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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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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머무는 숲


BY 주 일 향 2004-02-02

 

어둠속에서 형님의 얼굴이 발그레 상기돼 있음을 감지했다. 그 남자를 떠올리며 행복한 표정을 짓는 형님이 부럽다는 생각을 할때 형님은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아영이를 유치원에 보낸 뒤, 환기를 시키기위해 집안의 창문을 모두 열고, 거실 소파에 앉아

차를 마시는 한가로운 시간.

집안에서 제일 먼저 볕이 드는 침실은 밝은 햇살이 성큼 들어섰고, 건너편 거실엔 아직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좁은 실내에 명암이 두드러지는 아침시간의 적요로움이 참 좋다.

머그잔을 두손으로 받쳐들고, 침실 창가로 다가가 열린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선선한 바람을 느끼며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파란색 물감을 진하게 풀어놓은 듯 청명한 가을하늘에 때묻지 않은 솜털구름이 심심한듯 그려내는 모양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그를 떠올리고 있을 때. 집안의 정적을 깨고 전화벨이 울렸다.

“ 여보세요.”

경옥의 목소리는 약간 가라앉아 허스키하게 들렸다.

“ 경옥아. 날씨가 너무 좋은데, 지금 나올 수 있어?”

“ 지금?”

언제나 그랬다, 경옥이 식구들에게서 놓여나는 시간이면 어김없이 전화를 걸어와, 무조건 나오라고 재촉했다. 그런 그가 싫지 않았던 경옥은 한 번도 그의 제의를 거절해 본적이 없었다.


근처 정류장에서 경옥을 픽업한 그는 한껏 밝게 웃으며 뒷좌석에 놓여있던 종이가방을 뒤적거리더니 경옥에게 뭔가를 불쑥 내밀었다.

“ 먹어봐. 집에서 부쳐온 사과야.”

사과를 받아든 경옥이 한 입 배어물자 입안 가득 과즙과 함께 사과향이 퍼졌다.

“ 맛있다. 옛날에 먹었던 딱 그맛이야. 오빠.”

“ 그렇지? 우리집 사과맛 하나도 안 변했지?”

서로를 마주보며 웃는 차 안에도 향긋한 사과향이 퍼졌다.

문득 흘러가버린 시간 뒤편에 묻어두었던 추억이 되살아났다. 그토록 보고싶어했던 그를 볼 수는 없었지만, 희숙이를 통해 맛볼 수 있었던 사과는 정말 맛있었다.

그를 가까이 느낄 수 있었으니까.....

“ 경옥아, 내가 대학 입시준비로 바빴을 때, 니 생각을 하면서 많은 위안을 삼았다는 거 모르지?”

“ 나를?”

“ 음, 경옥일 생각하면 난 꿈이 생겼고, 막 의욕이 넘쳤어.”

“ 그런데 왜 교회에 나오지 않았어? 교회에만 나왔어도 날 볼 수 있었을텐데..”

“ 솔직히 그땐 나혼자 널 좋아하는 줄 알았거든, 그런데다 부모님의 기대감도 부담스러웠고,”

“ 그랬었구나,”

“ 경옥이, 넌 어땠어?”

“ 오빤 바보야.”

“ 왜?”

“ 난 오빠 보고 싶어서 교회 주변을 배회하고 다녔는데...."

“ 그랬었니?”

“ 오빠 때문에 난 밥맛도 잃어버리고, 처음으로 사랑의 열병을 앓았는데..... 오빤, 아무것도 몰랐다구? ”

“ 경옥이가 워낙 새침했잖아. 깍쟁이같이 입 꼭 다물고 눈 내리깔고 다소곳하게 걸어가는 너에게 접근하는게 솔직히 힘들더라. 원래 내성격이 명랑하고 저돌적인 편인데, 경옥이 니 앞에선 가슴이 뛰고, 숨이 막히는게..........널 많이 사랑했었던 것 같다.”

“ 난 오히려 명랑한 오빠가 내게 별다른 반응이 없어서 마음만 태웠었는데,”

“ 문학의 밤 행사때 처음 널 보고 난생처음 큰 기쁨을 느꼈지. 잃어버린 갈비뼈를 찾은 것처럼 가슴에 기쁨이 밀려오는거야. 주체할 수 없을 만큼.. 그래서 계속 널 보며 웃었는데...몰랐니?”

