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연과 영준은 그 후로 두 번을 더 만났다.
처음 만난 날 어떨결에 진한 사랑을 나누었지만, 그 후로의 만남은 점잖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 얼굴만 바라보아도 두근거리고 흥분이 되었다.
미연은 진희와 헤어질 결심을 굳게 한 후라 영준과의 만남이 덜 부담스러웠다.
그녀에겐 약간의 시간만 필요했을 뿐이다.
그렇게 두 사람은 행복한 밀애를 나누고 있었다.
짧은 가을이 끝나고 겨울길목에 접어들어 무척 날씨가 쌀쌀해졌다.
그날 경영학과 대학원생들은 3시간짜리 오전 세미나를 끝내고 점심을 먹으러 함께 구내식당으로 향했다.
날씨가 추운탓에 사람들은 갈비탕, 육개장같은 뜨끈뜨끈한 국밥류를 시켰다.
미연도 국밥을 시켜 국물을 한숟가락 떴다.
숟가락에서 피어난 김이 코끝에 닿는 순간 그녀는 메스꺼워 '욱'하고 구역질을 하였다.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미연에게 향했다.
알건 다 알만한 나이의 사람들이라 미연의 헛구역질이 무슨 뜻인지 짐작하는 눈치들이었다.
사람들은 미연을 쳐다보던 눈길을 일제히 진희에게로 옮겼다.
미연은 너무나 놀라고 창피했다.
미연은 얼굴이 빨개져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킨 것은 먹지도 않은 채 반납하고 식당에서 나가버렸다.
진희는 당황한 얼굴로 사람들을 한번 둘러보더니 이내 미연을 쫓아나갔다.
쫓아온 진희는 미연의 팔을 잡아끌고 식당 뒤 언덕으로 데려갔다.
"뭐야? 너, 임신했어?"
"몰라...그런가봐...."
"너 미쳤니? 왜 조심을 안해?!"
"그날 네가 막 해버렸잖아!"
"그래도 네가 못하게 했어야지...아휴, 미치겠네!"
진희는 화가 나 발끝에 걸리적거리던 나뭇가지를 발로 차 날려버렸다.
진희보다도 미연이 더 미칠 것만 같았다.
'하필 그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헛구역질을 하다니...'
화가 나서 투덜거리는 진희를 뒤로한 채 미연은 빠른 걸음으로 학교를 벗어나 집으로 갔다.
집으로 향하는 길에 약국에 들러 자가진단 시약을 샀다.
아니길 바랬지만 결과는 양성이었다.
문득 어떤 생각이 스쳐 미연은 소스라친다.
진희와 일을 벌이기 바로 이틀 전, 영준과 지냈던 그 밤의 일이 기억난 것이었다.
미연의 이마에서 식은 땀이 흘렀다.
밖에서 초인종 소리가 났다.
진희가 집으로 쫓아온 것이었다.
"미연아, 미안해, 아깐...아깐 좀 놀라서 그랬어. 나, 너 원망한 거 아냐, 화내지 마, 응?"
진희는 아까 미연에게 화를 낸 것이 미안했는지 얼른 집까지 쫓아와 용서를 빌었다.
"미연아, 우리 결혼하자. 어쩌면 이게 다 운명인지도 몰라. 그동안 사귈대로 사귀었으니까 이젠 빨리 결혼하라고 하늘이 계시를 내린 것인지도 모르지. 안그래?"
미연은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진희는 계속 미연을 안심시킨답시고 말을 하였다.
"일단 나랑 병원부터 가보자. 확인하고 임신이 확실하면, 결혼식하고 살림차릴 계획을 세워보자구."하며 진희는 미연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미연은 머리속이 엉클어져서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정신이 멍한 채로 진희를 따라 병원으로 갔다.
"축하드립니다, 임신 2개월입니다."
"고맙습니다."
진희는 애써 미연 앞에서 아빠가 된 것을 무척 기쁜 척 하였다.
미연은 아직도 얼이 빠져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병원에서 나와 택시를 기다리며 진희는 "잠깐만..."하더니 벽에 붙은 공중전화로 다가가 전화를 하기 시작했다.
"누나? 나야. 누나, 나 사고쳤어. 미연이 임신했어....."
그 소리를 듣고 미연은 뒤통수를 한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정신이 아찔하여 휘청거리며 건물에 기대었다.
'영준씨...어쩌면 좋아요? 나 어쩌면 좋아...?'
미연은 울음을 터트렸다.
서울에 사는 누나한테 미연의 임신소식을 신나게 알리던 진희는 미연이 갑자기 울음을 터트리며 주저앉자, "누나, 엄마한테도 전화해서 알려줘, 알았지?"하며 전화를 얼른 끊는다.
진희는 미연을 부축하여 일으켰다.
"미연아...이리와봐. 잠깐 저기 들어가서 앉자."
병원 옆 다방으로 미연을 부축해 들어간 진희는 미연이 안스러운지 계속 위로의 말을 하였다.
"미연아, 우리 아이 가진 게 뭐가 울일이야? 울지마. 누나한테 전화했더니 좋아서 펄쩍 뛰더라. 나 삼대독자인거 알잖아. 우리 부모님들 손주 얼마나 기다리고 있는데...너 이제 학교 휴학하고, 딴 생각말고 집에서 쉬면서 결혼 준비나 하자구. 창피해 하지마. 어차피 결혼 할 거였는데 남들한테 부끄러울 거 없잖아, 안그래? 우리 최대한 빨리 예식장 잡아서 결혼식 올리자, 알았지? 울지마..."
미연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그게 아냐, 그게 아니란 말야!'하고 소리지르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등을 쓸어주는 진희의 팔에 안겨 엉엉 울던 미연은 울음을 진정하며 진희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이...지우면 안될까?"
"뭐? 무슨 소리야?"하며 진희는 펄쩍 뛰었다.
"너...아이 아직 원치 않잖아..."
"하지만 우리 식구들도 다 알아버리고, 친구들도 다 알아버렸는데, 어떻게 그래? 사람들이 뭐라겠어? 그건 말도 안돼."
"결혼, 우리...더 있다가 하자. 우리 공부는 어떻게 해...?"
"걱정하지마. 일단 결혼하고, 애 낳고, 그리고 천천히 복학하면 되잖아. 나야 뭐, 일단 석사 마치고... 까짓것 공부 그만 하고 취직하지 뭐. 그러다 봐서 여유생기면 또 박사하고...그럼 되잖아, 안 그래?"
진희는 미연의 임신소식을 주위에서 다 알게 된 마당에 결혼을 미룰 수는 없었다.
더군다나 아이를 지운다는 건 말도 안되는 일이었다.
그러지 않아도 빨리 손주를 보고 싶어 두 사람의 결혼을 재촉하던 부모님들이었다.
'이 아이가 만약....네 아이가 아니면....어떻게 해...?'
미연으로선 이대로 진희와 그냥 결혼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미연은 이 상황에서 벗어날 길이 없을 것만 같았다.
진희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에게 진희가 아닌 다른 남자와 만나고 있었고, 이 아이가 그 사람의 아이일지도 모른다는 그런 이야기를 과연 할 수 있을까.
차라리 미연은 이 아이가 진희의 아이라고 믿고 싶었다.
이 상황을 바꿔버릴 자신이 없어 미연은 그렇게 믿어버리고 말았다.
미연은 마음에도 없는데 자신의 결혼식 준비가 주변 사람들에 의해 진행되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