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로 헤어지긴 너무 아쉽다며 자기 집으로 가자는 유미의 청을 거절하고 헤어져 나왔다.몇시간 전 부터 진동으로 하고 있던 핸폰이 은근히 신경이 쓰였기 때문이였다. 계속 문자가 왔는데 유미의 얘기가 너무 심각해 흐름을 깨고 싶지가 않아 무시하고 있었다.마음이 착잡했다. 평소의 내 생각과는 전혀 다른 윤동진의 모습에 많이 놀랍고 실망이 되는 하루였다.
회사 여사원 들에게 윤동진은 인기가 많았다. 가끔 여사우들의 모임이나 휴게실에 들를때면 어김없이 나오는 이름이였다. 관심이 없던 상대라도 자주 들리는 소리에 귀가 열리는 법이다. 사석에서 몇번 본적있는 윤동진 하면 떠오르는 그림은 소문처럼 꽤 괜찮은 남자 였다. 일에 대한 정열이나 정확성.추진력...작은 아버지 말로는 낙하산 인사라는 말이 있긴 하지만 정식으로 공채 시험으로 들어왔고 입사 성적도 좋았고 일도 열심히 잘한다고 했다.
소문은 무성하지만 확인된 소문은 없었다. 정말 말 그대로 소문인것 뿐이였다.그냥 여사원들의 입을 거치면서 살이 더 보태져 부풀려진 이야기 뿐이라는 말이 나올만큼 여사원들 과의 소문은 그정 풍문에 불과한 것 뿐이였다. 그랬던 윤동진 이였는데, 마른 하늘에 날벼락도 이보단 심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믿었던 사람인데 발등 찍힌 기분이였다. 소문도 하필 그렇게 더럽고 몹쓸거에 유미가 걸렸다는게 화가 나고 안타까웠다.정말 속상하다. 하필 유미에게 그런 추문이 걸려들었다니,너무 속이 상해 화가 다 났다.
원룸으로 온 시간은 거의 12시을 향하고 있었다. 집으로 와서 화장을 지우고 샤워도 하고 편한 옷으로 갈아 입고 다이어리을 꺼내 드는데 핸폰이 울렸다. 발신번호는 차현석 이였다. 메세지를 계속 씹었더니 이번엔 전화을 직접 걸어왔다.좀 혼나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폴더를 열었다.
"지금 어디야? 아직 집에 안온건가....?"
애써 화을 참고 있는 목소리 였다.
"미안해요.유미에게 안좋은 일이 있어 전화할 상황이 아니였어요.지금은 집이예요."
먼저 사과 부터 했다.보내온 메세지가 7 통이였다. 화가 많이 날 만도 했다.사과 부터 하는 내게 현석은 잠시 말이 없었다.몇초간의 침묵이 흐르고 목소릴 좀 가라앉힌 현석이 물었다.
"여행은 ? 어떻게 하기로 한거야?"
"여행은 갈 상황이 아니여서 다음으로 미루어 졌어요..."
"그래? 잘 됐네.그럼 내일과 모레는 나랑 만나는 거지....?"
"무슨 계획이라도 있나요?"
"이제 겨우 통화 하는데 지금 부터 생각해서 약속 잡아야지.......뭐할까...?"
".......글쎄요......."
갑자기 많이 어색해졌다. 침묵이 잠시 흘렀다.몇초의 어색한 침묵이 흐르고 있는데 조금은 머뭇거리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의 공식적인 첫 데이튼데,연애 경험 많은 장신영씨가 한번 세워 보지 그래?난 그대로 따를께?"
비 꼬는 건지 장난으로 말하는 건지,아님 진심으로 묻고 있는건지 순간 혼란이 왔다. 못들은척 무시하며 아무렇지 않은척 말했다.
"영화 나 볼까요...?"
"무슨 영화.....? 보고 싶은 거라도 있어...?"
"어떤 종류의 영화 좋아하세요?좋아하는걸로 봐요...."
"난 스릴러 좋아하는데.프랑스 영화 좋아해....? 혹시 신영씨 불어 할줄 알아?"
"그냥 조금.알아듣는 정도요?"
"나한테 괜찮은 프랑스 영화 dvd 있는데 그거나 볼까...?"
"설마 또 호텔로 오라는 건 아니지요.....?"
일부러 말끝을 올려 물었다.
"ㅎㅎㅎㅎ 밖에서 만나는게 좋으면 그렇게 하지.호텔이 왜 신경이 쓰이는지 모르겠네...?"
"다른 사람들 눈에 띄어서 좋을게 없잖아요."
"뭐가? 어차피 나중에 다 알게 될텐데......"