“ 그건 나도 알아요. 오빠가 날 너무 좋아하는 것 같다며 희숙이가 마구 놀렸으니까. 그런데 그이후에 오빠가 교회후배이상의 감정을 보이지 않아 얼마나 혼란스러웠는데”

“ 그랬었구나, 그런줄도 모르고...... 정말 난 바보였구나, 경옥아! 미안하다.”

“ 그래두 희숙이에게 준 오빠네 사과를 먹으며 행복했던 시간도 있는걸.”

“ 그 사과말야. 실은, 희숙이에게서 어렵게 너에 대한 정보를 몇가지 들었는데, 니가 제일 좋아하는 과일이 사과라는 말을 들었거든. 그래서 너랑 가장 친했던 희숙이에게 선심도 쓰고 니가 사과를 맛있게 먹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었어.”

“ 그랬구나. 난 그런것두 모르고, 단지 오빠네 사과라는 이유만으로도 사과가 얼마나 달고 맛있었는데요. 만약 그때 그 사실을 알았다면 더 좋았겠지만.”

“ 다행이야. 비록 내 마음을 전달하진 못했지만 사과를 통해 우린 깊은 교감을 한셈이네.”

“ 그런가?” 제법 진지하게 말을 하는 그의 눈빛이 강렬하게 와 닿았다. 

“ 더구나 그때 내 처지가 오빠 앞에 자신있게 나설만큼 좋은 편도 아니라서 마음이 많이 아팠었는데, 이제 오빠 맘 알았으니 너무 좋아.”

드라이브 하기에 딱 좋은 한적하고 낭만적인 길이 길게 이어졌다.

“ 경옥아, 여긴 데이트 코스로 유명한 곳이야. 주변이 너무 아름답지?”

“ 정말 분위기있고 근사해. 오빠.”

“ 우리 좀 걸을까?”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으며 주변을 둘러보니. 이름모를 야생화가 무리지어 피어있었다.

소박한 빛깔로 다소곳히 피어있는 들꽃은 자만하지 않음으로 더 진가를 드러내고 있었다.

" 경옥아. 이 길은 팔짱을 끼고 걷는 곳이래.“

의아해하는 표정을 짓는 경옥에게 그는 이렇게 말했다.

“ 주변의 아름다움에 취한 여자들이 자기도 모르게 옆에 있는 남자에게 팔짱을 끼게 된다는군, 자. 우리도 해볼까?”

“ 오빠가 원한다면? 히힛.”

그와 팔짱을 끼고 아름다운 길을 걷는 다는 사실이 꿈처럼 느껴졌다. 그 순간만큼은 남편에게 받았던 상처와 불신도 잊을 수 있었고, 일상에서 쌓였던 스트레스가 단번에 날아가버렸다. 그가 원한다면 손도 잡을 수 있을 것 같았고, 감미로운 키스까지도 허락할 것만 같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그는 열 일곱 살 갈래머리 여고생의 순수함을 지켜주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사실 경옥은 남편에게서 열정적인 애무를 받아본지 오래되었다. 그런 남편에게서 낭만적인 키스를 받는 다는 건 꿈에도 생각할 수 없었고, 어쩐지 경옥도 남편과 키스를 하는게 꺼려졌다. 언젠가 케이블 티브이에서 본 영화가 생각났다.

애정이 없이 섹스는 할 수 있지만, 사랑하지 않으면 정말 키스는 하기 힘든 거라고 말했던 것 같다.

그때 자신이 속으로 ‘맞아’라고 중얼거렸던 기억이 났고 순간 그와의 키스장면을 떠올리며 경옥은 피식 웃었다.

“ 왜 웃어?”

“ 아무것두 아냐,”

“ 지금 엉뚱한 상상했지?”

마치 경옥의 마음을 들여다 본 듯 말하는 그를 보자 갑자기 얼굴이 붉어졌다.

‘ 수상한데, 얼굴까지 빨개지는게....“ 추리영화에 나오는 형사처럼 눈을 뜨고 다그치는 그에게 경옥은 뭐라 변명을 해야할지 얼른 떠오르지 않아 당황스러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