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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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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를 사랑하세요


BY 이윤하 2005-11-14

두근두근...울렁증이 시작하려한다.

피가 갑자기 머리 한가운데로 몰렸다가 갑자기 폭포처럼 등줄기를 타고 쏴아 쓸려내려가는 느낌, 이틀간  굶은 상태로 누워있다가 창가로 쏟아지는 햇살때문에 몸을 일으켰을 때의 현기증...

할말을 모두 잊었다.

마치 버스에서 서있다가 급정거 하는 바람에 우루루 쏟아진 가방속의 물건들을 허둥지둥 주워담을 때 처럼 수아는 무슨 말부터 다시 주워담아야 하나 허둥대고 있었다. 몇분의 침묵이 흘렀다.


"...너가...나에게 좋은 감정이 있다고 착각했나봐..."

무거운 침묵에 화가난 수아가 먼저 말을 꺼냈다.

"널 좋아해, 좋아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함께 술마시고 놀러다니고 그랬겠어."

"그런데 지금 너의 그 당황스런 표정은 뭔데?"

"널 좋아하지만...한번도 너를 친구 이상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어...좀 당황스럽다."

-뭐라고? 친구 이상으로 생각한 적이 없다니...너무 비겁한 변명이다, 너.

"나랑 손잡고 안고 이마 맞대고 깔깔거리고 어깨를 안고 걸어다니던 건 그럼 친구였기 때문에 단지 편해서 그랬다는 거야?"

-...이말은 정말 하고 싶지 않은데...결국 순진한 나를 그렇게 대했으니 책임지라는 말처럼 들렸을텐데...이게 무슨 신파야...

"수아야, 내가 널 오해하게 만들었나부다. 난 정말 니가 너무 편해서, 그리고 정말 좋은 친구라 생각해서 아무 거리낌없이 대했던 건데..."

지금 대답할 수 없다면 차라리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말해. 제발...

 

남자들이 아주 좋아하게 생긴 청순한 외모의 친구가 한 명 있었다.

고등학교 때 부터 예뻐지기 시작하더니 어딜가나 남자들이 목을 메고 따라다녔고, 대학 다닐 때도 양아치부터 사법고시 패스한 선배까지 다양한 스캔들이 끊이지 않던 친구였다.

심지어 수아를 만나러 학교에 왔을 때도, 학교 영화동아리 회장이 당신의 분위기가 지금 준비하고 있는 영화에 딱이라며 출연해 달라고 사정할 정도로 분위기 좋던 그 친구는, 안타깝게도 자기 의사에 의해 헤어지는 경우가 한번도 없었다.

물론 대시하는 모든 남자와 사귀었다면 얘기는 틀려졌겠지만 이 친구의 feel은 '카리스마'있는 남자에게만 꽂혔고, 반년도 못가서 늘 채이기를 반복했다.

남자들이 그 친구를 정복하기 위해선 두 달이 걸렸고, 떼어낼 때도 두 달이 걸렸다.

남자를 골라서 사귈 정도의 그녀도 쿨하지는 못했다.

그 친구는 수아와 달라서 연애하는 전 과정이 거의 실시간 생방송으로 전해졌고 몇번의 실연끝에 수아 역시 그녀를 차버린 남자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의 집요함. 그것이 이유였다.

일단 그 남자의 여자가 된 후에는 그 남자의 24시간을 꿰고 있어야 했다.

성격도 생김새와는 달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남자들은 호락호락하지 않은 그녀와 성격과 집요함 때문에 바람을 피웠고, 또 그녀의 더듬이를 피하지 못해 걸렸다.

문제는 그녀의 뒷처리였다.

그렇게 많은 남자들이 대기중이었음에도 바람을 피운 그 남자에게 매달렸다.

이미 마음이 떠나 다른 여자를 만난 그 남자들은 그녀의 끈질긴 설득에 더욱 질려했고, 그녀를 떼어내기 위해서는 잔인한 말과 행동을 보여줘야만 했다.

수아는 그 친구의 연애를 가장 가까이 목격한 사람으로, 성경같은 교훈을 얻게 되었다.

연애할 때 절대 집요함을 내보이지 말 것, 일단 다른 여자가 생긴 걸 알았을 때는 쿨하게 떠나 보낼 것. 그래야 더 더러운 꼴 안보고 내 마지막 자존심을 챙길 수 있다는 것을...

 

-이쯤에서 쿨하게 정리해야 한다. 세상에 남자는 딱 두 종류다. 나를 여자로 좋아하는 남자와 나를 여자로 좋아하지 않는 남자. 성호는 날 여자로 좋아하지 않는다.

성호의 기억속에 그나마 좋아던 이미지로 남기 위해선 여기서 끝내야 한다.

구질구질 매달렸던 것은 '그' 하나면 족하다.

 

"내가 친구로는 좋아도 니 여자로는 싫은 이유가 뭔데?"

- 이것만 물어보자. 다른 여자들에게는 나에게 했던 그 흔한 스킨쉽 한번 하지 않던 성호였다.

그 점은 정말 궁금하다.

내가 막해도 되는 여자로 보였니? 이것도 묻고 싶지만 너무 비참하다.

 

"예전에 너와 사귀어 보고 싶은 적이 있었어."

-그것봐...내 착각은 아니었잖아.

"그런데...난 연애와 결혼을 따로 생각하는 사람이 아닌거 알지?"

-그럼 알지...나 너랑 결혼까지도 생각하고 얘기하는 거야. 그럼 지금 이 나이에 결혼 생각없이 니 마음을 받아주겠다고 결심했겠니?

