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 같은......"
혼자서 뇌까리는 병환의 눈에도 한 방울의 물빛이 보인다.
맥주 캔을 입에 대고 마셔보지만 이미 비어있다.
작게 포장된 종이를 뜯었다.
은빛으로 반짝이는 물건이 있다.
라이터다. 지포 라이터......
라이터엔 아주 작은 글씨가 새겨있다.
수 현 ......
무심히 몇 일이 지났다.
"저, 팀 장님?"
병환 앞에 영업 팀의 미스 박 이 서있다.
"어? 영업 팀의 미스 박이 웬일이야?"
"팀 장님, 수 현이 소식 궁금하시죠?"
"시간 좀 있으세요?"
잠시 후 병환은 회사 지하 커피숍에 미스 박과 마주앉아 있었다.
"수 현이 ,임신했었어요"
쿵......
"아마 그래서 회사를 떠났을 거 에요"
"......"
"팀 장님이 아시면 안될 거 같아서......"
"그... 그럼 어디로?......"
"그건, 저도 몰라요"
"혹시? 갈 만 한데 라도?"
"몰라요. 워낙 말이 없었으니까요"
그랬다, 수 현은 말이 없는 부원이었다.
회사에서 유일하게 친구로 지냈던 미스 박에게도 말이 별로 없었으니까.
"전에 수 현이 집에 놀러갔다가 수 현이 책상에 산모 수첩을 본적 있어요."
"항상 팀 장님만 바라보고 있으니까. 수 현이 가 팀 장님을 사랑하는 거 눈치챘죠."
"팀 장님?"
"네?"
"어떻게 하실 거 에요?"
"찾아봐야지..."
토요일, 병환의 차는 수 현의 시골집을 향하고있었다.
골목 끝에 들어서니 저 만치 수 현의 집이 보인다.
예전에 수 현이 아버님이 돌아 가셨을 때 보다 집이 더 쓸쓸해 보였다.
"선생님 어쩐 일로 저희 집을 다?"
수 현의 어머니는 반갑게 병환을 맞이한다.
아직 수 현의 소식을 모르는가보다.
이제 보니 수 현의 어머니는 시골사람 같지 않아 보인다.
"저의 수 현이 가 선생님께 폐를 많이 끼치지요?"
"아닙니다. 얼마나 일을 열심히 하는데요"
"그래야 하지요, 우리가 선생님께 얼마나 폐를 끼쳤는데..."
"폐 는 무슨... 아닙니다."
"그런데, 여기까지 무슨 일로?"
수 현의 어머니는 과일을 내놓으며 묻는다.
"네 에. 이쪽에 잠시 일이 있어 왔다가 들렀습니다."
"어제 현이 한 테 전화가 왔었어요, 잘 지낸다고"
"네 에..."
아직 모르고 있다. 수 현은 어머니께는 아직 숨기고 있나보다.
"혼자 계시니 적적하시겠어요."
"아니에요, 농사짓느라 요즘은 바빠서..."
수 현의 어머니는 시골 사투리를 쓰지 않는다.
투박해진 손이 시골 사람인 것을 알려주지 않는다면 여간해선 알 수 없을 것 같다.
"좀더 계시다 식사하시고 가시지 않고요"
일어서는 병환에게 수 현 어머니가 아쉬운 듯 건넨다.
"가 봐야합니다 ,약속이 있어서요"
짐짓 병환은 약속이라도 있는 것처럼 일어선다.
"저. 잠깐만 요"
병환을 불러 세운 수 현의 어머니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손에 작은 비닐 봉투 하나를
들고 나온다.
"이거 가져가세요, 얼마 안 되는데......"검정 콩이에요."
"그냥 드시지 저에게까지?......"
"갑자기 오셔서 드릴 것도 없네요."
수 현이 어머니는 오히려 미안한 듯 웃는다.
웃는 모습이 단정하고 품위가 있어 보이는 것이 아마도 수 현이 가 어머니를 닮았나보다.
"선생님 가을 끝나면 한번 찾아뵐게요."
"네 ,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선생님 조심히 살펴 가세요."
병환의 차가 마을을 벗어날 때까지 수 현의 어머니는 동구 밖에서 그냥 그 자리에 서있다.
어디로 갔을까? 병환은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가 있을 만 한데를 생각해 낼 수가 없다.
그렇게 여름이 가고 가을이 지나가고 있었다.
모두가 퇴근하고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 병환은 혼자 의자에 앉아있다
회사 건물 건너 큰길가 가로수 플라타너스 잎이 무성히 떨어져 도로를 질주하는 자동차
사이로 흩날리고 노란 은행잎이 가을 바람에 춤을 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