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의 끝자락에서 허위적 거리며 눈을 뜰 무렵, 햇살보다 먼저 날 맞은 건 Coffee의 감미로운 향이었다.
그 향내는 어느 순간 코끝에서 강하게 느껴졌다.
"안 일어나나? 내 너 이럴줄 알았다. 늦잠자지 말라켔지?"
"형?!"
놀라 벌떡 일어나는 바람에 큰 머그컵 한 가득 따라 들고 왔던 형의 손에서 잔이 떨어져 시트엔 온 사방으로 coffee 얼룩이 번지기 시작했지만 난 나도 모르게 형을 꼭 끌어안았다.
"자슥.. 니 내 많이 보고 싶었나? 나도 니가 젤로 보고 싶더라."
"형? 어떻게 된 거에요? 다음 주에나 온다더니? 깜짝 놀랐잖아요?"
웅주형은 그 와중에서도 나의 시트를 둘둘 말아 세탁실로 가져가면서 말했다.
"니 그케 창조력이 부족해 가가 어찌 연애를 한 단 말이고? 마, 이렇게 내가 갑자기 오니까 더 안 반갑나? 이런 게 다 깜짝 쇼가 가져다 주는 즐거움 인 거 모르나?"
거실로 나와보니 이미 형이 간단한 아침식사를 마련해 놓았다.
형 특유의 정겨움이 묻어나는 아침 식탁…
실제로 형과 떨어져 있었던 시간보다 그 그리움의 정도가 더 깊었음에 틀림이 없었던 건, 계란 반숙과 오렌지가 놓여진 아침상을 보고 목젖으로 무언가 울컥 넘어가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일 터였다.
형은 독일에서 많이도 그을려져 왔다.
조금은 까칠해 보였지만 더욱 남자로서의 그윽함이 배어 나오는 얼굴색을 하고 있었다.
보기가 좋았다.
웅주형은 웃는 얼굴로 의자에 앉아서 나에게 다시 coffee를 따라주었다.
"니 미은이랑은 잘 지내고 있나? 참.. Sunny는 어떻노?"
형이 물어보고 싶었던 사람은 누나였나 보다.
이럴 땐 형도 형같지가 않다.
"누나가 애 많이 썼어요, 형 온다는 멜 받고 누가가 젤 좋아하던데요?"
"그 친구 혼자 많이 힘들어서 그런거지, 뭐 .. 내가 와야 지가 좀 편하다 아니가?"
시선을 다른 곳으로 옮기며 형은 괜히 마른 기침을 한다.
사랑은 사랑이라던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던 누군가에 대해 애틋한 맘이 있다면 감추려 해도 감출수가 없다고 웅주형이 나에게 말해놓고도 이리도 딴 전을 피우는 걸 보니 웃음이 나왔다.
웅주형도 피식하고 웃긴했지만 곧 의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김회장님 유골모시고 미스터 부터바우의 농장에 갔다. 마, 그림같더라. 오랜 시간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그 곳을 회장님이 그리워 하셨을 법 하더란 말이다.
회장님 유언대로 보내드리고나니 나도 인생이 뭔가,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스스로 묻지않을 수 없더라. 병근이 니, 니가 얼마나 운이 좋은 녀석인지 아나?
김회장님처럼 ,또 나처럼 더 늦게 시작할 수도 있었으련만 니는 지금 너에게 주어진 시간의 선물을 누리고있다는 걸 모를 끼다. 하지만 서도. 좀 더 나이를 먹으면 다 알게 된다.
사는 게 어떤 건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건지를 말이다.
난 독일에 있는 동안 면도도 안하고 책도 별로 안 읽고 그렇게 있다가 왔다.
아침부터 밤까지 그저 농장 사람들이 어떻게 움직이나 그것만 바라보고있었단 말이다.
근데 웃기는게 뭔지 아나? 매일매일 눈으로 보기엔 딱히 다를 게 없는 시골의 일상인데도 그 걸 지켜보는게 그 어떤 일보다도 재미가 있더라, 더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당장이라도 이곳 생활을 접고 나도 그 속에 푹빠지고 싶을 만큼 그런 끌어당김이 거긴엔 있었다.
처음엔 그게 뭘까 막연히 한 단어로 표현도 안되고 잘 모르겠더니만은 그게 바로 '살아있다는 것'에 대한 욕구인걸 나중에사 알았다. 망자를 보내러 가서 산다는 것, 살아있다는 것에 대한 답을 얻었다는거 아이러니 아이가? 그치만서도 그게 사실인기라.
나도 정말 이제 몇 주 후면 40살이대이. 어케 여직지 까지 산다는 것에 대한 이리 무심했는지 모르겠다. 김회장님을 만나서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내 인생의 길을 정해주신 양반이 떠나가는 길에서도 나에게 가르침을 주시고 가는 것 같아서 내 눈물이 억수로 나더라.
니 들어봐라.
처음에 우리가 만나서 얼마안되가가 함께 살게된 것도 다 우리의 인생속에 우리가 나누어야할 부분이 있었기에 시작된거란 생각이 든다.
병근이 너 늦지않았대이. 한 번 사는 인생, 니가 행복해 지는 길을 가라.
아부지랑 너랑 점점 거리가 멀어진다는 거 내도 안다.
하지만 니가 원하는 삶을 살지않으면 행복해 질 수없고 그렇게 되면 느그 아버지도 행복하지않게 되는 거란 말이다.
아버지도 아버지 인생이 행복해지려면 산다는 것에 대한 기쁨이 있어야 하고 부모란 건 자식이 행복해지는 걸 통해서 존재의 가치를 느끼는 기라꼬 형이 말했제?
