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주방일이라는 궂은 일을 하게 되었지만, 미래클럽에서 일을 하게 된 것은 미연에게는 아주 잘 된 일이었다.
생활비를 해결하게 된 것을 뜻하는 것만은 아니었다.
미연은 이곳에서 일하면서 새로운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는 그녀 인생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던 것이다.
손님이 잦아지기 시작하는 오후 3시에 출근하여 문을 닫는 12시까지 미연은 주방안에서 한발짝도 나오지 않고 설겆이, 그릇정리, 채소다듬기, 양파썰기등으로 힘들고 바쁜 시간을 보냈다.
처음엔 너무나 힘들어 녹초가 되어 집으로 돌아가 골아떨어지곤 했다.
그런데 일은 이내 익숙해졌고 그곳에서 일하는 것이 너무나도 즐거운 것이 되었다.
그것은 다름아닌 매일 벌어지는 라이브 공연들 때문이었다.
무명가수들의 노래, 아마추어 피아니스트들의 피아노 연주, 재즈 밴드나 인디 밴드들의 연주가 번갈아 흘렀다.
한 두달마다는 친구인 미래의 노래도 직접 들을 수 있었고 가끔씩 유명한 가수들이 우정출연해주기도 했다.
미연은 매일 일을 하러 나오면서 오늘은 누가 나와 노래를 할까, 어느 밴드가 나와 무슨 연주를 할까하고 기대하는 습관이 들게 되었다.
주방에서 일을 하다가 저녁 공연시간이 되어 그들의 음악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면 저절로 흥분이 되었다.
신인 가수들이 나와 노래를 하는 날이면 그릇을 씻으면서도 '저 가수는 발음이 좀 부정확하구나, 저 가수는 너무 목을 많이 쓰는구나, 저 부분에서는 감정을 덜 넣는 게 나았을텐데...'하며 나름대로 그들의 노래에 대한 평을 하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음악을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해보고 싶은 욕망이 솟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루 영업이 끝나고 클럽 식구들이 모여 여느 때처럼 야참을 먹고 있는데 키보드 연주자인 광식이라는 청년이 새 키보드를 장만했다고 자랑을 늘어놓았다.
그러면서 전에 사놓고 안쓰는 키보드가 하나 있는데 사고 싶은 사람 없냐고 광고를 했다.
미연은 솔깃하여 광식에게 어떤 키보드인지 물어보았다.
"로랜드제예요. 아주 좋은 건 아니구요...마스터 겸용으로 쓰는 신서사이즌데 그래도 쓸만해요. 얼마 쓰지도 않았구요. 값은 그냥...한 삼만원정도만 받으려고요. 사실, 그냥 드릴 수도 있는데, 제가 요즘 좀 궁해서요. 그런데, 미디 음악 만드시나요?"
"공짜가 어딨어? 그러지 않아도 키보드 하나 사고 싶었어. 그런데 미디라니? 그게 뭐야?"
"그런 키보드를 컴퓨터랑 연결해서 만들기도 하구요, 컴퓨터로 시퀀싱해서 만들기도 하고 그런 음악 말예요. 요새 미디 음악 많잖아요. 모르세요?"
미연은 뭔지는 몰라도 컴퓨터로 음악을 만든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았다.
"들어본 건 같은데...좀 가르쳐 줄 수 있어? 재미있을 거 같아."
"사실 저두 해볼려다가 포기했어요. 제가 컴맹이라 그런지 잘 안되더라구요. 그래도 요즘은 인터넷에 그런 거 강의도 많고 음악도 많아서 혼자서도 배우기 쉬울 거예요. 컴퓨터 할 줄 아시죠?"
"음...할 줄 알아. 좋아, 그럼 낼 키보드 가져와. 지금 내가 돈 줄테니까."
"와, 잘됐다. 고맙습니다. 낼 꼭 가져올께요."
미연은 다음날 키보드를 받기 전에 오전 중으로 컴퓨터를 한 대 장만하였다.
이혼하면서 웬만한 가재도구를 다 처분하느라 쓰던 컴퓨터 마저도 없애고 말았다.
방한칸 짜리 친정집으로 들어오는 마당에 옷가지 말고는 아무것도 가지고 올 수가 없었던 것이다.
친정집 마루에 컴퓨터 책상이랑 컴퓨터, 그리고 광식한테서 산 키보드까지 설치해 놓고는 미연은 마음이 뿌듯하였다.
이제 미연의 생활은 너무나도 즐거워졌다.
장미와 아침밥을 먹고나면 장미는 책을 읽거나 비디오를 보고 놀았고 미연은 출근하기 전까지 꼬박 컴퓨터 앞에서 놀았다.
인터넷 사이트를 뒤져가며 미디 음악 만드는 법을 배웠다.
간단한 음악을 만들어 보면서 언젠가는 라디오에 나오는 그런 완성된 음악을 만들어보리라는 꿈을 꾸게 되었다.
미연이 그렇게 1년 가까이 미래클럽에서 일하면서 어느덧 생활의 틀이 잡혀갔다.
클럽은 문을 연지 단 몇달만에 라이브 명소로 유명해져서 연일 젊은이들의 발길로 북적였다.
가수지망생들의 출연 문의도 끊이지 않았다.
