몰라."

 

"...........?"

 

"예전에 10대에 봤던 일본 야동에서 여직원 시리즈에 나오는 변태남자 직원의 행동이 떠올라 얼마나 당혹스럽고 힘들었는지 몰라...."

 

정말.안그래도 뜨거워진 난데 살살 타오르고 있는 장작불에 기름을 붓고 있었다 .

 

"동기 모임에서 다른 여자들은 남자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끼워 앉는데 신영씬 늘 유미씨 옆자리만 앉잖아? 것도  한옆엔 벽을 두고 가까이 하고 싶어도 전혀 가까이 갈수가 없어 애 많이 태웠어...."

 

"말도 안돼.그때 내가 무슨 말인가 하면 늘 딴지 걸면서 열받게 했으면서......"

 

"나 이외의 남자와 말 섞는것 보고 싶지 않았어. 날 보는 그 시선으로 다른 남자를 보는게 싫었고. 내게 보여주는 얼굴로 다른 남자를 보는것도 싫었어. 나쁜 인상을 줄 수도 있다는걸 알았지만 함께 있는 내내 온전히 나만 바라보게 만들고 싶어서 그랬어.몰랐지....?"

 

어쩜.전혀 몰랐다.난 정말 날 굉장히 싫어 하는줄 알았다. 어쩔땐 너무 심해 집에올 때면 혼자서 눈물을 흘릴때도 있었다. 누구때문에 모임에 안나가게 되었는데.사실 원망이 많이 되었다. 나와 부딪치면 사사건건 따져서 물고 늘어지는 현석이였다. 일부러 안나온다는 정보을 받고 나갔는데도 어느새 있다보면 늦게 나와선 꼭 싸웠다.말처럼 어쩔땐 정말 나쁜 사람 이라는 생각도 했었다.

 

몰랐던 고백에 괜히 눈물이 날려고 하는걸 얼른 감정 조절을 했다. 분하고 억울했다. 그냥 좋아한다고 고백하면 되었을 것을 그렇게 심하게 대했다니.억울했다. 그동안 쓸데없는 감정 소모 하면서 보내버린 시간이 너무 억울하고 아까웠다.

 

"머리결이 정말 부드러워.조인성이 나오는 cf처럼 진주결 같아.늘 묶고 있어 제대로 만져보지 못했는데......"

 

어느새 묶여있는 머리가 풀러져 있었다. 밖에선 한번도 푸른적이 없는 머리였는데 저번날 함께 있는 시간이 오래나 머리가 헝클어져 있어 잠깐 머릴 손질하려고 풀렀는데 그때 우연찮게 보고는 그때부터 둘이 있을땐 머리 풀고 있어 달라고 했지만 영 익숙치 않아 그러지 못하고 있는데 이렇게 머릴 풀러 버리다니 좀 당황스러웠다.

 

머릴 안아 품에 가두며 내 정수리에 턱을 올려 놓았다. 아까 샤워하면서 면도도 했는지 턱이 푸르스름했다. 청결한 쉐이빙 폼 냄새가 나는것 같았다.며칠 떨어져 있지도 않았는데,많이 그리웠나 보다. 이렇게 안겨 있으니 정말 좋았다.

 

아까 사무실에서 봤을때 사실 맘이 많이 안좋았다. 4일 못 본건데 얼굴이 많이 수척해져 있었다. 면도도 제대로 못했는지 턱도 까칠해 보였고.퇴근 시간이 되자 바로 사무실에서 나올땐 안스럽기 까지 했다. 아직 처리 해야할 일이 남았는데 빠른 퇴근을 하는걸 보니 정말 많이 지치고 힘들었나 보다 싶었다.

 

결국 그 빠른 퇴근이 나와 연관이 있음을 알게 되었지만,암튼 많이 힘들고 지쳐 보이는 모습에 내 맘이 많이 안좋았었다.그래서 아무말 없이 여기로 온거 였다.

 

사실 아직 사귀는 첫 단계라 많이 조심 스러웠다. 다른 곳도 아닌 자회사 홀텔이라는 점이 신경이 쓰였다. 누군가 한사람 이라도 마주치면 소문은 순식간에 퍼지는 거라 되도록 이면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하고 싶었다.

 

나도 그렇고 현석도 서로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서로 알아가는 단계라 아직 뭐라 결론을 내릴 단계가 아니라 모든 행동이 조심 스러웠다. 나혼자만의 생각일지도 모르지만,아직은 확신이 서지 않고 있어 뭐라 딱 부러지게 말 할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