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원과 소영은 항상 일정한 거리를 두고 지내왔다. 자신들이 뜻하지 않은 것도 있겠지만 정작 이 둘에게는 무의식적으로 메모를 통한 약간의 교류만 필요했을 뿐. 서로에게 더 이상 궁금한 것도 없고, 많은 것을 알지 못한다는 아쉬움조차도 없었다. 다만 얼굴은 확인하고 싶다는 호기심이 요동을 쳤지만 그 호기심을 채워줄 만남은 연결되어주지 못했다. 간혹 채원이 일어난 자리에 소영이 앉기도 하였고, 자판기에서 소영이 커피를 빼서 사라
지면 그 뒤에 멀뚱하니 서있다가 설탕커피를 누르고는 홀짝이며 마시는 그런 엇갈린 만남 이 있었을 뿐이다. 1학기 동안 소영은 정환과 어느 정도의 만남을 유지하며, 서로의 사랑에 빈틈을 만들지
는 않았다. 너무 다정하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서로 등을 돌리는 연인사이도 아닌 그저 캠퍼스커플다운 모습으로. "어. 이제왔어!"
아름드리 은행나무 아래 벤취에 앉아 소설책은 보던 정환이 소영을 반겼다. 나무들은
더없이 푸르렀고, 태양은 여름을 준비하기 위해 점점 열을 달구는 화창한 날이었다. "응. 먼저 와있었네. 그런데 그 책은 뭐야?"
"그냥 심심해서 읽는 책인데 아직 내용은 잘 모르겠어."
정환은 읽던 책을 가방속으로 넣었고, 소영은 책 귀퉁이의 제목을 작은 목소리로 읇조렸
다. "탈냉전 시대!" "점심은 먹었어? 난 무지 배가 고픈데."
"아직 안 먹었어. 너를 만나는 데 어떻게 밥을 먹어? 그래서 조금은 늦은거고. 친구들이
어디 가냐고 성화를 내더라구." "그으래? 그럼 우리 민생고부터 해결을 할까?"
"좋아. 뭐 맛있는 거 사줄건데?"
"소영이 먹고 싶다는 거. 모두."
둘은 행복하게 웃었다. 소영은 자기가 먹고 싶은거 모두 먹으면 뚱뚱해져서 지구가 무거
워 할거라며 애교스럽게 웃었고, 정환은 그저 괜찮다는 듯 웃었다. 주차장으로 향한 후 시동을 건 정환이 말을 꺼냈다.
"우리 오후 강의는 모두 잊고 좀 멀리 나갔음 하는 데!"
"배 고프다니깐? 어디를 가는 데 멀리야?"
"너만 허락한다면 어디든."
"안돼. 강의 때문에."
정환은 실실 웃으며 소영에게 조르듯 다시 말을 꺼냈다.
"그러니깐 너가 허락한다라는 전제를 했잖아. 제발 우리 바람쐬러 나가자? 응?"
"그건 그거고. 이 차는 뭐야?"
"너가 간다고 하면 말해줄게! 빨리 가겠다고 말해."
정환은 연신 장난스런 표정으로 뿌리치지 못하게 만들었고 소영은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을 했다. "됐지? 그럼 이제 이 차는 뭔지 말해. 학생이 무슨 이런 중형차야?"
"별거아냐. 우리집 꼰대랑 약속을 했거든. 공부 열심히 하겠다고."
"그거랑 무슨 상관인데? 공부와 차는 연관지어지지 않는 거잖아."
"왜 연관이 없어? 버스와 지하철에 시달리면 학교에서 졸음만 온다고 핑계를 댔지. 그랬
더니 이 차를 사주시더라고. 하지만 성적이 떨어지면 다시 몰수 당할거야. 그러니깐 성적표 나오기 전에 많이 타 두어야지. 혹시 알어? 성적이 나쁘게 나와서 차를 빼기게 될지도...." "피."
소영은 입을 삐죽 내밀고는 그래도 조심히 운전하라는 당부를 하며 자세를 고켜 편하게
앉았다. "그래도 편하기는 해서 좋다."
"그렇지? 이 애마의 첫 손님은 소영이 너라니깐!"
차창 밖으로 모든 사물은 바쁘게 멀어졌다. 자동차의 속력이 더해질수록 거리의 풍경은
휙휙 도망을 갔다. 둘은 자유로를 빠른 속도로 지나갔고, 행주대교를 지나 어느덧 강화도에 닿았다.
강화도에 닿자 정환은 핸들을 돌려 전등사로 향한 후 또 전등사를 지나 우회전을 하여
동막해수욕장을 지나 바다가 잘 보이는 장소에 차를 세웠다. "야. 바다 정말 시원하게 눈에 들어온다. 그지?"
"와 정말 바다가 이렇게 높은 곳에서 보니 멀리도 보인다. 여기는 어떻게 알어?"
"응. 친구따라서 몇번 와봤어."
"정환아?"
"응?"
"그런데, 나 굶겨 죽일 작정이야?"
"아 깜빡했다. 미안미안 내가 무슨 그런 큰 죄를..."
정환은 호탕하게 웃고는 시동을 걸어 국도를 달리다가 지붕에 짚단을 얹고 사방벽을 황
토로 만들어진 '샤갈의 마을'이라는 카페의 주차장으로 들어갔다. "이 집 스테이크 맛이 좋아. 생음악도 하거든?"
"무슨 이런 곳에? 학생이 돈이 있기는 뭐가 았다고?"
"괜찮아. 오늘은 주머니 사정이 갯날이거든."
카페의 내부는 밖에서 보던 것과는 다르게 벽에는 주석으로 만들어진 등잔들이 있었고,
가운데에는 동으로 만들어진 화로가 있었으며 한 귀퉁이에서 머리가 발에 닿을듯한 남자가 노래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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