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란 것이 무얼까?' 채원은 항상 고민을 해왔다. 공부도 공부지만 고등학교때 잃어버린 첫사랑의 기억때문일까? 수학공식과 영어단어와 그리고 사랑. 머리속에서 떠나지 않고 메아리로 돌아오는 것들 때문에 하마터면 대학입학도 포기해야 했을 정도다. 다만 채원에게 얻어진 것이 있다면 사랑이란? 수학공식이 아니라는 답 정도였다.
그의 머리 속에는 딱 한사람의 이름만이 각인되어 있었다.
'심·희·수'
지우려고 하지도 않았고, 지워지지도 않던 그녀. 자신이 아프다는 것을 마지막까지 숨기다 죽은 후에야 아프다는 것을 알게 했던 그녀. 더 잘해주지 못한 것에 마음이 아팠지만 어쩔 수 없던 일이라며 마음을 위로하고는 했다.
그 이후 사랑은 하지않으리라 굳게 마음먹었지만 '환상의 새'라는 가시나무새의 울음소리가 궁금했기에 마지막, 진짜로 마지막 사랑을 한번더 꿈꾸고 있기는 했다.
채원의 생각에는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가시나무새를 볼 수도 없으며, 가시나무새의 울음소리도 들을 수 없을 거라는 미묘한 생각들이 맴돌았기 때문이다.
'나에게 가시나무새가 환상의 새가 아닌 것을 알려줄 사람이 있을까?'
일기장 귀퉁이에 인쇄하듯 매일매일 써내려갔다. 마치 꿈속에서 깨어나기 싫은 사람처럼 말이다. 그리고는 한가지 덧붙여 생각을 마무리 했다.
'나도 정말, 아님 어쩜, 긴 침묵을 지키다 마지막 생명을 거두며 울 수 있을까? 딱 한번? 아름다운 목소리로.......'
그런 환상의 생각들을 펜팔을 통해서 타인에게 전달했다. 다만 그 펜팔의 상대자의 주소와 이름은 모른체 학교도서관 서양문학 K줄의 콜린 맥컬로우의 소설 <가시나무새>를 통하여서 말이다.
사실 이름모를 그녀를 알게된 것은 도서관에서 잠깐잠깐 그 소설을 들추곤 했는 데, 채원과 똑같은 생각과 행동을 하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그 소설을 읽는 동안 줄을 긋고는 자신의 생각을 적어두면 다음에 읽을 때쯤 가녀린 손으로 쓴듯한 또 한사람의 댓구가 써 있었다. 그렇게 두 사람의 만남? 아니 생각의 교차가 시작되었고, 그 짧은 교환이 끝내 펜팔로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다만 그 둘의 펜팔은 우체국의 소인이 찍히는 것도 아니고, 배달되는 것도 아니었다. 틈틈히 읽는 <가시나무새>의 중간에 꽂아두면서 교환을 하는 것이었다.
'S·Y 님에게
오늘도 바람이 불더군요. 어디서 시작된 것인지 궁금하지만 알려고 하면 할수록 바람이 내게서 멀어지는 느낌이 들더군요. 그래서 그냥 그 바람에 머리카락이 날리도록 가만히 서있었습니다.
도쿠가 이에야스는 낮은 바람에도 깨달음을 얻는 자가 있다고 하던데, 오늘 나의 머리를 흔들은 거센바람은 아무것도 주지 않고 가던군요.……'
'C·W 님에게
호호. 님의 글을 읽다보면 참으로 엉뚱하다는 생각이 드는 날도 있고, 아님 섬세하다는 생각이 들때도 있어요. 하지만 대부분 엉뚱하다는 생각이 많이 들구요.
어떡하면 님처럼 모든 것을 낯설고, 무언가 얻으려고 노력할 수 있을까요? 제 남자친구는 그런 구석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데.
님의 머리카락을 흔들고 지나간 바람이 저에게도 불었겠죠? 전 그 바람의 내음이 참 좋았어요. 봄이라서 그런지 들꽃의 향기가 묻여있는 것 같았거든요.……'
채원은 답장을 읽으며 내가 그렇게 엉뚱한가 고개를 갸우뚱 해보지만, 나를 아직 잘 모르는 사람의 생각이니 그냥 존중하기로만 하고 도서관을 나섰다. 오늘은 답장을 쓰기에 약속시간이 촉박했기 때문이었다.