"근데 그때 니가 그 10년을 얘기하더라."

"이젠 정리하겠다고 말하고 있잖아."

"결혼할 여자의 마음에 나 말고 다른 남자가 있었다는 거, 그것도 그렇게 긴 시간을 사랑해 왔다는 걸...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더라구."

"그럼 도대체 왜 내 주변에서 그렇게 뱅뱅 돌았던 거야? 왜 내가 오해하게 만들었냐구. 이제 정말 니가 좋아지기 시작했는데...이젠 정말 너의 자리가 더 커졌는데..."


세상에...통제안되는 눈물이 쏟아지면서 엉엉 울음이 터졌다.

쿨하게? 아니 이건 정말 쿨한게 아닌데...이판사판이지 뭐...어차피 이러고 헤어지면 다신 얼굴을  볼 수 없을 텐데 그까짓 좋은 이미지 다 필요없어. 이제 니 손길이 좋아졌는데, 이제 '그'보다 니 생각을 더 많이 하는데...


"수아야...괴롭다. 이러지마."

성호는 또 수아를 안아버린다.

오해하게 했던 자신의 행동을 용서하라면서 또 수아를 안아준다.

-어떡해...이 순간도 난 이 품이 너무 따듯한걸...날더러 어떡하라구...

"힘들겠지만 넌 이겨낼 수 있을거야. 넌 강한 아이잖아."

-엉엉...난 강하지 않아. 절대 강하지 않다구...도대체 무슨 근거로 날 강하게 본거야. 난 엄마가 되기 전까지 강하기 싫다구...나도 사랑받고 보호받고 싶은 여자란 말야. 날 제발 강하게 보지마...

"수아야, 잠깐만. 잠깐만 그쳐봐. 내 생각에 지금 니 감정이 온전한 사랑이라고 생각하

지 않아. 그 선배때문에 힘들어서 잠깐 쉬고 싶었던 거야. 너 기다린다고 했잖아. 그 사람 일본에서 돌아오면 다시 도전할꺼라구."


일순간 감정이 회오리치다 태풍의 눈처럼 고요해지는 기분이다.

온전한 사랑이 아니라구? 그렇게 피해가고 싶구나...

왜 이렇게 멀리 온거지? 다시 돌아가려면 이 빗길에 족히 두 시간은 걸릴텐데...


"그만 돌아가자. 비가 너무 많이 오네. 두 시간은 족히 걸리겠지?"

갑자기 냉정을 찾은 수아를 바라보는 성호의 눈가에 눈물에 맺혀있다.

"수아야, 넌 정말 좋은 여자야. 사람을 편하게 해주는 재주가 있지. 특히 남자들을...그래서 너 주변에 계속 머물러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친동생 같기도 하고, 군동기같기도 하고..."

"야, 김성호, 너 그게 여자한테 할말이야? 차라리 위로를 하지마. 정말 비참해 지니까."

"왜 여자들은 그런 말에 비참해 하는 거야? 다른 여자들과 틀리다는 말이야. 특별한 존재라구..."

"그래, 알았어. 그러니까 빨리 가자고. 더 어두워지기 전에 출발해."

특별한 존재?  차라리 여자로서의 매력이 없다고 말하는게 낫지.

군동기같애? 어이가 없다. 그럼 너는 군대에서 친한 동기한테도 나에게 하듯 했단 말이야?


"너 출발안하면 나 혼자라도 갈꺼야."

차 문을 열자 비가 거세게 얼굴을 때린다.

화사한 원피스를 입고 빗속을 뛰어가는 꼴이라니...

성호가 뒤따라나와 손목을 잡는다.

자연스레 마주 선 두 남녀를 지나가는 사람들이 힐끗거린다.


"수아야, 너 이러면 난 어떡하니. 들어가자. 들어가서 얘기해."

"무슨 얘기, 더 할말 없잖아. 난 니가 좋다하고 넌 내가 싫다하고, 무슨 얘기가 더 남았는데?  나 이렇게 비참해 지는 거 보려고 그동안 나한테 그렇게 대해줬니? 널 정말 이해할 수 없다. 내가 이상한건가? 어느 누가 보더라두 너의 그 행동은 남자가 여자를 좋아할 때 하는 행동이었다구. 이게 뭐야. 속 시원하니? 짝사랑에 괴로워 하던 여자를...

넌...가지고 논거야."

진정된 줄 알았던 감정이 다시 회오리친다.

수아는 자신의 말에 스스로가 격해져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일단 타라. 출발할께."

그녀의 말에 화가났는지 휙 돌아가버리는 성호 뒷모습에 더 잔인한 말을 뱉어주고 싶은데 자꾸 울음이 나서 말을 할 수 없다.

 

돌아오는 길에 수아도 성호도 서로 말이 없다.

성호는 가지고 놀았다는 말이 그렇게 화가 난건지, 더 이상 변명거리가 없는 건지, 울음을 그치지 못하는 수아를 바라볼 뿐이었다.


아파트 주차장에 미끄러지듯 차를 세운 성호가 드디어 말문을 열었다.

"일단 들어가서 따듯한 물에 샤워하고 푹 자라. 감기들겠어."

마지막 말이 될 지도 모르는 작별인사 치고는 참 간단하고 깔끔하다.

내일이 되면 수아는 미처 말하지 못한 것들에 대해 아쉬워 하고, 고백한 것에 대해 후회를 하겠지만 미쳐 말하지 못한 것이 뭔지 지금이야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수아는 작별인사도 하지 못한 채 그렇게 성호를 보내고 말았다.


그날 밤, 수아는 성호의 전화를 기다리며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