좀 무책임 하다란 생각이 순간 들었다.
".....어떻게 될지 아직은 모르잖아요?우린 지금 시간을 갖고 생각해 보기로 한거잖아요? 소문나면 뒷 감당이 쉽지 않을거라는 말예요.더구나 호텔은 드나 드는 방문객이 많고 난 아니더라도 사장님을 아는 얼굴이 많을거라구요.조심해서 나쁠건 없다고 봐요.."
내말에 현석은 잠시 말이 없었다, 왜 아무런 대답이 없는지,자꾸 말이 끊어지는 거에 신경이 쓰였다. 내가 무슨 말 실수라도 한건가 싶어 불안불안 하였다.잠시 아무말 않고 있더니 현석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 장신영 씨?"
"....네..."
"내 이름 뭔지 몰라?"
갑자기 뜬금없이 이름은 왜?
"묻고 있잖아. 내 이름이 뭐야?"
"갑자기 왜..?제가 모시는 상사 이름도 모를까봐서 묻는 거예요?"
".....휴......"
정말 이상했다. 말하는 중간에 왠 한숨인지.몇시간 동안 내내 유미 위로해 주고 온뒤라 좀 많이 피곤한데,현석까지 이러니 ,오늘 하루가 정말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지금 뭐하는 거야?이렇게 늦은 시간에 나랑 장신영씨 뭐하는 거라고 생각해."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는데....."
"내가 회사일로 신영씨 에게 이 늦은 밤에 전화 한거야?"
"...그게 아니잖아요?왜 ,갑자기..."
"우리 사귀기로 한거 맞지?결혼을 전제로 서로 교제 하기로 한 사람들 맞아?"
"............?"
"교제 상대가 아무리 회사의 상관 이라고 해도 둘 만의 사적인 자리에서 까지 사장님 이라는 경존칭은 아니라고 보는데,더구나 나이 차가 많이 나는 것도 아니고,이름 정도는 자연스럽게 불러 줄 수도 있다고 보는데,아닌건가?"
갑자기 머리가 '띵' 했다. 호칭,호칭이 문제 였구나.당황스러움이 들었다. 이럴때 어떻게 대처을 해야 하는 건지 많이 당황 스러웠다. 지금 이상황을 어떻게 넘겨야 할지가 많이 걱정 스러웠다.
"현석씨라고 불러.차 현석!!당신이 지금 통화하고 있는 사람은 회사 상관인 사장이 아닌 그냥 사귀는 남자 차현석 이라구.공과 사는 확실히 구분해줘...."
"....노력해 볼께요...."
"이름 부르는게 노력을 해야 할 만큼 힘든 일이라는 거야? 진짜 연애 경험 많은거 맞아...?"
노력해 본다는 내말에 현석은 기막혀 했다.말끝마다 연애경험 ,연애경험.재미 붙인것도 아니고 놀리려고 하는 건가? 말 실수 한번 했다가 큰 코 다친다는 말을 몸소 체험하고 있는 중이였다.아무런 대답없는 내게 현석이 먼저 말했다. 아까완 달리 조금은 누그러진 목소리였다.
"지금 부터 많이 연습해서 내일 부터는 꼭 이름으로 불려지길 바래.신영씨가 내 이름을 불러주면 아주 좋을것 같아.일단 내일 11시쯤 집으로 갈께.만나서 뭘할지 정하자구.너무 늦었으니까 오늘은 이만 끊을께......."
"..........네...."
"꼭 연습 많이 해와 ...내 이름은 차현석이야.바라건데 성 빼고 이름만 불러 주면 더 좋을것 같아.그럼 내일 봐.잘자 신영씨...."
갑자기 차현석이라고 부를 자신이 없다. 사장님에서 차현석 이라니.예전 입사 동기때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으니 차현석 이라는 말이 쉽게 나왔지만 지금은 그 이름에 무거운 철쇄라고 둘리운것 처럼 쉽게 입에서 나오지가 않았다.
이 어색함을 어떻게 물리쳐야 할지.아마도 오늘 잠들긴 틀렸나 보다. 차현석 .차현석....입에서 뱅뱅 도는 그말이 어떻게 쉽게 나갈지 고민이 많이 되었다.풀리지 않은 수학 문제 하나를 받아 든 맘이였다. 답인거 같은데 웬지 아닌것도 같은 혹시 실수가 아닐까 하는 그런 답인것 같아 맘이 편치가 않았다. 차현석 내게 힘든 숙제 였다.