니도 니 맴 잘 잡아가가 살아있다는 것에 대해 생각함 해보그레이. 알았제?"
형의 말엔 힘이 있었다.
거부하기 어려운 그 것은 진실이라는 것과 사실이라는 것만이 가질 수 있는 , 아니 진리라는 것이 같는 절대적인 것이었다.
'살아있다는 것' 그렇기에 괴로울 수도 행복할 수도 있는 이 시간과 시간 사이에 내가 해왔던 선택은 무엇이었을까.
갑자기 정말 행복해져야만 할 것 같은 의무감이 들었다.
내 인생을 바꿀만큼 날 옥죄어 왔던 건 어머니의 죽음도, 아버지의 재혼도 아닌 나 자신의 선택이었기에 머리속이 멍해졌다.
"병근아?"
"아, 네? "
"자슥은.. 생각은 혼자 하고 얼능가서 케찹 좀 꺼내온나? 니는 어케된게 시차극복도 안된 형이 차려주는 밥상 먹으면서 꼼짝도 안하고 있노? "
우리는 웃었고 맛있게 식사를 했다.
웅주형이 주는 선문답같은 짧은 대화가 내내 머리속을 맴돌았다.
어쩜 미은이와 나의 만남도 내가 살았있기에 가능했음을 왜 몰랐을까.
매일 호흡하는 공기의 소중함을 모르듯이 나는 나에게 주어진 삶의 선물의 깊이를 몰랐음에 틀림없었다.
내 마음이 평온해지니 한 꺼풀 벗겨진 것 마냥 일상의 시간들이 소중하게 느껴졌다.
그런 시간의 소중함을 웅주형도 느꼈을 것임에 틀림없었다. Sunny누나가 가게로 들어서자 마자 '꺄악~'소리를 내며 형에게 달려가 넘어질 듯 세게 형을 안았으니깐 말이다.
누나와 형은 아주 잠깐 서로를 껴안더니 이내 멀찍이 떨어져 앉아서 한 참 동안을 이야기 했다.
둥근 창문을 뒤로 두고 두 명의 노련한 바텐더는 손으로는 영업을 준비하면서도 눈을 서로에게서 잠시도 떼지 않으채 연신 웅주형과 누나의 비밀 손동작까지 병행해 가며 수다에 수다를 더해갔다.
보기 좋은 두 사람의 모습에 알싸한 현실이 오버랩되며 조금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서있는 내 등 뒤에서 컴퓨터를 두드리고 있던 미은이의 혀차는 소리가 들렸다.
"저러니가 저 두 노땅커플은 안된다니까."
눈꼬리를 올리며 바라보는 나를 오히려 미은이가 동그란 눈을 가늘게 만들며 물었다.
"왜? 오빠 내 말이 틀려? 봐봐. 저렇게 서로 좋아하면서 왜 저렇게 안타깝게 그러는거야? 사랑하는데 둘이 함께 할 수 있는데 뭘 망설여?"
"니가 아는게 전부가 아니야. 저 두 사람 자신들만의 이유가 있으니 저러는 거겠지. 그래도 그렇지 노땅커플이 뭐냐?"
"그럼 아냐?"
"다음 부터는 늙수그레 커플이라고 불러."
미은이는 배꼽을 잡고 웃었다.
"아무리 오빠가 뭐라고 해도 난 이게 내 운명이라고 생각해."
"운명?"
짜자잔 소리를 내며 미은이가 나에게 돌려놓은 모니터에는 이 바의 사장인 형의 프로필이 떠 있었다.
"이게 왜?"
"어휴, 오빤 생긴건 섬세하게 생겨서 왜그렇게 무뎌? 봐, 정확히 17일 있으면 웅주아저씨 생일인거 안보여? 그것도 그 거룩한 40살 생일, 에이 정말 아저씨 나이 많지? 이게 바로 Dday 야."
난 미은이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또 그 Dday 타령이십니까, 아가씨?"
미은이는 뺨에 불이라도 난듯이 화끈거려했다.
그래도 천하의 미은이가 이만한 놀림에 물러설리 없었다.
"흥, 오빠도 내 말을 들어보면 좋은 아이디어라고 할껄? 자고로 중이 제머리 못깍는 다고 저렇게 사연많고 나이많고 서로에게 용기가 없어 다가서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나같은 메신져가 필요한 법이라고. 내가 웨이터 오빠한테 물어봤는데 아직 한 번도 웅주아저씨 생일 가게에서 차려준 적 없다며? 아저씨가 부담스럽다고 늘 피해왔대. 그것도 다 눈치가 없어서 그래요. 보면 몰라? 웅주아저씨 같은 사람에게는 사랑의 깜짝쇼가 필요하다고, 미리 말해서 -아저씨 , 올 생일은 가게에게 해요? 하면 아저씨가 그러라고 할 거같아? 미리 우리끼리 다 준비하고 짠하고 멍석을 펴줘야 못이기는 척 응할 수 있는건데..다들 너무 무뎌, 암튼. 오빠 내 계획에 동참할 거지?"
사랑의 깜짝쇼라...듣고보니 맞는 말 같았다.
하긴 난 형이 말해주기전엔 누나와 형의 감정의 심각성을 더디 께우쳤으니 미은이의 말이 맞을 수 도 있긴 했다.
아침엔 형이 깜짝쇼로 나타나더니 이젠 미은이의 쇼가 준비된다니 괜히 설레임이 드는 거였다.
"그래야지, 누구 부탁인데, 내가 뭘하면 되냐?"
"따라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