미래는 생각보다 클럽이 성황을 이루자 점점 감당하기가 힘들어졌다.
매상이나 서비스 관리는 이미 전문매니저를 두고 있어 별로 걱정이 없었지만, 공연 부분은 가수나 밴드의 문의가 예상을 훨씬 뛰어넘어 공연 스케줄을 짜기가 힘들 정도였다.
전속밴드에게 공연 스케줄 짜는 일을 맡겼는데 그들만 가지고는 스케줄 말고는 정작 이 클럽을 연 목적인 오디션 문제나 뮤지션을 발굴하는 그런 일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원래 미래의 취지는 실력있는 가수나 연주자를 발견하면 라이브 무대에서 단련시킨 다음, 궁극적으로 음반회사와 연결시켜주려고 했던 것이었다.
그런데 몇명 안될 줄 알았더니, 한달에 한번 보는 오디션에 수십명이 참가 신청서를 냈다.
그들은 사실 그저 무명으로 남아도 라이브무대에 한번 서보는 것 만으로도 상당히 기뻐했다.
하지만 미래는 더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오디션을 행하여 자신의 원래 목적을 심각하게 추진하고 싶었다.
그리하여 자신의 소속 음반사의 사장에게 신인발굴부서 직원을 자기클럽에 보냈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이야기하였다.
자신의 클럽무대를 오디션장을 활용하여 이 회사를 통해 신인 가수를 많이 배출하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늙은 사장의 반응은 시큰둥하였다.
"요즘 음반시장 불황인 거 알잖아. 그런 애들 투자했다가 자칫하면 그거 회사 날라가는 일이야. 생각이야 참 좋지. 나도 첨에 이 회사 차릴 때는 그런 생각 갖고 있었어. 그리고 옛날에는 정말 그렇게들 했었어. 무작정 상경한 가수지망생들, 그저 목소리 하나보고 데려다가 연습시켜서 음반내게 해주고, 그래서 히트치면 떼돈 벌고 그랬지. 아니 멀리도 아니고, 내가 장미래씨 데뷔시킬때만도 그랬었지. 그런데 이젠 시대가 그렇지가 않잖아. 경쟁이 좀 심해? 가수 하나 띄우느라 든 홍보비만도 건지기 힘든 판이야. 요새 뮤직비디오 안찍고는 어디 명함도 못내미는 세상인데, 뮤직비디오 찍는데 얼마나 드는지 잘 알잖아. 그리고 누가 요새 쌩으로 투자를 하나? 가만히 있어도 키워달라고 돈들고 찾아오는 세상인데....생각은 훌륭하지만, 그렇게 언더에다 투자하겠다는 회사 아마....없을껄?"
"그래도 그 중 일년에 한 둘 정도 발탁해서 키워보면 승산있지 않나요? 실력있는 애들 정말 많던데...게다가 라이브로 키우면 장기적로 봤을때 돈싸들고 오는 반짝 가수들 보다 훨씬 낫잖아요?"
"장미래씨 경우 보면 뭐, 그렇지, 맞아. 그리고 옛날처럼 가창력있는 가수가 대접받는 세상으로 점점 추세가 바뀌어가고는 있긴한데...음반 내는 일이 한두푼 드는 일이라야지. 게다가 뜨고나서 갑자기 계약깨고 소속사 뜨는 애들이 어디 한 둘이던가? 미래씨처럼 의리만 있어준다면 문제없지. 하지만 요즘 애들....좀만 대가리 컸다하면 그냥 돈따라 이리 저리...쯧쯧...노래를 하자는 건지 뭘하자는 건지..."
미래는 사장과 이야기를 나누고 나서 좀 실망이 되었지만, 성급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꼭 그 일을 자기 소속 회사와 함께 추진할 이유는 없었다.
다른 음반사 관계자들과 자꾸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뜻이 맞는 경우도 있을 것이고, 사장처럼 말은 그렇게 해도 언더그라운드에서 뜨게 되면 결국 음반사에서 먼저 접근하는 수도 많았다.
미래가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사장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났는지 급히 말을 꺼냈다.
"아아, 이봐 미래씨, 잠깐만. 박영준이라고 알지? 몇년 전에 스튜디오 하나 차린 친구 있잖아. 그 친구 그런 쪽으로 관심이 좀 있던 거 같던데? 젊은 사람들끼리니까 의견 맞추기도 쉬울거 같고. 연락한번 해봐."
"박영준씨요? 아, 맞아. 그 사람한테 한번 연락해볼까요?"
박영준이라는 사람은 명문대학 출신의 가수이자 작곡가였다.
정치학과를 다녔지만 학과공부에는 관심이 없이 언더그라운드 무대를 전전하는 일로 대학시절을 보낸 사람이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미래와 비슷한 시기에 미래가 몸담은 소속사와 경쟁관계에 있는 대형음반사에서 첫 음반을 냈었었다.
그리고 몇년 후 자신의 음반사를 차려 지금까지 여러명의 인기가수를 발군해낸 기량있는 기획가이기도 했다.
미래는 그 사람과는 만난 적이 없어 어떤 사람인지는 몰랐지만, 들은 소문으로는 인상이 좋았기때문에 주저없이 연락을 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