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회 : 655

인연, 쉽게 피지않는 꽃 2-2


BY 푸른배경 2003-10-16

  학교교문을 나와서 걸음을 재촉하는 채원의 뒤로 일찍도 떠오른 달이 따라오고 있었다.
  "C·F? 자식들 그냥 매일 만나던 곳에서 모일 것이지. 오늘따라 무슨 장소를 옮겨서 사람을 이렇게 헤매이게 하는 거야."
  깜박 편지를 읽느라 친구들과 같이 출발하지 못한 채원이 만나기로 한 장소를 찾기 위해 하얀눈동자와 짙은 쌍커풀을 움찔거리며 C·F라는 간판을 찾고 있었다. 그렇지만 정작 보여야할 간판은 보이지 않았고, 머리에 무스를 잔뜩 바르고는 그 위에 스프레이까지 뿌린 후 머리를 바늘처럼 세운 호객꾼이 따라 붙었다. 세상불만을 청바지에 털어놓은 듯 이리저리 정신없게 찢어놓은 옷차림으로.
  "형. 어디 찾는 데요? 쌈박한 아가씨 있는 데. 혹시 안가실래요?"
  "아뇨. 전 지금 약속이 있어서요. 혹시 C·F라고 아세요?"
  "에이 재수없어."
  호객꾼은 초저녁부터 사람을 끌어들이기 위해 혈안이 되었는 지, 눈초리를 흘기고는 사라졌다.
  "아.... 이쯤이라고 했는 데."
  고개를 갸우뚱 거리는 채원에게 머리 쪽에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야. 이봉사. 여기 이 간판은 안보이냐?"
  "어. 상규야. 지금 보려고 하고 있잖아. 애들은 다 왔고?"
  "그럼 임마. 너 만큼 지각하는 사람 봤냐? 아마 엄마 뱃속에서도 너가 제일 늦게 나왔을 거다."
  채원은 댓구를 하지 않고 계단을 향해 걸어갔다.
  "뛰어. 임마. 늦은 놈이 이제 여유까지 부리네. 흐흐흐"
  2층에 오르자 하얀아크릴 판 위에 파란 글씨로 C·F라는 간판과 함께 그 밑에 써있는 작은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배고픈 자는 가고, 술 고픈 자만 들어오시오'
  무슨 저런 글귀가 카피라고 쓴 거야 속으로 생각하고는 이렇게 바꾸고 싶었다.
  '마님은 왜? 돌쇠에게만 쌀밥을 주실까? 궁금하면 들어오시게나!'
  간판과는 달리 가게 안에는 단소의 소리와 함께 문 입구에 놓인 싸리빗자루, 절구통, 도자기 등 고유의 향기가 가득했다.
  "이제 왔냐? 우린 너 기다리는 동안 막걸리 다섯 그릇씩 마셨으니깐. 너도 다섯 사발만 먹고 시작을 해야지?"
  정환이 얄궂은 표정을 하며 채원에게 사발을 건냈다. 테이블 위에는 살점은 어디론가 모두 사라지고 머리와 가시만 앙상하게 남은 고등어가 초라하게 누워있었다.
  "얌마. 뭐 안주라도 있어야 마실거 아냐? 민생고에서 지금 곡을 하는 데."
  "어라! 늦은 주제에 비싸게 구네. 다섯 사발만 마시고 나면 안주 시켜줄게 어서 마셔."
  정환 옆자리의 상규가 채원의 말을 받아 쳤고, 이길수 없다는 표정으로 채원은 다섯 사발을 연신 들이켰다. 마지막 다섯 번째 잔을 들이키고 나니 빈속에 마셔서 인지 하늘이 잠시동안 자전을 시도 했다.
  "안주는 뭐 시킬까? 엄마 나 참새맞어? 이거는 어때?"
  "그게 뭔데?"
  "뭐긴 뭐야. 메추리 구이지!"
  "그래 아무거나 시켜라. 속이 쓰리다 쓰려."
  채원은 인상을 쓰며 답을 하며, 물 한 컵도 순식간에 들이켰다.
  "이놈 물로 배 채우려고 하네. 언능 주문해야 겠다. 상규야!"
  잠시 후 뼈에 살점이 얼마 없는 것 같은 안주와 막걸리 한 양동이가 같이 따라 들어왔고, 이 셋은 사이좋게 양동이 속의 술을 성큼성큼 수위를 줄여나갔다.
  "너. 사랑이 그렇게 궁금하냐?"
  "뭐가?"
  정환의 뜬금없는 질문에 채원은 풀린 눈으로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넌 매일 사랑이 뭘까? 도대체 사랑이라는 단어가 어떻게 태어났을 까? 고민을 하잖아. 시 나부렁이도 항상 사랑 타령이고."
  "그래 궁금한 만큼 답이 얻어지지 않으니 나도 고민이다. 고민이야."
  "야 사랑이 뭐긴 뭐야. 미아리에서 알몸으로 뒹구는 것이 사랑이지."
  "상규. 너 말 잘했다. 내 생각도 그래. 채원이 저놈 혼자만 고상한척 고민을 하는 데, 그런 것은 고등학교 졸업하면서 옵션으로 얻어야 하는 거라고. 아주 자연스럽게."
  "임마. 그게 무슨 사랑이냐. 동물의 야만적인 행위지."
  "그게 어떻게 양만적인 행위냐? 넌 사랑하는 여자가 생기면 그짓 안할거야?"
  "그건 아니지만, 서로의 감정과 교감에 의해서 행해져야만 사랑이라고 할 수 있는 거야. 고등학교때 읽은 탈무드에 의하면 섹스는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서로의 합의와 사랑에 의해서 행하여야만 한다고 했어. 이 말이 그 문구를 올바르게 너희에게 전달한 것인지는 자신없지만 말야."
  "아.... 이놈 또 머리에 쥐나는 말하고 있네."
  마시던 잔을 내려놓던 정환이 손가락으로 삿대질하듯 연신 위아래로 흔들며 채원의 생각이 틀리다고 강요하듯 인상을 써가며 사랑이란 그런 고상한 것이 아니라 초원에서 헐벗고 뒹구는 행위라고 목의 핏대까지 세우며 말을 했다. 하지만 채원은 듣기 싫다는 듯 일어나려다 다시 앉고는 답을 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