11시가 가까워져 오자 알수없는 초조감에 머리가 지끈 거렸다.회사가 아닌 밖에서 만나는건데 어떤 옷을 입고 가야할지 많이 신경이 쓰였다. 지금까지 만남은 늘 퇴근후라서 따로 고민할 필요가 없었지만 지금은 미리 약속이 잡혀있고 진행되고 있는 상황인지라 생각지도 못한 복병 같았다.평소 회사 갈때 처럼 정장 차림으로 나가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갑자기 유미 만나러 갈때 처럼 편하게 입고 가기도 그렇고 난감했다. 벽에 걸린 시곈 벌써 10시를 넘어 서고 있는데 아직 화장도 못하고 정리가 안되고 있었다.
현석은 어떤 차림을 할까?전에 호텔에서 보니까 의외로 캐주얼한 옷이 잘 어울리던데 니트 같은 종류의 옷을 좋아하는지 봤던게 모두 니트였다. 시계 초침 소리가 크게 들리는 착각까지 들었다.더이상 망설여 봤자 괜한 감정 소모만 될것 같아 첨 생각했던 대로 민트색 면 후드티에 청바질 입고 카디건을 챙겼다.
옅은 화장에,사실 회사 갈때를 제외하곤 화장은 안한다. 유미와 만날때도 그냥 썬크림 정도만 바르고 나선다. 유미도 그건 마찬가지다.화장을 하면 마치 가면을 쓴것 같아 얼굴이 간지럽고 개운치 못하다.평소의 화장도 거의 한듯 안한듯 옅게 한다. 수진인 내게 생얼대회에 나가면 일등을 먹겠다며 깨끗한 피부유지 비결좀 가르쳐 달라고 한다. 내 보기엔 자기가 더 탱글하니 깨끗하면서 말이다.
모든 준비를 다 마치고 콩콩 뛰는 심장의 빠른 진행을 막기위해 차가운 매화차를 준비해 마셨다. 알싸하면서 특유의 꽃향기가 나는 매화차를 다기에 걸러 마시지 않고 그냥 투명한 컵에 약간의 양을 덜어 물을 넣으면 웅크려 있던 꽃잎과 잎이 원래의 제 모양을 만들며 향과 맛을 우려내는게 예뻐 매번 마실때 마다 이렇게 마셨다.
우려나온 차에 작은 모양의 얼음을 몇개 동동 띄워서 얼음이 입에 들어오지 않게 조금씩 맛보는 맛은 정말 향기로왔다. 입안으로 좋은 매화 향이 가득 들어오는 기분이다. 내가 마치 매화꽃을 한껏 품고 있는 싱그런 나무가 된듯한 느낌.아 정말 좋다. 두팔을 하늘위로 또는 양옆으로 쫙 펴고 서 있으면 몸안의 모든 신경세포가 쭉쭉 뻗어나가는게 정말 좋았다.
내 그런 상념을 깨고 핸폰이 울렸다.'어머나 어머나~~~~'내 이미지완 다른 컬러링 소리에 모두 깬다고 한다. 핸폰 새로 바꾸면서 유미가 선물해준 트로트 메들리 컬러링 인데 장난스러운 유미의 웃음 소리가 매번 들리는것 같아 일부러 바꾸지 않고 있었다.
"집앞인데 ...준비 다했으면 내려와"
벌써 11시?네 라는 소리를 하며 올려다본 시곈 정확히 1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이미 챙겨놓았던 가방을 들고 현관앞에 세워진 거울에 한번더 비춰보고 밖으로 나왔다.
독신자와 학생들 위주의 원룸앞에 은회색의 페라리가 세워져 있었다. 토요일 한낮이라 다니는 사람은 몇없어 보였지만 몇몇의 시선이 미끈하게 잘빠진 페라리를 곁눈질 하고 있는게 보였다. 오픈카 여서 뚜껑을 열고 있어서 인지 더 눈에 띄었다. 다크 블루의 니트티에 청바지 차림의 차현석은 차의 모델처럼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 끌고 있었다. 엄친아 같은 포스가 흘러 주변의 시선들을 모조리 잡아 채고있기에 옆으로 가기까지 조금의 용기가 필요했다.
8월이 훌쩍 지나가버린 날인데도 아직 밖은 더웠다. 차안은 생각보단 덥진 않았고 스치듯 나는 깨끗한 민트향이 기분을 좋게 했다. 내가 타길 기다렸다 옆에와 앉으며 열려있던 뚜겅을 닫고 음악을 틀며 차를 출발 시켰다.
"시외로 나가볼까? 일단 점심을 해결하고 드라이브좀 하다가 영화보고 저녁을 먹는게 났겠지....?"
"네...."
"다른 계획 생각해둔것 있어?어떻게 하는게 좋을것 같아?"
"말씀하신 것처럼 ......해요....."
