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사랑. 겨울로 온 사랑 겨울로 떠나간다. 내가 그대이듯 내 어깨 위를 걸터앉아 짓누르는 고뇌 쪽빛 하늘 저 곳에 서러운 그대 미소 따스한 노을이 낯익은 어느 날 까만 머리 서리 곱게 내리고 내가 그대이듯 내가 그대 되고 병환이 직장을 버리고 떠돈다.
그대 나이듯
우리 그리 살면 안 되는지요.
그대 부드러운 손길로 쓰다듬고
그대 가슴 두터운 상처를
내 웃음으로 보듬어 안으며
우리 그리 살면 안 되는지요
마른 가지에 낙엽 부서지듯, 나와 그대 한숨
서로, 가을 구름처럼 포근히 감싸주며
우리 그리 살면 안 되는지요.
산기슭 돌고 돌아 작은 산골에
오두막 짖고
나란히 어깨 감싸며
우리, 그리 살면 안 되는지요.
주름 잔잔히 세며 마주앉아
옛 얘기 도란도란 작은아이들 지켜보며
우리 그리 살면 안 되는지요.
그대 나이듯
그대 나되어
우리 그리 살면 안 되는지요.
우리 그리 살면 안 되는지요.
수 현이 세상을 떠난 지 두어 달쯤 지났을 때 한 통의 전화를 받고 난 후다.
수 현의 마을 이장으로부터 온 전화였다.
그녀의 어머니가 이상해졌다는 전화였다.
수 현의 마을을 찾아가 이장에게서 들은 얘기가 병환을 참을 수 없는 가책을 갖게 했다.
수 현의 어머니는 정신 이상을 일으켜 매일 온 마을을 떠돌아다니곤 한다는 것이다.
딸의 이름을 부르며 작은 인형 하나를 안고 매일 아침 마을 어귀에 나타나
수 현을 부르기도 하고 밤이면 마을이 떠나가게 울부짖는다는 것이다.
병환이 마을을 찾아가기 몇 일전 수 현의 어머니는 행방이 묘연해졌다.
이장에게서 모든 이야기를 들은 병환은 가슴이 아프다.
불쌍하신 분,
자식을 잃고, 남편을 잃고 하나 마음으로 의지하던 사랑하는 딸을 잃고..
정신을 놓지 않았던 그때가 차라리 이상하리라.
돌아오는 차안에서 병환은 끝없이 눈물이 흐른다.
회사를 그만둔 병환은 수 현의 어머니를 찾는데 모든 것을 다했다.
그러나 끝내 찾지 못하였고 오늘은 누군가 본적 있다는 연락을 받고 갔다 오는 중이었다.
그러나 오늘도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했다.
이렇게 추운 날에 어디에 있을까.
수 현의 어머니는 어디서 떠돌고 있을까
가슴이 아프다.
병환은 수 현이 죽은 후로부터 자신도 모르게 조금씩 가슴이 저리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바람이 불어온다.
가깝게 앉아 있는 저 산에도 쓸쓸하도록 슬픈 바람이 불고 있다.
< 저기, 저 산에 수 현이 잠들어 있는데 >
병환이 가고있는 곳은 수 현이 잠들어 있는 곳이었다.
가고자 해서가 아니고 언제부턴가 자신도 모르게 찾아가는 곳이었다.
수 현의 곁에 앉아 술을 마시고 넋을 놓고 있다보면 잠이 들고
문득 추위에 깨어보면 거기 잠들어있다.
그렇게 겨울이 가고 봄을 느끼기도 전에 여름이 오고.....
병환은 지난 겨울에 입었던 옷을 여름에도 입고 있었다.
지금 병환은 예전에 그가 아니었다.
요양원으로, 정신병원으로, 부랑자 숙소로. 그렇게 떠돌며 이미 병환은 부랑자가 되어있었다.
가끔씩 편한 한곳으로 가고싶어 질 땐 스스로 마음을 다잡아 끌어 앉히고 술을 마시면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이 서럽기도 하여 밤과 낮으로 목놓아 울기도 했다.
병환은 철저하게 스스로 자신을 버렸다.
생각이란 생각은 오로지 하나 뿐이다.
무엇인가 자신에게 가까이 와 있다는 것을 알기나 한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