"....그래.....?"
아. 이 참을수 없는 어색함.나도 차현석도 어색한 침묵에 숨쉬기가 점차 힘들어지고 있었다. 그냥 부딪치면 아무렇지 않게 말이 술술 나오는데 꼭 이렇게 상대를 다르게 의식하면 꿀먹은 벙어리마냥 입이 다물어 지고 머리와 몸 모두가 경직되어 버리다니 힘든 이 난관을 어찌 헤쳐가야 할지 머리가 무거웠다.먼저 침묵을 깬건 현석 이였다.
"어젠....유미씨와 꽤 늦게 까지 있었나봐? 둘이 만나면 늘 그렇게 늦게 까지 있어?"
".....그냥 ....얘기 하다 보면 시간이 많이 흐르죠......"
"요즘 뉴스나 신문 보면 밤길 다니다 봉변당하는 여성들 많던데.무섭지 않아...?"
"차도 있고 별로 무섭다는 생각은 안해요.더구나 제 인상이 딱딱해 보여 접근하는 사람도 없는걸요..."
"왜 딱딱해 보인다고 생각해? 내 눈에 비친 신영씬 굉장히 여성스러운데?조금만 건드려도 금방 눈물을 담고 올려다 볼것 같은데....."
이 무슨 손발이 오그라 드는 표현이란 말인가? 자기가 말해 놓고도 심했나 싶은지 멋적어 하는 표정이라니,난 순간 쏠리려고 했었는데. 내 어디가 그렇게 청순가련형 이란 말인가? 매번 도서실 사서 나 기숙사 사감 같다고 놀렸으면서 말이다.고개 돌려 쿡쿡 거리는 모습이 정말 웃겼다.
아침에 빈속에 차만 마시고 나와 점심은 기름기있는 따뜻한걸 먹고 싶다고해서 파스타 전문점으로 갔다. 나도 계속 차만 마셔서 인지 속이 까끌거렸다.된장국이 있는 한식보다는 고소함이 있는 파스타가 절로 생각이 났다.둘이서만 하는 식사는 첨이라 좀 떨리는 감이 있었는데 그건 나 혼자만의 생각이였는지 현석은 자연스럽게 메뉴를 정하고 느긋하게 앉아 있었다.
"연인들은 모두 옆자리에 같이 앉나봐? 식사할땐 맞은편에 앉는게 더 편할텐데?"
안을 둘러보다가 던진 말이였다. 난 웃음이 나오려는걸 애써 참으며 대답했다.
"개인차 이긴 하겠지만, 가벼운 스킨쉽 이라도 하려면 앞보단 옆이 났겠죠?서로을 느끼기엔 맞은편 보단 옆자리가 훨씬 편할테니까.사귄지 얼마 안되는 커플들이 보통 저렇게 앉는다고 알고 있어요."
내 말에 갑자기 날 빤히 아니 물끄러미 보고있는 차현석과 눈이 정면에서 마주쳤다.갑자기 수업시간에 떠들다가 들킨 학생같은기분이 들었다. 왜 저런 눈으로 날 보는건지 심하게 가슴이 쿵쾅 거렸다. 얼굴에 더운기가 확 몰려 들었다.내 표정에 갑자기 무안해진 현석은 아무렇지 않은척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를 듯한 얼굴이였다.내가 뭐 말 실수를 한걸까? 그냥 묻는말에 아는 대로 내 생각을 말한건데 그게 잘못된 걸까?아무런 대답 없이 침묵하고 현석의 모습에 입안이 바짝 타 들어 갔다.
그뒤로 어떻게 시간이 흘러 점심을 끝냈는지 모르게 시간이 흘러 후식으로나온 커피 까지 다 마시고 나왔다. 먹는 중간 중간 몇마디 더 주고 받았지만 건성건성한 대화 였다. 묻고 답하는 식의 짧은 문답식 대화.묻는 말에 어색함을 주지 않으려고 길게 답하려고 딴에 무지 노력을 했는데도 생각이 없는 물음이라 답도 시원찮게 나오는 대화 였다.서걱거리는 맛도없는 과자을 아무 생각없이 집어 먹는 것처럼 채워지지 않는 욕구에 짜증이 나는 그런 점심 이였다. 대체 내가 또 무얼 잘못한건지 머리가 다시 지끈거리고 있었다.
시내 방향으로 차를 모는 동안 계속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이럴거면 뭐하러 만나자고 한건지.연애 경험 많았다면서 데이트 하면서 상댈 이런식의 어색한 감옥에 가둬둔다는게 말이돼?정말 깬다 깨.혼자 상상하면서 속으로 궁시렁 거리는데 차가 한강변에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